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 선교 135년을 맞아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탐색하는 여정에 나선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이하 경남성시화, 이사장 이종승 목사,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 일행 22명은 지난 3월 4일 한국을 떠나 6일(수)부터 멜번에 있는 스카츠교회(Scots' Church) 방문을 시작으로 9박 10일간의 공식 일정을 가졌다.<편집자>
스카츠교회 (Scots' Church)
한국 선교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Rev. Joseph Henry Davies, 한국명 덕배시)가 1889년 8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던 스카츠교회는 출타 중인 담임목사를 대신하여 사모(Mrs. Louise Campbell)와 부목사(Rev. Justin Ang), 사무장(Mr. Jonathan North) 등 3명이 경남성시화 일행을 맞았다.
경남성시화는 2009년 9월 29일 1차 방문에 이어 공식적으로 3번째 방문이다. 필자는 2차 방문인 2010년 3월 10일 스카츠교회에 도착하여 건물의 웅장함 못지않게 데이비스 선교사를 기리는 교회가 외경스럽게 비쳤는데 그 감동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안내를 맡은 사무장은 "우리 교회가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라며 일행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어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목사 안수를 받고 8월 28일 누이 메리와 함께 한국행 배(SS 치난호)를 타고 호주를 떠났다. 그는 서울에서 5개월에 걸쳐 한국어를 배우고 1890년 3월 14일 누이를 서울에 남겨둔 채 한국어 선생과 함께 도보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그가 3주간의 도보여행으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천연두에 감염되어 있었고, 그는 캐나다 출신 게일 선교사와 일본인 의사로부터 치료와 간호를 받았으나 다음날 4월 5일 오후 1시경 부활주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간략하게 소개했다.
사무장은 "그러나 데이비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결코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데이비스는 오직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었고, 이후 12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사무장은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누가 오늘날 수십만 명(경남·부산·울산 약 90만 명 추산)의 성도들이 있을 것이란 결과를 알 수 있었겠느냐"라며 "데이비스로 인해 이후에 호주의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의 열정을 갖게 된 것은 놀라운 결과였다.
또한 데이비스로 인해 오늘날 많은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계로 나가고 있는 것은 우리 호주에서 볼 때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일행은 “데이비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교회에 감사를 드린다'라는 내용을 담은 감사패를 전달하고, 지난해 경남성시화에서 발간한 ‘경남·부산·울산 기독교 뿌리 찾기 백서’를 전달했다.
이날 스카츠교회 음악감독인 합창단 지휘자 겸 오르가니스트인 더글러스 로렌스(Raymond Douglas Lawrence AM) 씨는 경남성시화 방문단을 위해 오르간 특별연주를 해주었다.
공식 일정을 마친 일행은 교회당 내부를 둘러보며, 교회 별관 건물(전 호주장로교 총회)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파송과 순직을 기록한 명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이 명판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순직하자 청년연합회가 그를 기리어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회관 벽면에 추모 명판을 설치했는데, 평소에는 아크릴관을 씌워 보존해 왔으나 경남성시화 일행의 방문을 위해 특별히 아크릴관을 잠시 철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락연합교회 (Toorak Uniting Church)
호주 선교 유적지 탐방 일정은 처음부터 데이비스 선교사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두 번째 방문지는 투락연합교회였다. 역사 기록관 파밀러 윌슨 여사(Mrs Pamela Wilson)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는 "우리 선조들의 사역을 기억해 주시고 찾아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했다. 그리고 교회 내력과 한국 선교사와의 관련 등을 소개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국 파송에 큰 영향을 끼친 당시 어윙 목사(Rev. John F. Ewing)를 소개하면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누이인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모교임도 강조했다.
어윙 목사는 당시 성 메리놀 교회의 담임이었던 매카트니(H.B. Macartney) 목사와 함께 호주의 젊은이들에게 연합 활동과 해외 선교사의 꿈을 갖도록 청년운동을 주도했고, 그 결실로 데이비스 선교사가 선교사로 파송 받는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당시 데이비스는 동생 누이와 함께 세인트 메리 교회(현 Oaktree Anglican Church: St Mary's)를 출석하고 있었으나, 세인트 메리 교회가 성공회 소속으로 정식 신학을 공부하지 않 으면 선교사로 파송할 수 없다고 하여 누이인 메리의 도움으로 어윙 목사를 만났고, 어윙 목사의 도움으로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6개월간의 단기 신학 과정을 공부했다.
데이비스는 일정 기간 교육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번으로 돌아와 멜번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사에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고, 빅토리아주 장로교단 설립 50주년 기념 총회인 1889년 8월 5일 장로교회의 모체교회라 할 수 있는 스카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받고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빅토리아주 장로교단의 목사가 된 데이비스는 일 년 전 창립된 청년연합회(YMFU, Young Men’s Sabbath Norning Fellowship Union)의 재정 지원으로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고, 그의 누이 메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기독교연합회(Sabbath Christian Union)의 지원으로 함께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윙 목사는 데이비스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4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후임으로 부임한 존 맥크레이 목사는 어윙 목사에 이어 한국 선교에 깊은 인연을 갖게 된다.
데이비스 죽음과 함께 그의 누이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하였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본으로 돌아옴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파송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는 데이비스가 시작한 ‘조선 선교’의 사역을 이어나가겠다는 젊은이들로 줄을 이었다. 1891년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제임스 맥케이(Rev. J. H. Mackay) 목사 부부와 여선교사인 멘지스 양(Miss B. Menzies), 페리 양(Miss J. Perry) 그리고퍼셋 양(Miss Fawcett) 등 제2진 선교사 5명을 한국으로 파송했다.
이때 여성 선교사가 많았던 이유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직 이후 호주교회 내에서 여전도회 연합회가 결성돼 선교에 적극 나섰고, 당시 한국은 유교문화 때문에 남성이 여성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호주교회는 일제가 선교사를 강제 추방한 1941년 전까지 선교사 78명(해방 전후 126명)을 파송하였다.
1910년에는 프레더릭 존 매크레이 목사(한국명 맹호은, Frederick J. L. Macrae)를 파송했다.
맹호은 선교사는 진주, 거창을 거쳐 1915년부터 마산에서 창신학교 교장으로 섬기면서 마산지부에서 활동했으며, 일제는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라는 강력한 저항으로 호주 선교사 전원 추방에 따라 1940년에 한국을 떠났다.
옥크트리 세인트 메리 교회 Oaktree Anglican Church: St Mary's
점심 후 오후 첫 방문지는 옥크트리교회로 데이비스 선교사와 누이 사라 선교사(인도)의 모교회이다. 데이비스가 세운 코필드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가 교회 인근에 있는 것으로 짐작하여 아마도 누이 메리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이 이 교회에 출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우리 방문에는 담임목사인 마크 주어스(Rev. Mark Juers)가 직접 맞아 주었다. 주어스 목사는 "데이비스 선교사를 추모하고 우리 교회를 방문해 준 데 감사를 전한다."라며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주어스 목사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라며 "영적 성숙이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라는 말로 옥크트리교회와 경남성시화의 귀중한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교회당 벽면에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파송과 행적을 기록한 기념판이 부착되어 있고 주어스 목사는 "우리는 이 기록을 지금도 소중하게 여긴다"라며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는 교회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이 교회에 감사패와 백서, 선물을 전달했다.
코필드 그라마 스쿨 Caulfield Grammar School
옥크트리교회를 떠나 5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세운 코필드 그라마 스쿨(Caulfield Grammar School)이었다. 지금은 호주 5대 명문 사립학교로 알려진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대형 학교로 갈수록 확장되면서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하는 시설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세 명의 학교 관계자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교내 교회당으로 안내받은 경남성시화 일행은 학교 소개와 데이비스 일대기 영상 소개가 시작되었다. 첼시 영(Ms Chelsie Yeun, Head of Barnett) 선생은 브리핑을 통해 "1881년 남학생으로 구성된 전교생 36명을 시작으로 개교했으나, 지금은 전교생 3천570명의 학생, 1천 명의 풀타임 및 임시직원, 250명 이상의 스포츠 코치로 구성된 멀티 캠퍼스 학교로 성장했다"라고 소개했다.
브리핑 중간에 조세핀 퀸란(Rev. Josephine Quinlan) 교목이 한국계 학생 임진 군을 데리고 와서 소개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일부러 불러온 듯했다. 이 학교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학생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교목은 학생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교회 유리창에 붙여진 아크릴 그림을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회의 한쪽은 대형 유리창 4개로 지어졌고, 이곳에는 성경 속의 상징적 그림이 형형색색 아크릴로 구성되어 햇볕에 반사된 모습이 신비스러웠다.
계속된 데이비스에 관한 소개가 영상과 함께 이어졌다. 소개된 영상에는 성시화 운동본부가 조성한 ‘호주 선교사 묘원’의 데이비스 묘비석 사진도 있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감사패와 백서를 선물했다. 필자가 백서를 전달하면서 학교가 소개한 영상 속의 사진들을 백서에서 찾아 알려 주었더니 매우 놀라워하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백서는 데이비스에서 시작해 데이비스로 끝나게 구성되어 있다"라고 필자가 3권의 백서를 소개하자, 참석한 학교 관계자들은 "데이비스에 관해 이렇게 모아놓은 자료는 처음 본다"라며 백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이들이 우리 일행에게 베푼 호의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어서 우리를 학교 박물관으로 안내했고,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에서 받은 비자와 여권 원본을 꺼내어 공개하며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데이비스 선교사의 가족 일기와 데이비스 선교사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기록한 개인 일기장 원본도 공개했다.
2009년 9월 방문단에게는 여권과 비자만 보여주었고, 2010년 2차 방문 때는 아예 학교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자료들은 평소 유리관 속에 넣어 보관하면서 아무나 공개하지 않고 방문자에 공개하더라도 진열품 그대로 보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날 학교 소개에는 학교 기록관인 주디스 깁슨(Judith Gibson, School Archivist)이 끝까지 배석했고, 이들은 학교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는 우리 일행을 배웅하는 친절도 베풀었다. 감사패와 백서 선물을 통하여 학교 측의 친절한 환대를 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딥딘연합교회 Deepdene Uniting Church
첫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딥딘교회(DeepdeneUniting Church)였다. 오늘 모든 일정의 통역을 맡았던 강기원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다.
딥딘교회는 ‘페이튼 기념교회’(Paton Memorial Church)이다. 딥딘교회에는 최초 호주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가족과 '맥켄지 선교사' 가족이 다녔다.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38년에 멜본으로 돌아와 가족들이 딥딘교회에 출석했다.
딥딘교회의 교인이었던 ‘헬렌과 캐더린’이 1952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딥딘교회는 그녀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로 물질로 후원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남선교의 중흥을 이룬 전진운동(Forward Movement, 1910~1924)의 주역인 해외 선교부(FMC) 총무 프랭크 페이튼 목사(Rev Frank H L Paton)가 시무한 교회다.
페이튼 목사는 1910년 총무를 맡고,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진정책(Forward Policyd)을 수립했다. 그리고 선교사 파송과 지원을 체계적으로 이뤄냈다. 통영과 거창에 선교지부가 설치되었고, 지금은 없지만 진주에 경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인 페이튼의 이름을 딴 배돈병원(Paton Memorial Hospital)이 세워졌다.
평양신학교에 왕길지 목사(Rev. Gelson Engel)를 파송하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매클라렌(Dr. Charles t. McLaren, 한국명 마라연) 의사를 교수로 파송하기도 했다. 페이튼 목사가 맡은 15년 동안 41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딘딘교회는 페이튼 목사의 성과를 높이 사서 이 교회를 ‘프랭크 페이튼 교회'라고 명했다.
강 목사는 "페이튼 목사의 한국 선교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한국인과 현지인이 함께 예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그 전통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반반씩 나누어 설교를 하며, 매달 1, 2주는 한국어 설교(영어 자막 처리), 2, 4주는 영어 설교(한국어 자막 처리)로 나누어 진행되는 전통을 100년이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때 찬송가는 각자의 언어로 부른다고 한다.
딘딘교회는 지금도 인도와 동남아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며 해외 선교의 전통을 계속하고 있다. 이 전통은 한국 선교에 열정적이었던 페이튼 목사의 영향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현지인들조차 이 전통에 익숙해 있다고 소개했다.
딥딘교회는 또한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기도 했다. 이들은 해방 전에 귀국하여 매혜란은 의학을, 매혜영은 간호학을 전공하였고, 해방 후 아버지 맥켄지 선교사의 뒤를 이어 한국에 파송됐으나,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중국을 거쳐 1952년도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 후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개원하여 한국의 산모와 영아를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다.
둘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헌신했으며 은퇴한 후 호주에서 여생을 보냈으나, 생전에 경남을 사랑한 그녀들의 마음을 기리고자, 경남성시화가 2019년 경남선교 130주년 기념일에 호주 선교사 묘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특히 2010년 3월에 있었던 매혜란 선교사의 장례 안장식에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임원진이 경남·부산·울산 교회들을 대표하여 참석하기도 했다.
딥딘교회 정문 앞에 서 있는 입갑판을 보면 ‘페이튼 기념 연합교회’라고 써 있다. 또한 1941년 2월 22년에 건립된 교회 건물 머릿돌에는 ‘페이튼 기념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블 맥켄지 목사'에 의하여 건축됨" (Frank Paton Memorial Church to the Goly of God / This Stone was laid by the right Rev. J. Noble Mackenzie Moderator, General Assembly of Victoria) 이라고 새겨져 있다.
딥딘교회는 '호주 최초의 선교사'인 데이비스 가족의 ‘개척 정신’, '한센인의 친구'인 맥켄지 가족의 ‘희생 정신’ 그리고 ‘한국 선교의 기획자’인 프랭크 페이튼 목사의 ‘선교 정신’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유서 깊은 교회이다. 한국선교의 산실과 같은 교회에 한국인이 담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딥딘교회에 백서와 선물을 전달하고 지금의 아름다운 교회 전통을 영원히 이어가길 소망했다.〠
성재효|경남·부산·울산 기독교 뿌리 찾기 백서 편집인, 창원섬김의교회 장로, 사회복지법인 실버덴 대표이사 권순형|본지 발행인 박태연| 본지 사진기자(멜번)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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