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뛰겠습니다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4/10/28 [14:13]

▲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모의 병 간호와 사모 없는 목회가 힘에 부쳐 31년간의 목회를 마감하고 조기 은퇴한 장경순 목사.©크리스찬리뷰     

 

이민목회

 

내가 목사다

여름이 왔다는데 / 여름이 왔다는데

나는 여전히 겨울 양복을 / 찾아 입는다.

 

오래된 내 마음이 / 칙칙한 넥타이로 손이 간다

자옥한 와이셔츠 땟자국이 / 나를 눈물짖게 하는구나

 

갈아 신을 구두 하나 없는 / 이민목회

내가 목사다

차에서 킥킥 소리난 지가 / 언제지도 잊어버리고

그저 달려주는 신통함에 / 위로를 삼는다

 

주일 지난 밤이면 / 혼자 열병을 앓듯이

몸부림치다 /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부시시한 아침을 맞는다

 

성경책은 왜 이리 무거운 거야 / 어느 목사는 가볍다는데...

찌그러진 구두에 못이 올라왔나 / 왜 이리 발바닥이 아픈거야...

김치 국물 묻은 넥타이를 / 쓱쓱 비비며

시험 든 성도 집 앞에서 / 긴 한숨을 쉬어 본다

...뭐라 말해야 하나

 

이민 목회..

내가 목사다.

 

시인 목사가 은퇴하다

 

장경순 목사가 지난 8월 25일 시드니작은자교회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시드니에서의 31년간의 목회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는 121불로 1993년 1월 파라마타 타운홀을 빌려 개척을 시작했다.

  

121불은 그가 시드니영락교회에서 디모데선교회 사역을 마치는 마지막 예배시간에 나온 헌금 액수였다. 1989년 젊은 부부 두 가정으로 시작한 디모데선교회 모임은 1992년 12월 그가 사임할 때 60명으로 성장한 큰 그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겁도 없이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전도사였지만 개척을 시작했다. 사실 그가 호주에 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지만 우연 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신문 광고를 보는데 호주 다문화 사역자 모집 광고가 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군대도 다녀왔고 이화여대 다락방 노래선교단 간사의 경력도 있던 터라 호주 다문화사역이 무엇을 하는 사역인 줄도 모르고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을 해버린 것이다.

  

그때 영주권이 뭔지도 모르고 영주권을 받고 1987년 시드니로 왔다. 당시 시드니영락교회는 호주장로교회 소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드니영락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드니영락교회를 사임한 후 1993년 1월부터 시드니산돌장로교회(후에 시드니작은자교회로 개명)에서 31년간 담임목회를 하고 지난 8월 25일 은퇴식을 가졌다.

  

▲ 시드니작은자교회를 은퇴한 장경순 목사와 후임자 전진우 목사.©크리스찬리뷰     

 

▲ 원로목사 추대식을 마친 후 가족들과 함께한 장경순 목사.©크리스찬리뷰     

 

그의 31년간의 이민목회 여정은 앞에 있는 「이민목회」 시를 통해 가슴으로 읽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이민목회가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집을 두 권이나 펴냈다(시드니의 하얀아침2001, 고래사냥 2018). 기자도 그의 시집 <고래사냥>을 선물로 받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노라면 그는 고단하지만 낭만과 멋을 아는 목회자인 것을 알 수 있다.

 

파라처치 운동이 체질인 목사

 

그의 목회 경력은 다양하다. 호주에 오기 전에는 이화여대 다락방 노래선교단 간사로 섬겼다. 그리고 호주에 와서는 시드니영락교회에서 디모데선교회를 창립하고 젊은 부부들의 신앙훈련을 이끌었다. 1993년 시드니산돌교회를 개척한 후에 그는 한인교회 최초로 빌라우드 수용소 사역과 난민 지원사역을 감당했다.

  

“제가 시드니영락교회에서 사역할 때 보니까 신앙도 좋고 개인적으로 똑똑하고 괜찮은 분들인데 비자 문제가 해결이 안된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 장경순 목사의 예수마을 사역은 기독교세계관, 2세사역, 이단대책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철학을 가지고 이민자들의 삶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해 왔다.©크리스찬리뷰     

 

그래서 그때 제가 개척을 하면 빌라우드 이민 수용소(Villawood Immigration Detention Centre ) 사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개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개척한 교회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지만 빌라우드 수용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무턱대고 빌라우드 수용소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이발하다가 붙들려 왔다. 어떤 분은 타일 일하다가 붙들려 왔다. 사정이 모두들 딱하시더라고요.

  

그분들 이야기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복음전하고 심지어는 그분들 은행일 볼 수 있도록 보증을 서주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이 잠시 나와서 은행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가 보증을 서주기도 했습니다.”

  

▲ 한국전쟁 참전국 기념사업회의 호주 지부장을 맡고 있는 장경순 목사는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호주군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아 뵙고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그는 빌라우드 수용소 사역을 통해 불법 체류 한인 이민자들을 도왔다. 그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 가운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교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어느 날 캄보디아 난민을 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없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느 날 빌라우드 수용소에 갔는데 캄보디아 난민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분이 저에게 와서 치아가 하나도 없어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거에요. 그런데 수용소에서는 파나돌만 준다는 겁니다. 저는 그때 그분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이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오상원 원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이민국 관리직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이민국에서 놀랍게도 97명 모두를 치료해 주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민국에서 97명에게 치과 치료 지원을 해준 금액은 90만 불에 상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후기 세속사회(post christendom)를 살고 있는 이민자 성도들의 신앙관, 교회관 정립을 위해 바른 기독교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2005년 ‘예수마을 강연’사역을 시작했다. 넉넉치 않은 교회 예산이었지만 그는 한인동포사회와 이민교회를 위해 기독교세계관, 2세사역, 이민목회, 이단대책 세미나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며 이민자들의 삶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해 왔다.

  

예수마을 강연은 기독교세계관, 2세사역, 이단대책사역의 세 가지 중요한 철학을 가지고 40회 이상 지속해 왔다. 그가 비록 은퇴했지만 지금도 계속하고 싶은 사역이 바로 예수마을 강연 사역이다. 그는 지금도 예수마을 촌장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단대책 사역은 더욱 확대된다.

  

2013년 그가 시드니교역자협의회 회장을 할 때 이단대책 세미나를 시드니를 넘어 호주전국으로 확장했다. 지금도 크리스찬리뷰 권순형 발행인과 함께 호주 전국투어를 하며 호주한인이민교회에 큰 공헌을 해오고 있다.

 

한인 사회를 위해 뛰겠습니다

 

그는 지금 카슬브룩 추모공원의 한인상담 매니저로 일한다. 그가 한인 추모공원 사역을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 사모의 장례를 돕던 중 카슬브룩 추모공원 회사로부터 한인들을 위한 상담사로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제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사모님의 장례비가 마련되고 장례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추모공원에서 저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온거예요. 그때 제가 목회하랴, 신학교 강의 나가랴, 많이 바쁠 때였거든요.

  

그래서 몇몇 원로 목사님들께 의논을 드렸더니‘장 목사가 이 일을 통해 한인 크리스찬 공원묘지를 조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40여 년이 넘은 한인 공동체였지만 변변한 공원묘지 하나 조성해 놓지 못함으로 인해 1세대 부모님들을 이곳저곳으로 존재감 없이 모시게 되었던 것이 현실일 때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회사측으로부터 제안을 받게 되었고, 한인 크리스찬 공원묘지를 조성해 달라는 여러 차례 제안 끝에 우리 한국인 문화에 꼭 맞는 자리를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은퇴 후 사진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장경순 목사 ©크리스찬리뷰     

 

그는 이 사역을 통해 카슬브룩 추모공원 안에 한인 동포들만을 위한 ‘평화의 동산’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앞으로 한인추모공원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은퇴를 5년 정도 앞당겨 했다. 그것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모의 병 간호와 사모 없는 목회가 힘에 부친 이유이다. 은퇴 후 그는 한국전쟁 참전국 기념사업회(UNPK)의 호주 지부장으로 호주군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족과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호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호주군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찾아 뵙고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그는 몇 해 전부터 취미 생활로 시작한 목회자 사진 클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최근에는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으로 가입하고 사진 작품활동에도 박차를 기할 계획이다.

  

이제 시인 목사가 31년간의 목회사역을 마감하고 새로운 사역을 향해 나아간다. 그를 응원하고 싶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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