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 - 「설교문」

적은 자원과 커다란 필요에 나타난 신실하신 하나님 (요한복음 6:1~13)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30 [14:14]

앨리스터 맥크레이 (Rev. Alistair Macrae)
호주연합교회 총회장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세계의 축하 속에 모여 지난 120년 동안 한국에서 섬기신 호주 출신의 선교사들의 용기와 신앙과 유산을 감사드리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한국에서 한국의 두 교단, 대한예수교장로교회(통합)와 기독교장로회와 함께 특별 기념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저들 선교사들을 부르시어 그들의 신실함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깊은 우정과 협력에 감사

호주의 교회들은 또한 한국의 교회가 보여준 환영과 용기, 그리고 능력 있는 복음전도, 병자들의 치유, 고난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구현과 그리고 갇힌 자들을 해방시킴으로 주님께 보여드린 교회의 충실함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한국의 교회들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제 그들은 스스로가 주요 선교교회가 되어 견고하고 약동성 있는 한국사회의 사회복지와 정의실현을 위해 공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주와 한국의 교회들 간에 지속되는 깊은 우정과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현재 호주연합교단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한국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말씀은 호주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사역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수천 명을 먹이신 오늘의 성경이야기는 절대적인 하나님 의지만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최초의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와 엥겔 목사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고등교육을 받은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기를 보면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고향의 안전과 안락을 버리고 거의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이는 하란을 떠나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의지하며 미지의 세계로 향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나게 합니다. 

한국은 오랫동안 서양과 단절되었던 나라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수많은 이유로 인해 불안 가운데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데이비스 목사 역시 험란한 조건 속에서 450km의 장엄한 도보 여정 후에 서울에서 부산에 도착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천연두와 결핵으로 운명하였습니다. 후에 여러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같은 운명과 고통에 처하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죽은 선교사들이 다시 이장되어 묻혀있는 마산 교외의 묘역지를 방문한 후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에 저는 선교사들을 그토록 명예롭게 모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들 선교사들의 성공적 사역을 더 힘들게 했던 문화와 언어와 건강과 고독의 장애들은 분명히 불가능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갖고 있었던 자원들도 무척 미약하였습니다. 

 
미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 나타나 

경남의 거창과 마산에서 25년간 선교사로 헌신했던 제 숙부 프레드 맥크레이 목사도 무척 겸허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역이 성장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성령님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앞에 펼쳐진 도전의 규모와 그리고 자신의 내부의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들 선교사들은 작은 헌물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모세가 바로 이러한 겸허함의 예입니다. 주께서 모세를 불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여 자유케하라고 하셨을 때에 그는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전 언변이 없는 자입니다.󰡓라고 항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에 자신은 너무나 어리다고 말했고, 이사야는 자기가 큰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미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미천한 점심을 바친 어린 아이의 헌물을 취하사 그것으로 커다란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주 이러한 메시지는 오해의 대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정신과 은사의 사람이었으며,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을 경험한 훌륭한 지도자요, 열정과 비전의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나의 약함은 이제 나의 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 수록 우리의 능력에 자신감이 줄어들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만큼 더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만심은 성도의 삶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자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는 우리들의 힘으로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겸손은 매우 중요한 덕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적은 것을 드리면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많은 것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혜

저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어느 스코틀랜드 어부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주님, 바다는 광대하고 저의 배는 너무 작습니다.”

저는 당시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들이 얼마나 자주 이러한 기도를 떠올렸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필요는 광대하고 자신들의 자원은 너무 작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의 소금이, 언덕 위의 빛이, 그리고 밀가루 반죽의 누룩이 되게 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위대하고 엄청난 것으로 자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는 것은 신앙의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신비하고 은혜롭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필요조건입니다. 물론, 우리의 한계와 아픔을 신경증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우리를 통하여 들어오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우리에겐 한계가 있어. 우리는 죄와 자기기만에 빠질 수도 있어. 그러니 하나님, 도와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생명을 얻으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의 사역과 치유와 화해의 최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님의 식탁 주위에 모여서 교회는 언제나 빈 손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찢겨진 살과 흘린 피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성찬식 때마다, 우리의 손이 빈 손이 될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들어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척 행동하는 대신에, 우리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인간됨의 조건으로 보고, 그러한 자신을 자격미달이 아닌 하나님께 헌신된 예물로 보며, 또 자신과 타인을 위한 치유의 원천으로 보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열망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 여러분, 한국에서 헌신하신 호주 선교사들을 기리면서, 그분들이 보여주신 같은 관용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들은 엄격한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열망에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비우신 그런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고통과 기쁨, 소망과 두려움을 함께 하기 위하여 종으로 오신 그런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고 예수를 증거하며 희망과 용납과 환영을 전할 수 있는 기회들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과 그리고 교회사를 둘러볼 때에 부흥의 시간들은 자주 어떤 형태의 위기를 통해서 온 것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과 포로망명시대, 그리고 적어도 오늘날의 서양에서 우리는 그러한 시간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콘크리트에 생긴 갈라진 틈새를 통과할 수 있을까요? 그 틈새를 그저 제도적 해결책으로 땜질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약한 상처를 주님께 가져갈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자신이 믿는 기독교 메시지의 핵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셨으니.” 그리고 여기로부터 바울의 제자도 이해가 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케 하시는 일을 맡기셨도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화해의 사신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늘 오늘의 말씀 속의 제자들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만 보면서 그토록 미약한 자원을 통해서도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과합니다.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사역은 그 사역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미천한 야외 도시락이 대 잔치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합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이 무엇인가요? 한계가 있고 깨지기 쉬우며 보기에도 불충분합니까? 그러면 우리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미천한 것으로 놀라운 것을 만드는 기적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처음의 씨앗을 뿌렸고 교회와 학교와 기관들을 세웠던 선교사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도 미천한 것으로 놀라운 것을 이루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우리는 선한 능력과 치유의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선을 축하하고 악과 부정의를 거부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춥시다. 그리고 믿음과 용기와 상상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변화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무리 미약해도 그리스도에게 드려지고 또 그분이 축복하시면 풍성한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치유와 정의와 사랑의 도구로 사용하시도록 이제 기도합시다!☺

 
번역=박웅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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