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회의 예배들을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찬양팀이 인도하는 찬양에 맞춰 각종 악기들이 동원되어 성도들의 감성을 터치(touch)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좋은 앰프 시설들을 설치하고 더 나은 악기들과 찬양팀을 구비하려고 많은 돈들을 지출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오히려 이런 찬양팀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교회가 구식인 듯 여겨지고 있다.
실제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드럼을 비롯한 전자기타 등 악기들과 시대에 맞는 찬양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제정한 은혜의 수단에는 안타깝게도 찬양은 들어가 있지 않다.
찬양을 통해 성도들의 눈물을 훔치거나 가슴을 적시는 등 사람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찬양은 교회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은 아닌 것이다.
교회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 : 말씀
은혜의 방편이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지정하신 수단을 가리킨다. 그중 첫 번째가 바로 말씀(롬 8:17, 고전 1:18)이다. 이 말씀은 성경 말씀과 성경적 설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교회 자체(church itself)와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주장한다. 무엇보다 교회가 은혜의 통로라고 주장하며 다른 은혜의 수단들은 교회에 종속된다. 그래서 더욱 교회 조직과 외형적인 구조에 치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월한 은혜의 수단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말씀의 담지자인 개신교 목사들은 이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준비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첫 번째 방편인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 목사들을 세우셨다. 교회 안에는 목사들이 해야 할 여러가지 사역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말씀 선포야말로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주신 가장 영예롭고 영광스러운 특권(privilege)임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청교도인 존 오웬(John Owen)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영광과 특권이 바로 복음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다. 목사는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복음의 비밀은 전하지 않고 예화들을 적당히 옷 입혀서 좋은 이야기로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설교되어야 하는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말씀의 사역에 힘쓰도록 부름받은 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설교해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설교해야 한다. 인간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써가 아니라 성령과 권능의 증명으로 분명하게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알려지도록 신실하게 설교해야 한다. 듣는 이의 필요와 능력에 맞추어 지혜롭게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영혼에 대 한 열렬한 사랑으로 열심히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그리고 그의 백성의 회개와 교육과 구원을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진지하게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은 독자적으로 혼자 역사하지는 않고 성령의 인격적인 감화와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말씀의 담지자인 목사가 먼저 성령의 감화 가운데 있어야 하고, 바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사는 무엇보다도 성경과 신학에 대해 부지런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 주에 많은 양의 설교를 혼자 감당하기보다는 한 번의 설교라도 치열한 고민 속에서 연구하고 많은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 : 성례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은혜의 필수 불가결한 방편이지만 주님께서는 말씀만이 교회에 은혜를 주시는 유일한 방편으로 삼지는 않으셨다. 두 번째 교회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은 성례이다.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다’(visible words). 여기서 성례는 성찬과 세례 의식을 의미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삶의 여정을 살기로 결정하고 교회로 들어가는 입회(initiation)를 나타내는 예식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평생 동안 지속되는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는 죄 씻음 (행 22:16)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골 2:11-12)과 중생(딛 3:5)을 상징하고,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공적인 고백(막 16: 15-16), 즉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교제 속에 들어왔다는 표징이요 인(롬 6:4)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고전 11:26)과 그의 속죄의 은혜 (마 26:28)를 상징하고 확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례는 유형적인(형태가 있는) 말씀으로 성찬과 세례,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 것을 자각하고 성례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에 비해서 성례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은 성례가 구원에 필요한 전부라고 가르치는데 비해 가톨릭은 성례가 죄인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신교는 성례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찬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다르다. 로마 가톨릭에게 있어서 성찬은 하나의 성례일 뿐 아니라 제사이다. 그들에게 성찬은 하나의 제사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제사의 피없는 갱신이다. 성찬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효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성례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절대적인 예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성례가 주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유익들이 성례라는 표징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적용되고 인쳐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은혜의 수단으로 완성적이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개신교는 말씀을 더 우위에 두고 있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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