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어령 박사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 한편으로 시작된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하나님/당신의 제단에 꽃 한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그러나 하나님/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좀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아 그리고 그것으로/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하나님.
지금껏 하나님을 위해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는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기억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만 이내 하나님의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고 고백한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꽃 한 송이 드린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내 가까이에 계신다는 표현이었다.
이제 막 믿음 생활을 시작한 시인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여전히 때묻은 손이었지만 그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마치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처럼.
그리고 그 감동의 순간을 아름다운 시로 써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가슴을 풍금처럼 울려주길 원했다. 시 한 줄, 그것이 평생을 글로 밥 먹고 살아온 시인이 뒤늦게나마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었다.
이어령 박사가 때묻은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을 때 어떤 감동을 느꼈을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하나님의 제단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고 여전히 때묻은 손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순간 그 옷자락을 타고 물 밀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다운 시 한 줄에 담아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을 풍금처럼 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분의 옷자락만 붙잡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물 밀듯이 밀려오는데,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수님과 한 몸이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나무이고 어디부터 가지인지 구분이 어렵다. 특히 포도나무는 얇은 넝쿨처럼 자라서 나무와 가지를 구별하기가 더더욱 쉽지 않다. 사실 우리는 나무와 가지, 전체를 가리켜 포도나무라고 하지 가지만 따로 구분해서 부르지 않는다.
그만큼 나무와 가지는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나무가 가지 안에 또 가지가 나무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 구분할 수 없는 한 몸이라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아무리 그 두께가 굵고 튼튼하고 우람한 가지라고 해도,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서 끊임없이 나무로부터 자양분을 빨아들여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무조건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 무조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에도 열매가 맺는다.
누구나 땀 흘리고 씨를 뿌리면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축복하신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한 이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딱 붙어 있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칠 때에도 그는 묵묵히 순종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120세 가까운 노인이었고, 이삭은 혈기 이제 곧 20대가 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이삭이 힘으로 하면 얼마든지 아버지를 밀치고 번제단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 딱 붙어 있었던 이삭
목숨이 달린 일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삭은 번제단 위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았기에 묵묵히 순종했던 것이다.
이삭은 아내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멀리 하란 땅에, 자기 집에서 무려 900km나 떨어진 그곳에서 자기의 친족 중에 아내를 구했다. 그 아내가 훗날 천만 인의 어머니가 되는 리브가였다. 이렇듯 이삭은 하나님께 철썩하고 붙어 있었다.
그 이삭이 농사를 지으면 어떻게 되었는가?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 30배, 60배를 건너뛰고 단숨에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 또 땅을 파면 어떻게 되었는가? 물이 솟아난다. 물이 귀한 고대근동 땅에서 그 어렵다는 우물이, 이삭은 땅을 파는 곳마다 터져 나왔다.
그 시대에는 우물이 있는 곳에 마을 하나가 생길 정도로 큰 재산이 우물이었고, 우물을 소유한 자가 그 마을 최고 부자였다. 그런데 이삭은 파는 곳마다 우물이 솟아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 붙어 있었던 이삭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결과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이삭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우리가 가지로 연결돼 있는 관계는 ‘사랑의 관계’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이 말씀은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최적의 표현이다. 주님이 우리와 한몸으로 연결 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보낸다. 그때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는 탯줄로 엄마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태아와 엄마는 한 몸이다. 태아가 엄마 안에, 엄마가 태아 안에 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는 열 달 동안 엄마가 어떻게 하는가? 탯줄을 통해 태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준다. 그 열 달 동안 엄마는 태아에게 좋지 않은 것은 일절 먹지 않는다. 흠연도 금하고 음주도 금한다. 심한 감기에 걸리고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는다. 태아에게 해가 될까봐. 탯줄을 통해서 오직 좋은 것만을 공급해 준다. 엄마의 몸에서 영양분이 빠져나가 손톱, 발톱이 마르고 머리카락이 푸석해져도 뱃속의 태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다.
그렇게 태아가 열달을 엄마와 붙어 있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세상에 나오면,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한 인생이 시작된다.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뱃속에 탯줄로 연결된 태아를 끔직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라” 이 말씀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과 같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이것은 우리의 셈범으로 헤아리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삼위일체 즉,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일체로 계신 완전한 한 몸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하다. 그 사랑만큼, 그렇게 완전한 사랑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순간부터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우리도 주님과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도 아프시고, 우리가 울면 예수님도 우시고, 우리가 기뻐하면 예수님도 기뻐하신다. 심지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조차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다.
이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엄마 뱃속의 태아가 탯줄에 연결되어 모든 것을 공급 받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을 받게 된다.
고 이어령 박사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에도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감동을 시 한 줄에 담아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을 풍금처럼 울리고 싶었는데, 주님의 옷자락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면 그 감동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 한 줄이 아니라 소설 한 권에 담아도 모자랄 것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자. 주님에게 딱 붙어 있자. 그때 풍금처럼 울리는 사랑의 감동과 하늘과 땅의 풍성한 열매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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