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한인연합교회(담임목사 조삼열)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서울장로성가단을 초청하여 지난 10월 27일, 채스우드 콩코스 홀(The Concourse)에서 선교음악제를 개최했다. 선교음악제 수익금은 말레이시아 쿠칭에 있는 신학교와 아프리카 교회 건축 및 태양광 전기 설치하는 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이날 선교음악제의 무대는 그야말로 '영적 울림'과 '찬양의 축제'로 채워졌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장로성가단의 수준 높은 합창과 함께 지휘자 김성균 장로의 섬세한 지휘였다.
그의 깊이 있는 음악적 해석과 차분한 리더십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동시에 선사했다. 그는 주옥 같은 성가곡인 ‘주님’, ‘복있는 사람들’ ‘수난곡 십자가’등 명곡을 작곡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이날 마지막 합창은 시드니한인연합교회 할렐루야 찬양대와 서울장로성가단이 연합하여 ‘복 있는 사람들’을 합창함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공연 직후 김성균 장로를 만나 그가 지휘자로서 걸어온 길과 서울장로성가단 지휘자, 그리고 동요작가이자 한국유아교육음악의 선구자인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음악과 신앙 속에서 성장하다
김성균 지휘자는 어릴 적부터 교회와 음악 안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기장(기독교장로회) 교단 목사였던 아버지와 유치원 원장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일찍이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었고, 가정 안에서도 음악과 교육의 중요성을 배워왔다.
어릴 적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인연을 맺은 김 지휘자는 교회 반주를 맡으며 음악의 깊은 세계로 빠져들었다.
“음악을 좋아하다가 보니까 6학년 때부터 교회 반주를 하기 시작했어요. 피아노를 어릴 때 배웠어요. 그러다 보니까 예배 반주를 많이 했죠. 주일학교 반주, 중·고등학교 반주, 그때는 주일학교가 오전 9시에 예배를 드리고 끝나면 중·고등부가 10시에 예배가 있고 그리고 11시가 되면 대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그 세 개의 반주를 다 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없어졌지만 오후 5시가 되면 다시 또 어린이 예배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 또 오후 7시에 어른들 저녁 예배가 있고. 또 저희 아버님은 부랑아들, 노숙자들 그런 분들이 장년들 예배에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못 오니까 그분들만 모아서 오후 9시에 따로 예배를 드렸어요.
그 예배가 끝나야 제 반주가 끝났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배 반주를 대학 3학년 때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 반주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쭉 하다 보니까 음악의 세계를 배우게 된 거죠.
사실 음악의 세계는 찬송가를 충실하게 피아노를 치다 보니까 찬송가 안에 있는 음악세계를 머리에 꿰게 되고 찬송가가 명곡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음악의 거의 한 70-80%는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교회 반주를 통하여 음악을 배웠다. 그것도 찬송가를 통하여 깊이 있고 영혼의 울림이 있는 음악세계를 일찍이 경험했다. 이것이 평생 그의 음악 인생을 걸어온 자양분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의 아내 역시 음악인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그의 아내 양한나 씨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 수석으로 활동했었다. 그의 딸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음악인의 길을 걷고 있다.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한 딸은 엄마를 따라 가야금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가야금 연주자로서 한층 더 깊이 있는 연주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KBS 합창단 지휘자가 되다
김성균 지휘자가 KBS 합창단에 입단한 것은 1972년 막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그때 대한민국은 흑백 텔레비전이 대중화되던 시기였다.
기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흥분된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때 텔레비전에도 나오셨겠네요?” “아마 여러 번 나왔을 겁니다.”
당시 KBS 합창단의 지휘자 자리는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뽑히는 자리였다. 김 지휘자는 “거의 6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합창단 지휘자로 뽑혔다”라고 회상한다.
“당시 지휘자 한사람 뽑는데 거의 600대 1 가까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때 6개월 동안 심사를 했어요. 여러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음악을 녹음해보고 모니터링하고, 그 방송이라는 것이 그냥 있는 악보를 연주하는 것보다 악보를 빨리 방송에 맞게 편곡해서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작곡하는 사람이 유리한 면은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한국의 대학에 지휘과는 없었어요. 그래서 성악을 전공한 사람,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 기악을 전공한 사람, 저처럼 작곡을 전공한 사람 등 다양한 음악인들이 지원했습니다. 작곡을 전공했기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에 맞춰 신속히 편곡하고 녹음하는 작업을 하면서 저만의 지휘 실력을 자연스럽게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KBS 합창단 지휘자에서 국가사절단 지휘자로
그는 KBS 합창단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합창단을 이끌고 해외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당연히 한국에서 만든 제품들이 해외에서 저평가 받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홍보가 잘 안되어 있어서 해외에서 보면 아주 완전히 저개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가가 수출을 해야 먹고 살 때인데 수출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와이셔츠를 미국에서 오더 받아오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때입니다. 그런데 오더를 받으면 미국에서 그림만 그려주고 와이셔츠를 우리가 옷감도 준비하고 재단해서 와이셔츠를 만들면 미국에서 5천 원에 가져가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 가서 15만 원에 파는 거예요. 그 당시에 이걸 보고 우리가 만들었는데 우리한테 5천 원에 사가서 이 사람들은 15만 원에 파네, 이게 굉장히 속상했던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가 한 번 이걸 만들어 보자. 그래서 그것보다 더 좋은 원단으로 비슷한 와이셔츠를 만들어서 5천 원에 만든 것을 만 원에 내놓아 보자. 미국사람들은 15만 원에 파는데 만 원에 내놓으면 그럼 이건 팔릴 거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장도 안팔리는 겁니다.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는데 모두 반품되어 돌아오는 겁니다. 세일을 해도 안팔리고 모두 다시 돌아와요. 엄청난 부담이 됐죠. 왜 이러냐 이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냐? 브랜드 파워 때문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우리 나라의 이미지가 아주 저개발국가의 이미지여서 그 나라에서 만든 와이셔츠를 어떻게 입느냐 이렇게 되었던 겁니다. 여자들이 저개발국 속옷을 어떻게 입느냐? 그 넥타이는 못 맨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 이제 그러면 브랜드를 키워야겠다. 그런 생각에서 국가 이미지를 높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이에 첫 번째가 문화적인 것을 높여서 접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가 사절단을 만든 거죠. 저는 KBS에 있었는데 제가 오디션을 당하는 줄도 몰랐어요. 저는 열심히 합창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부 사람들이 와서 합창단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국가 사절단을 만들어 국위를 선양해야겠다.
그리고 저보고 합창 지휘를 해서 국가사절단을 이끌고 나가서 국위를 선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가게 된 것입니다.”
해외 순회 공연의 시작
김성균 지휘자는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국위 선양을 위해 여러 차례 해외 순회 공연을 이끌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 하나로 문화와 예술을 통해 국가의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문화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문화사절단이 구상되었던 것이다.
김 지휘자는 그중 중요한 역할을 맡아 1975년 광복 30주년을 맞아 합창단을 이끌고 세계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그는 각 합창단 중 A클래스를 모아 최상의 합창팀을 꾸렸고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사절단은 국제적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중 하나가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열린 축하 공연이다. 김 지휘자는 당시 “합창으로 한국의 예술적 수준과 독창성을 전 세계에 알리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했다”고 회상한다. 이 축하 사절단의 합창 공연은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해외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시대의 상징적 도시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에서의 공연은 김성균 지휘자와 국가 사절단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는 당시 궁전극장에서 한국의 합창단을 이끌며 "우리나라의 예술적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당시의 감동을 떠올린다.
이 공연은 단순히 음악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음악이 국경을 넘어 공산 국가와도 문화적 교류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의 유산 : 유아 음악 교육의 사명
그는 한국의 유아 음악교육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가 작곡한 동요와 유아음악은 4백 곡이 넘는다. 김성균 장로가 유아 음악 교육에 깊이 헌신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
유치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유아 교육에 헌신했던 어머니는 김 지휘자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선진국의 유아 교육 현장을 관찰해 한국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살펴봐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막상 해외에 나가면 다른 곳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59세의 이른 나이로 돌아가시게 된다. 가까스로 어머니의 임종을 목도한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결심을 했다. 그 후 그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해외에 나가면 유치원부터 둘러보았다.
“유치원 원장이었던 어머니는 제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네가 보고싶은 것만 보지 말고 유치원 한 군데라도 둘러보라’고 당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유치원에 가볼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다음에는 꼭 유치원 사진이라도 찍어오라’고 말씀하셨어요.”
1978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의 소원을 끝내 들어드리지 못한 게 그의 마음에 걸렸다. 이후 그는 해외에 갈 때마다 유치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선진국의 음악교육이 그의 관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아 음악이 전무했던 한국은 음악교육이 어른 중심의 노래와 교수법이 주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교육도 음악감상 위주인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선진국 아이들이 재미있게 음악을 접하는 것이 부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우선 전국의 각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노래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국 1백20여 곳 유치원에서 1년 동안 가르치는 노래들을 모아 분석한 결과 겨우 10% 정도만이 유아기에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어든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김 장로는 유아들이 음악을 통해 창의력과 인지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연구에 몰두하며, 유아를 위한 음악을 4백~5백 곡 이상 작곡했다. 유아기의 음악 교육이 아이들의 정서 발달과 정신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강조하는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경험은 아이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정서적, 예술적 자산이 됩니다"라며 유아음악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 유아 음악 교육계에서 큰 인정을 받았고, 숭의여자대학 유아교육과와 협력하여 유아교육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자비로 ‘김성균 음악교육연구소’를 세워 지금까지 유아음악을 포함 대한민국의 음악교육에 헌신해 오고 있다. 무려 40년이나 되었다.
합창의 힘과 대중과의 소통
그는 일반 대중을 위한 합창 활동에도 각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합창이 음악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예술 활동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김 장로가 이끄는 서울장로성가단은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문화와 신앙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합창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함께 노래하는 경험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한다”며 합창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서울장로성가단에 갖고 있는 애정은 대단하다. 처음에는 임시 지휘자로 참여했으나 장로 성가대원들과의 신앙적 공감대와 화합을 통해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서울장로성가단 지휘자로 섬긴 햇수가 벌써 14년이나 되었다.
"서울장로성가단은 음악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는 특별한 합창단입니다. 성가대원 장로님 한 분 한 분들의 신앙심과 열정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신앙을 기반으로 한 음악을 통해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만들어가는 화음은 그에게 큰 기쁨이자 사명감을 주고 있다.
이날 지휘자 김성균 장로의 인터뷰 초반에 서울장로성가단 단장과 부단장이 잠시 함께 참석하여 사진을 함께 찍었다. 서울장로성가단 단장인 김기돈 장로는 81세이다. 70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실제 나이를 물어본 기자는 깜짝 놀랐다.
김기돈 단장은 실제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인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 찬양을 좋아하고 노래를 부르면 된다고 응수한다. 부단장인 김복수 장로도 73세이지만 훨씬 젊어 보인다. 두 분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정겹다.
서울장로성가단은 이번 선교음악제에서 시드니 교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그의 신앙과 열정이 음악을 통해 전달되었고, 시드니의 많은 한인들이 그의 지휘 아래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했다.
김 장로의 헌신적인 음악 여정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빛을 전하는 역할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음악은 사람을 치유하고, 사회를 밝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유아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가 음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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