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김신일 기자가 캄보디아 ‘밥퍼’를 취재하면서 무릎을 꿇고 아이들에게 식판을 전달하는 섬김의 모습이 크리스찬리뷰 8월 호 표지에 실리면서 화제가 됐었다.
그는 이날 “서로 고개를 조아리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어꾼 쁘레아 예수’(예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드려지는 이 짧은 의식은 그 어떤 성례보다 거룩하였다”고 고백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기자는 무릎을 쳤다.
“그래, 나도 간다.”
‘암투병’ 최일도 목사
그 무렵 우연처럼 본지 권순형 발행인의 ‘내 마음에 담은 호주의 사람과 풍경 전’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의회 전시장에서 밥퍼 최일도(67) 목사를 만났다.
“최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여기서 만나네요.”
“최 목사님, 투병소식을 들었는데 건강은 좀 어떠신가요?”
“33차례 방사선 치료를 하고 항암치료는 본인 선택이라고 해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작년 여름 무릎에 육종암이 왔어요. 처음엔 종기인 줄 알고 동네 정형외과에서 수술했어요. 그런데 암세포였어요. 재발이 되면 폐나 뇌에 문제를 일으키는 악성 중 악성이라고 해요. 지금은 면역력을 키우면 된다고 합니다.”
칼바람이 볼을 스치던 1988년 초겨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할아버지, 진지 드셨어요?”
찬 바닥에 온종일 웅크려 있던 함경도 출신 노인을 외면하지 못한 신학도는 노인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대접했다. 다음날엔 노인의 친구들 것까지 다섯 그릇 값을 치렀다.
해가 바뀌고 전도사가 된 그는 아예 버너와 코펠을 들고 다니며 역 광장에서,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굶주린 이들을 위해 물을 끓여 컵라면을 나눴다. 그때도 ‘거지들을 몰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쇄소 창고 한편에 세운 교회 간판은 걸핏하면 내동댕이쳐졌고, ‘거지 소굴’을 운영하는 청년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인근 상인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 청년은 이제 예순일곱이 돼 희끗한 머리를 쓰고 있다.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밥을 1천400만 그릇 넘게 나누는 동안 ‘밥퍼 최일도 목사’는 유명 인사가 됐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따뜻한 밥, 국, 반찬이 담긴 식판이 쥐여졌다.
역대 대통령, 영부인, 시장, 국회의원들은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문턱이 닳게 다녀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원했던 곳, 허기진 이들에게 36년간 따뜻한 밥을 나눠준 공동체가 지금 ‘범법자’로 몰려 쫓겨날 위기에 처해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청량리가 재개발되면서 초고층 아파트들과 새 입주민이 생겼고, 밥퍼를 잘 모르거나 밥퍼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주민들은 밥퍼가 자기 아이들의 통행 길에 혐오스러우니 우리 동네에서 밥 나눠주지 말라는 민원을 구청에 제기했다.
여기에 서울시가 밥퍼 본 건물을 새로 지을 때 동대문구와 필요한 행정처리를 말끔하게 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서울시는 동대문경찰서에 다일공동체 대표인 최일도 목사를 고발했다.
서울시 소유인 ‘동대문구 답십리동 554번지’ 일대의 밥퍼 본부건물 증축공사를 무단으로 진행했다는 이유에서다.
“12년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론이 폭발했고, 오세훈 시장이 전화해서 하루라도 빨리 만나자고해서 만났죠. ‘정말로 송구하다. 제가 이걸 알았더라면 고발 못하게 했다’며 고발을 취하했는데 지금은 동대문구와 소송 중입니다.”
최 목사는 “불법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고액 후원자들이 대거 떠나면서 2년간 후원금이 10억 원 이상 줄었다”며 야속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다일공동체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 우간다 등 전 세계 11개국 22개 분원에서 밥퍼와 빵퍼(무상급식), 꿈퍼(교육사업), 헬퍼(의료사업), 1:1 아동결연 등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최초의 전액 무료병원인 다일 천사병원을 2002년에 설립하여 노숙인, 무의탁 노인,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상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최 목사님, 저도 캄보디아에 밥푸러 갑니다.”
“아, 그래요? 연락해 놓겠습니다. 허허.”
세상을 바꾸는 힘 ‘선행’
선행이란 무엇일까? 어려운 과제였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선행: 착하고 어진 행실’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퍼주고 독거노인을 돌보는 이들, 오지를 찾아가 의료 활동을 돕거나 집을 짓고, 음식과 의류를 제공하는 이들, 거리를 청소하거나, 양로원을 찾아 노인들을 위로하고,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특히 그들을 취재하면서 매번 감동을 받았다.
기사를 쓰면서 그들의 봉사에 참여하고 싶었고, ‘노숙인 무료급식’활동을 접하면서 기자도 그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 소망은 결국 ‘선행’이라는 과제를 받고 나서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선행을 행하는 자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낮추고 숨기며, 어떤 보상이나 상급이나 칭찬을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온전한 선행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기자는 캄보디아 행 비행기 안에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알게 해주세요. 그래야 손뼉이 쳐지잖아요. 잘한다고 맞장구도 쳐주잖아요. 부탁합니다.”
프놈펜 공항이다. 입국 수속을 하는데 분위기가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으스스한 공기로 까닭 없이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존의 종이 형태 입국신고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여행자들이 우왕좌왕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2024년 9월 1일부터 캄보디아에 입국하는 모든 입국자에 대해 전자입국신고(e-Arrival)를 공식 시행하고 있다.
드디어 밥을 나눠주다
다음 날 ‘밥퍼’ 프놈펜 분탄 지부장(41)이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전신으로 웃으며 더없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밥퍼’ 센터로 향했다.
캄보디아의 주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이다. 이 때문에 도로 위에는 오토바이와 차들이 뒤엉켜 있었다. 아마도 평생 볼 수 있는 오토바이를 다 보는 듯했다. 차선이 그려지지 않은 길. 그래서일까. 기자가 탄 차량은 마주 오는 차량을 피해 곡예 하듯 추월을 해댔다.
마주 오는 대형트럭의 경적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갈 때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차들은 길 어디서든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돌려댔고, 차들이 미친 듯이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를 무단 횡단하는 보행자도 자주 보였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놀라거나, 창문으로 삿대질을 하지 않았다.
중간에 캄보디아 다일공동체 석미자(57) 원장이 합석했다. 기자를 만나기 위해 막 시엠립에서 프놈펜으로 올라왔다는 석 원장은 어떤 일도 척척 해낼 것 같은 복스러운 인상이었다.
먼저 캄보디아 최고 훈장수상을 축하했다.
“아이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꿈을 주려고 애썼던 것 뿐인데 큰 상을 받게 돼 감사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석 원장은 “평소 몸이 건강하지 못해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달팠다”며 “하지만, 우리 ‘밥퍼’를 매일 찾아오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들의 해맑은 눈빛과 순수한 영혼을 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냈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만들어 갈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면 하루의 고단함도 잊게 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석 원장이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었으며 기자도 따라 웃었다. 사람을 향해 웃어 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가 있을까?
도시경적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타난 외곽도시, 프놈펜 최대의 빈민가 ‘언동마을’이다.
방치된 쓰레기더미들과 구정물 사이에 얼기설기 지어진 판자 집 마을.
분탄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수시설이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지대가 낮은 곳에 하수가 고여 있습니다. 하수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보니까 악취가 나고 모기와 벌레들이 많아요. 그래서 뎅기열과 말라리아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어요.”
분탄 지부장은 “주거환경도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다”라며 “주방시설도 없고 도시인데도 불을 펴서 식사를 준비하고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집은 휴대용 버너에 식사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아직도 한 끼의 식사를 걱정하는 아이들과 이웃이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에겐 세상의 책도, 공부도, 학교도 없다. 그렇기에 꿈도 없다. 마치 버려진 것만 같은 이 땅에 ‘다일공동체 밥퍼 센터’가 세워진 것이다.
석미자 원장이 차에서 내리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에! 세상에! 안기고 손잡으며 먼저 달라붙는 밥퍼 아이들. 석 원장은 좋아 죽겠는 그런 함박웃음을 내내 짓고 있었다.
예전에는 외국인에 대해 거리감을 가지고 우물쭈물 부끄러워 다가가지 못했던 아이들이란다. 이제는 매우 친근하게 먼저 달려온다. 첫 만남에도 얼마나 살가운지 모른다. 손을 잡고 포옹한다. 마음의 벽 없이 이토록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까닭은 그만큼 서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줄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주방은 밥 짓는 열기로 후끈했다. 손놀림은 분주했고, 싸로앗(31)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때 본지 영문편집위원이며 캄보디아 지사장인 정지수 선교사가 아내 김지영 선교사와 함께 밥퍼를 찾아왔다.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스피커로 음악이 나오자,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앉아 점심식사를 기다리며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줄을 선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도, 자기 몸집만 한 동생을 안은 아이도 줄을 섰다.
한 끼가 아니라 세 끼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 끼를 푸짐하게 먹으니 이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할 순 없다.
오늘 모인 아이들은 어림잡아 3백여 명. 최근 프놈펜의 물가가 뛰면서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기자는 줄지어 선 아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맨발에 흙투성이인 꼬마들에게 식판을 건넸다. 기자가 ‘갓 블레스 유’라고 말하자 빼빼 마른 아이가 웃으며 ‘어꾼 쁘레아 예수’(예수님 감사합니다)하고 식판을 건네받았다. 아이의 눈빛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함과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맙소사 함께 배식을 하던 김지영 선교사가 울먹였다. 기자도 덩달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뜨겁고 힘차게 펑펑.
진미정(59) 선교사가 말문을 열었다.
“무릎을 꿇고 식판을 건네는 건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동시에 ‘주는 이가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당당하게 받아가라는 뜻도 담겼습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식판을 받아 든 아이들. 자리에 앉아 조그만 입으로 마지막 밥 한 톨까지 남기지 않고 야무지게 식판을 비워낸다. 비닐봉지에 싸서 감추는 아이들도 있었다. 왜 밥을 따로 싸는지 물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주려고 가져가기 위해서란다. 코끝이 찡했고, 왠지 모를 미안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일공동체는 2004년 1월 프놈펜에 지부장을 파견하고 캄보디아 정부에 다일공동체를 NGO로 등록했다. 프놈펜 바싹 강변 빈민촌에서 나눔과 섬김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는 의료진을 파견하고 다일치과클리닉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캄보디아 정부는 2006년 군경을 동원해 주민 강제 철거 및 이주를 자행했다. 대대적인 철거로 인해 공항 뒤편 언동마을에 빈민이 모여들었고, 프놈펜 최대 빈민촌이 형성됐다.
당시 다일공동체 프놈펜 지부도 철거당했고 이웃들을 따라 언동마을로 함께 이동했다. 마을에는 희망을 잃어버린 이웃들이 가득했다. 매춘, 마약, 도박 등 범죄가 판쳤다.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민이 넘쳐났다.
경찰조차 꺼려하는 그곳에서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녹색조끼 하나 입고 마을을 다니며 공동생활을 하며 주거개선 및 교육 사업 등을 통해 언동마을을 도왔다. 빈민이 줄었다. 교육받는 아이들도 늘었다. 길도 생겼다.
한편 캄보디아 정부는 다일공동체 20주년을 맞아 설립자인 최일도 목사와 캄보디아 다일공동체 원장 석미자 선교사, 그리고 김연수, 조성욱, 문병규, 김용정 이사 등을 포함한 총 6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 상은 캄보디아 국왕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Moha Serey Watdanak)이다.
석미자 원장은 “자립이 목표다”라며 “현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영어학과를 설립해 그 수익금으로 가난한 청년들에게 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한 일을 선행이라 할 수 있을까?
밥퍼 봉사는 누구나 한 번쯤 동참해볼 만한 봉사 같았다. 만들어진 음식을 나누는 일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료 급식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길을 거치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밥’을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하고 공감하는데 충분했다. 한 끼의 소중함이 와닿는 시간이었다.
물론 매일의 선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마음만은 늘 선행을 향해 열려있다고 자신한다. 욕심을 버리고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눌 때, 나의 작은 행동이 남에게 도움이 됐을 때, 봉사의 대열에 서 있었을 때, 보람과 기쁨은 내가 한일의 몇 배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한일을 감히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자는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좀 더 마을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공급되는 곳에서 서둘러 떠날 이유가 없었다.
이곳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가난한 마을에도 아이들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을 이루는데 본인의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제반 시스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계실까?
그 어떤 사명자의 심장을 울려 진리와 사랑을 들고 이 땅에서 땀과 눈물을 쏟게 할까? 기자는 진실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밥퍼 봉사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깊은 위로와 만지심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복음으로 변화될 이 땅에 사랑의 예수님이 함께하기를. 그래서 은혜로 또 만날 수 있기를.〠
김명동|본지 편집인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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