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은 영국 해군 대령이 되어 태평양을 여러 차례 항해했고, 호주의 동해안을 방문했으며,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고, 뉴질랜드로 가는 해도를 제작했다. 그리고 항해하는 동안 일기를 써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 항해 일지를 남겼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괴혈병에 의한 사망자 없이 세계일주를 마친 기록도 남겼다. 그가 수집한 태평양 전 지역에 관련된 정보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시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대항해시대는 막을 내렸고, 더 많은 식민지를 얻기 위한 유럽인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임스 쿡은 1728년 10월 27일 영국의 미들즈브러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쿡과 어머니 그레이스(Grace)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는 11월 3일 세인트 커스버트(St Cuthbert) 마을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에서 감독자로 일을 했다. 그를 고용한 농장주가 제임스의 학비를 대주어 제임스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13세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장에서 일을 했고, 16세 때는 농장을 떠나 어촌 잡화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바다에 매료되었고, 배를 타고 항해하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영국 해안에서 석탄을 운반하는 선단에 일꾼으로 고용되었다. 그는 배를 타면서부터 항해에 필요한 항해술, 천문학, 측량술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쿡은 성공회 신자였다. 그의 아들 휴(Hugh)는 성공회 사역을 시작했지만 조기에 사망했다. 쿡은 좋은 사람이었으며 그는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았고 모든 면에서 온건했다.
배를 타기 시작한지 3년 후, 그는 발트해의 무역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항해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으로 일한 그는 승진의 기회를 얻었고, 1752년 드디어 항해사가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영국 해군에 입대해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해군에서 군생활을 할 때, 7년 전쟁이 발발했다.
1756년에 시작된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왕국에게 빼앗긴 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전쟁이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이 전쟁에 참여해 국제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특히 전선이 슐레지엔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열강들이 차지한 인도와 미국같은 식민지로 확전되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스웨덴과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영국과 연합한 프로이센과 싸웠다. 영국과 프랑스는 슐레지엔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대륙에서도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이 승리했고,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의 세력을 몰아냈다. 이 지역들을 영국이 확고히 장악하면서, 영국은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7년 전쟁에 참전한 제임스 쿡은 지리 조사와 해도 작성의 능력을 발휘해 1759년에 벌어진 퀘벡 포위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제임스는 전쟁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1767년에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섬과 해안의 지도를 완성했다. 그는 이 작업을 마치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은 열정을 더욱 불태웠다.
그의 열망은 곧 현실로 이뤄졌다. 영국 왕립 학회는 금성 관측을 위해 제임스 쿡을 해군 대위로 임명하고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Tahiti)로 파견했다. 평민 출신으로 대위가 된 그는 벅찬 가슴을 안고 1768년 영국을 출발해 무사히 목적지인 타히티에 도착했다. 그의 임무는 천문관측이었는데, 아쉽게도 천문 장비들이 부족해 정확히 금성을 관측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 항해의 다른 목적이 있었다 금성 관측은 핑계거리였고, 진짜 목적은 전설로 전해지는 남방 대륙을 탐험하는 것이었다. 영국 왕실과 정부는 전설로 전해지는 남방 대륙을 발견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먼저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뉴질랜드 탐험을 마친 그는 서쪽으로 항해했다. 아직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남방 대륙으로 향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타스마니아 쪽으로 나아갔지만, 태풍으로 인해 방향이 북쪽으로 변경되었다. 한참 동안 북쪽으로 항해한 그는 유럽인들로서는 최초로 호주 동부 연안에 도착했다.
그는 1770년 4월 19일에 처음 목격한 땅을 ‘힉스곶 (Point Hicks)’이라고 명명했다. 4월 23일에는 해안가에 있던 호주 원주민들을 보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 항해를 하였고, 4월 29일에 드디어 그는 승무원들과 보타니 베이(Botany Bay)에 상륙했다.
유럽인들을 처음 본 원주민 두 명이 그들의 상륙을 방해했고, 이에 대응해 선원들이 총을 쏴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선원들은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항해에 필요한 목재, 물 등을 보충했고 식물 표본을 수집하기도 했다.
일주일 후에 그들은 보타니 베이를 떠나 지금의 퀸즐랜드 쪽으로 북상했다. 6월 11일에 그들의 배인 엔데버(Endeavor)호가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배가 많이 파손되어 그들은 해변 가까운 곳에 배를 정박하고 7주 동안 배를 수리한 후 영국으로 돌아갔다. 제임스는 항해일기를 출판했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유명인이 되었다.
한편, 제임스는 엘리자베스 바츠 (Elizabeth Batts)와 1762년 에섹스의 교회에서 결혼했고, 그 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성공적으로 첫 번째 항해를 마치자, 영국 정부는 뉴질랜드와 호주를 탐험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제임스를 사령관(해군 중령)으로 진급시켰다. 이후 영국 정부의 명령을 받고 그는 남극 탐험을 떠났다. 1773년 1월 17일에 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남극권에 진입해 항해했다.
그는 남극 대륙을 탐험하고, 이 지역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곳임을 확인했다. 제임스에 의해 남극 대륙의 전설이 현실로 확인된 것이다. 남극을 탐험한 그는 타히티, 통가, 이스터섬,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를 방문했고, 뉴질랜드를 경유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두 번째 항해일지를 출판했다. 정부는 그가 편히 쉬기를 원했지만, 그는 항해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세 번째 항해를 준비했다.
세 번째 항해의 목적은 새로운 항로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제임스와 그의 선원들은 영국을 출발해 남쪽으로 내려가 아프리카를 돌아 호주 남쪽을 지나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미국 서부 지역과 캐나다 서부 지역 그리고 알래스카를 탐험했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베링 해협을 지나 북극해를 통해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바다의 빙산들과 추위가 그들의 길을 막았다. 그들은 다시 남태평양 방향으로 내려왔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에 상륙한 제임스는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정지수|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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