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11월 4일 발표한 대국민 담화문에서 세간에 떠도는 소문 중에서 딱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반박했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와 연루됐다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은 “심지어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 드린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본지는 박 대통령 사이비 종교 연루의 배경이 되는 고 최태민 씨의 모습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 대통령의 사이비 종교 연루설이 과연 사실이 아닌지 살펴보고자 한다. 글은 고 탁명환 소장이 쓴 현대종교 1988년 4·5,·6월호를 기초로 하고 그 외에 언론에서 보도한 것을 참고했다. 특별한 출처가 표기되지 않은 글은 현대종교에서 보도한 내용이다. <편집자주>
정체·국적 불명 ‘나무자비 조화불’ 주문 외던 원자경 “나무자비 조화불, 나무자비 조화불, 나무자비 조화불...” 대전 ‘영세계칙사관’이란 간판이 달린 감나무집 방안에선 출처도 근본도 없는 주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1973년, 최태민 씨는 ‘원자경 칙사님’(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불리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 주문만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흥종교 연구가이자 한국교회의 원조 이단대처 사역자로 불리는 고 탁명환 소장(1937년~1994년)은 현대종교 1988년 4~6월호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최태민 씨의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원자경 칙사로 불리던 최태민 씨에게서 ‘목사’로 부를 만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세계칙사관에는 계룡산 주변의 신흥종교 교주들은 물론 무속 잡인들 기십 명만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병 고침은 물론 관상도 봐줬다고 한다. 대전일보 1973년 5월 13일자 영세계 칙사관 광고도 최태민 씨의 과거를 잘 보여준다. “불교에서의 깨침,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라고 써 있었다. 1973년 7월자 또다른 광고에는(맞춤법을 고치지 않음) “찾으시라! 그리고 들으시라! 대한민국은 세계주인국이 될 운세를 마지했다는 칙사님의 권능과 실증의 말씀을... 영세계 칙사관에서는 지난 5월 13일자 신문과 방송을 통해 그리고 당국의 집회 허가를 얻어 대한민국을 세계 주인국으로 정해 놓으신 조물주의 뜻을 칙사님께서 사명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 조물주로부터 소명을 받으신 칙사님께서 사명을 완수코저 이 고장에 오셔서 이미 이 땅 위에 보내신 그분의 성자와 선택된 수많은 인재를 찾아 모시고저 하는 일념에서 아래와 같이 안내하오니 어느 분이나 찾아오셔서 조금도 부담없이 상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자경은 이 광고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을 방에 앉히고 벽에 붙여 놓은 둥근 원을 보고 ‘나무자비 조화불’을 반복하라고 했다. 주문을 외우는 동안 눈은 벽에 붙인 원을 응시하도록 했다. 상담 대상자도 구체적으로 써놨다. ‘조물주의 역군으로서 인류를 위해 앞장 서실 분, 태몽을 받고 출생하거나 현몽을 받고 계신 분, 신이 들렸거나 쏠려 있는 분, 자신의 신상 문제나 종교 문제 등으로 상담하실 분’ 등. 당시 원자경을 취재했던 탁 소장은 “흔히 점을 치고 관상을 보는 무속인들의 광고와 유사하다”고 평했다. 특히 광고 문구에서 강조된 것은 ‘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몽· 현몽이 그것이다.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이하 영애)에게 접근할 때도 육영수 여사의 현몽을 빙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영세계 칙사를 자처하던 원자경과 소식이 두절됐다가 탁 소장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1974년이었다. 이화여대 앞 제과점에서 탁 소장을 만난 원자경은 “한민족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다”며 “나는 영세계 칙사관의 대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고 밝혔다.
영애 박근혜의 짚차 타고 나타난 대한구국십자군의 최태민 목사 다시 시간이 흘렀다. 1975년 5월 교계 신문에 일제히 ‘대한구국십자군’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 사진에는 대표 최태민 목사라는, 탁 소장이 예전에 듣도보도 못한 생소한 인물이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다.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 낯이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1973년과 1974년에 드문드문 만났던 영세계 칙사 원자경을 교계신문은 ‘최태민 목사’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탁 소장은 서울역 뒤편에 자리잡은 대한구국십자군 본부를 찾았다. 교계 부흥사인 박O원, 김O수, 강O희 목사 등이 대한구국십자군 본부에 있었다. 칸막이 건너에선 원자경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부러 탁 소장은 밖으로 다시 나가 십자군 본부로 전화를 했다. 비서를 통해 전화를 받은 최태민을 향해 탁 소장이 “원자경 씨! 오랜 만이오!”라며 인사를 건네자 그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니 소장님 아니오! 지금 좀 만납시다.” 신세계백화점 인근 다방에서 원자경을 만났다. 그 자리엔 예전 대전의 감나무 집에서 원을 그려 놓고 정체불명의 주문을 외우면 만사형통한다던 과거의 원자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자경은 위풍당당하고 야무지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최태민 목사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지금 박 대통령(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와 함께 일한다”며 “청와대를 출입한다”고 말했다. 최태민 씨가 타고온 짚차도 영애의 것이었다고 한다. 교계 신문에는 계속 구국십자군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탁 소장은 최태민 씨는 과거에 원자경 교주였다고 몇몇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중앙정보부 종교 담당 책임자였던 이O규 과장이 “몸조심하라!”는 경고성을 띈 협박을 남겼다. 신학도 제대로 하지 않은 최태민 씨에게서 일금 10만 원을 받고 목사 안수를 줬다는 예장 종합 총회의 조 모씨는 최태민 씨와 알력이 발생하자 구속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최태민 씨의 세도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다. 그의 구국십자군이 활동하는 곳에는 늘 영애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구국십자군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던 교계 재벌 B그룹의 K 장로는 세무사찰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목사들은 이권에 눈을 돌려, 박근혜 양의 주변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최태민 총재를 이용하기도 했다. 최태민 총재는 1975년 어느 날 탁 소장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이O일·이O선 목사와 함께 찾아온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 씨의 과거를 잘 아는 탁 소장은 이런 요구를 한다. △목사직을 사퇴하고 평신도로 돌아가라 △칙사론교리 주장을 중지하라 △평신도로서 교회에 출석하라 △통일교 관련 장O익 목사를 해임하라 등이었다. 게다가 “최 총재의 목사직은 온당치 못하다”며 “가짜 목사의 탈을 벗어라!”고 했다. 그러나 최 씨와 함께 왔던 두 명의 이 목사가 펄쩍 뛰며 “탁소장! 말조심 하시오. 지금 이분이 어떤 분이라구? 함부로 말이면 다하는 거요? 그런 식으로 하면 탁소장 신상에 좋지 않아요!” 탁 소장은 이 사건을 놓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고 기록한다. 진짜 목사가 가짜 목사를 비호하고 두둔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탁 소장은 구국선교단에 관계한 사람들의 목록을 나열한 뒤 “역사의 기록과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과 역사 앞에 권력의 시녀인 꼭두각시 놀음을 한 것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고 썼다. 최 씨가 영세계칙사관의 교주로서 할 일 없이 허송세월할 때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가 권력의 언저리로 들어가자 주변에는 아부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자경에서 최태민으로의 인생 역전 나무자비 조화불을 외던 원자경에서 구국선교단의 최태민 총재가 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낱 신흥종교의 교주로서 신도들의 병을 고쳐주고 어렵게 생활하던 최 씨가 일약 일국의 대통령의 딸과 연결이 된 건 고 육영수 여사의 죽음과 직결된 것이었다고 탁소장은 분석했다. 최태민 씨와 영애와의 만남에는 온갖 억측과 설이 구구하다고 설명한 탁 소장은 “가장 정확한 것은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근혜 양에게 최 씨가 위로의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한다.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가 문세광이 쏜 흉탄에 의해 서거한 후 청와대는 썰렁한 냉기가 감돌았다. 육 역사의 서거 후 안주인 노릇은 박근혜 영애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난데없는 장문의 편지가 근혜 양에게 발송됐다. 모친을 잃은 근혜 양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글이었다. 구구절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적인 입장의 글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최태민 씨는 근혜 양을 만나게 되었고 일설에는 최 씨가 육 여사를 근혜 양의 꿈에 만나게 해준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육 여사가 현몽하여 나타나 ‘내 딸 근혜가 우매하니, 당신이 근혜를 도와 주라고 해서 연락을 드렸다”고 한다. 이 문제와 관련 전기영 목사(최태민 씨가 소속했던 교단 총회장)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 씨가 (육영수 여사)현몽에 대한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데 이어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내가 육 여사의 표정과 음성으로 빙의했다’고 말했다”면서 “최태민이 내게 말하길 ‘육 여사 빙의’에 박근혜가 놀라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육 여사가 내 입을 빌려 딸에게 나(최태민)를 따르면 좋은 데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박근혜는 입신(入神ㆍ신들림)한 상태였다’”고 했다는 것이다(이정봉 기자, 중앙일보, 2016년 10월 31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20802223).
입신은 영혼이 육체를 떠난 듯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당시만 해도 최태민은 대전에서 불교·기독교·천도교를 혼합한 영세계 교리인 영혼 합일법을 주창하고 안찰 기도로 환자를 치유하는 행각을 했을 때였다. 원자경, 태자마마를 자칭하며 점방 수준의 점을 치고 있을 때였다고도 한다. 그 둘이 처음 만난 날은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렸다는 보고서에 정확히 기록했다. 1975년 3월 6일이라고 한다. 결국 영세계칙사관을 운영하며 태자마마, 원자경으로 불리던 60대의 사이비 교주와 만23세의 영애와의 첫 만남이 40년 후 대한민국을 전체를 엉망으로 뒤흔든 출발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 씨가 영애와 자주 만나며 심지어 청와대를 출입하자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씨가 최 씨의 거취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도 최태민 씨에 대해 조사하며 탁 소장에게 자료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탁소장은 <영세계의 칙사론>을 건네줬다. 이 글에는 최태민 씨가 바로 영세계의 칙사로서 한국에 파견된 대사와 같은 인물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애의 의견을 지지하는 편이 우세해 최태민 씨는 계속 득세했다. 탁 소장은 이런 현실에 대해 “고려말 괴승 신돈처럼 홀연히 나타난 최태민 총재... 대통령 영애 근혜 양을 업고 구국 선교단 구국 여성 봉사단을 운영하면서 돈을 물쓰듯 했다”고 기록한다. 인천에 사는 아들에게는 집도 사주고 돈도 풍족하게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손주들을 보면 과자값을 하라며 100만 원짜리 수표를 쥐어 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딸을 결혼 시켰을 때, 결혼식장은 그야말로 경제계 정부관리 등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구국은 구호였을 뿐이었다. “그(최태민 씨)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 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 부탁한다’고 하면 재벌들은 모두 꺼벅 죽는 시늉까지 했다.” 김재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구국선교단을 새마음 봉사단으로 개칭한 후 봉사단의 총재로 영애가 취임한다. 형식상 모든 업무는 영애가 관장했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 씨가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정계·경제계·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박근혜 라인, 사실상 비선 실세의 시초였던 셈이다. 권력과 직접 닿는 이 라인에 줄을 서고자 대한구국선교단은 회원수를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기업체마다 최태민에게 줄을 대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정말 엄청난 돈이 기부금으로 들어왔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재벌들부터 시작해 중소기업들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보세요. 대통령의 딸이 사회사업 좀 한다는데 누가 감히 거절하겠어요. 돈을 못 줘 안달이었죠.” 당시 구국봉사단의 핵심간부였던 K씨의 말이라고 한다(우먼센스 1993년 11월호, www.smlounge.co.kr/woman/ article/32313). 재벌급 회사는 물론 건설 관계 회사에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공사계약을 따내거나 납품 등을 알선하고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수법을 써서 축재를 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우먼센스 1993년 기사에 따르면 코미디언 심철호 씨는 당시에 새마음봉사대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최태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간부들은 최태민 씨를 대통령 모시듯 했다.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 최태민 씨의 권력을 빙자한 비행이 정보기관에 속속 접수됐으나 최 씨의 행각을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영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태민 씨를 처벌해 영애와 단절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태민 씨에 대한 각종 탄원이 청와대에 쏟아졌던 것이다. 최태민 씨의 부정행위와 사생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한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보고 고 박정희 대통령은 노여움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대통령의 딸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워 정계와 재계, 정부관료 등과 접촉해 인사, 승진, 공천, 공사수주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하고 입회비와 후원금을 빼돌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사자료에는 총 44건 3억 1,700만 원(현재 약 50억원)에 달하는 '최태민 비리사실'이 적시돼 있다.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의 비리 사실도 있다고 한다. 이런 비리 사실에 분개한 박정희 대통령은 세 가지를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연의 회고록에 의하면 △최태민 거세하라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 못하게 하라 △구국선교단 관련 단체는 해체하라. 이것을 그대로 실행했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목사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영애의 든든한 배후 지원을 받으면서도 개인 축재를 일삼던 최태민 씨를 비호하고 나선 건 다름 사람 아닌 영애였다고 한다. 그녀는 최태민 씨를 처벌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눈물로 최 씨의 결백을 호소했다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을 때도 최태민 씨는 합동수사부의 수사 대상이 된다. 전국 규모의 수사가 진행됐으나 이때도 최태민 씨를 문제를 삼을 수가 없었다. 돈 문제는 전부 영애가 아는 일이라고 잡아 떼고 책임을 떠다 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영애가 개입한 것으로 진술하니 수사진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자녀에 대한 예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탁 소장은 최태민 씨의 구국선교단 사건은 확실히 암흑기의 권력형 부조리와 야합한 우리 시대의 단막극이라고 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또한 탁소장은 권력의 장단에 놀아난 성직자들은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회개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교훈으로 삼고 넘어가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자신의 책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의 첫장에 “역사가 그러하듯 이단은 스스로 반복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써놨다. 이단만 반복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당하는 역사도 반복되고 있다. 최태민의 종교적 능력은 5녀인 최순실에게 전달됐다는 게 시사인 주진우 기자의 주장이다. 사이비 종교인이자 현몽·빙의 등 성경이 금하는 현상을 추구했던 사이비 교주 최태민 씨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은 최 씨의 딸인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로 이어졌고 결국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원시적이고 미개한 국가, 권력은 갖고 있으나 책임은 지지 않는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이 통하는 나라로 전락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2016년 11월 4일 기독교 보수층의 여론을 의식한 듯,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단·사이비는 결코 자신을 이단·사이비라고 하지 않는다. 이단·사이비에 빠진 사람 또한 스스로를 이단·사이비에 빠졌다고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35년 전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국을 받은 후 최태민 씨가 법적 처벌에 직면했을 때 이를 ‘영애의 눈물’로 막아냈다. 현 사태를 맞아 또 다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 예의 그 수법이 통했던 것처럼.〠 정윤석|크리스찬리뷰 한국 주재기자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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