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시작, 수메르 문명과 성서 VII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9/20 [12:31]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중인 우르남무 법전     

 

고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 수메르의 우르- 남무법전이 수메르 학자인 사무엘 크레이머에 의해 1952년 해독된 후, 당시의 수메르인들의 문명과 생활양식 그리고 그들의 사회제도등을 파악하게 되었다. BC 2100년전 우르남무 수메르왕이 반포한 인류최초의 법전 우르남무법전의 몇 구절을 소개한다.

  

“그 후 강력한 전사 우르남무는 우르, 수메르, 아카드의 왕으로 도시의 주인 난나의 힘으로 진실로 우투의 말에 따라, 나라에 평등을 성취하였다. 

  

그는 악덕과 폭력 그리고 헐벗음을 근절하였고, 사원의 월간 비용을 보리 90구르,양 30마리 그리고 버터 30실라로 설정하였다. 그는 청동 실라 단위를 유행시켰고 1미나의 무게를 표준화하였으며 1미나와 관련 은의 세겔의 돌무게를 표준화하였다....”

  ·살인을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강도 짓을 한 자는 죽임을 당한다.

  ·유괴를 한 자는 감옥에 가두고 15세겔의 은을 내야한다.

  ·남자가 그의 첫 아내와 이혼하면 1미나의 은을 지불해야 한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수메르인들이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혼에 대한 규정 즉, 사회제도 (민법)들을 가지고 있으며, 악인들을 판결하는 형법제도도 마련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 다. 

  

위의 법률은 350년 후인 BC1750년경 제정된 구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해보복법으로 유명한데 이미 수메르의 우르남무 법전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메르인들의 종교와 신들은 주위 민족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름만 바꾸었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등은 후대의 제국들에게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대인들의 종교에도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전의 원형인 지구라트 모양은 앗시리아, 바벨론 제국의 지구라트와 신전들의 형태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천문학이나 12진법, 60진법 등은 모두 수메르문명으로부터 전래된 것들이다. 

 

수메르 문명과 성서

 

성서학자들이 동의하듯이 구약성서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BC 587년을 전후로 한 시점이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은 남유다마저 신 바벨로니아에게 BC 587년 멸망 당한 후 예루살렘 성전은 훼파되고, 많은 포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 바벨론 땅에 살면서 유대민족의 운명을 슬피 울며, 자기성찰의 결과로 삼은 결과였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역사를 재서술하고 율법을 재구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유대인들은 이국의 땅에서 회당을 짓고 그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승과 이야기들을 모아 자손들을 교육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이것이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승들이 토라, 느비딤, 케투빔 등 구약성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이에 비해 수메르 문명은 무려 2천 년 이상이나 앞서서 성서의 모태가 되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알파크루시스대학 교수(Ph.D)

▲ 주경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