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점의 그림과 호주의 풍경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5/01/24 [15:41]

▲ 호주의 자연 풍경과 새들을 중심으로 자연이 품은 신비로운 색감과 생명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김춘광 화백.©크리스찬리뷰     

 

지난 1월 8일 오전, 기자 일행은 시드니의 원로 화백인 김춘광 작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고스포드 킨컴버(Gosford, Kincumber)로 향했다. 그의 루가김 갤러리(Luke Kim Gallery)는 휴양지로 유명한 아보카 비치(Avoca Beach)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의 작업실에 도착하자 김 화백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준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벽과 몇 개의 이젤(easel) 위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오일 페인트가 묻은 청바지를 입고 작업 중인 이젤 앞에 앉아 있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인 기자가 보기에도 그가 그린 그림들은 개성이 뚜렷한 작가의 감성이 드러나는 작품들로 보여졌다.

  

그는 시드니의 유명한 갤러리에서 15번이나 개인전을 가질 만큼 한인 사회의 뛰어난 예술작가이다.

 

호주로의 이민과 새로운 시작

 

김춘광 화백은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정확히 80세이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1960대 당시에는 미대가 한국에 세 곳 밖에 없었다. 서울대, 홍익대, 나중에 중앙대로 바뀐 서라벌예대 이렇게 세개의 대학 밖에는 없었다.

  

▲ 도로변 (89 Avoca Drive Kincumber)에 있는 김춘광 화백의 갤러리 전경.©크리스찬리뷰     

 

그는 홍익대학교 도안과(그래픽 디자인)에 입학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하는 사람을 ‘환쟁이’로 부를 때였다.

  

“제가 선린상고를 다니며 미술반 친구들보다 일 년 늦게 2학년 때부터 그림을 시작했어요. 그때 그림 그리기 시작한지 3개월 밖에 안됐는데도 우리 학교에서 3명이 뽑혀 홍익대학교 미술 실기대회에 나가 입선을 했어요.

  

저에게 미술 DNA가 있었던 거죠. 당시 미대는 홍익대가 최고였어요. 그래도 부모들이 볼 때는 한심한 건데 다행히 제 위로 형들이 세 분 있었는데 연대 법대도 가고 항공대도 가고 그러니까 막내인 저에게 크게 간섭을 안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장남이었으면 어려웠겠죠.”

  

▲ 작품명 ‘봄날은 간다’(70호). 김 화백은 이 작품을 지인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꿈속에서 자꾸 나타나 지인에게 웃돈을 주고 다시 찾아와 개인 소장품으로갤러리에 전시해 두고 있다.©크리스찬리뷰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학부를 1971년에 졸업한 후 ‘삼립제과’에 입사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등산, 스포츠 장비로 유명한 ‘코오롱’에 광고과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들어갔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1978년 여동생의 초청으로 시드니로 오게 되었다.

  

호주에서의 삶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에서는 광고 만드는 일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그의 전문기술을 펼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매제를 따라 롤러 셔터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매제가 똑똑해요. 제가 와보니, 매제가 롤러 셔터 공장에서 리딩 핸드(leading hand, 중간 관리자)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롤러 셔터라고 셔터 만드는 곳이에요. 지금은 그런게 많지 않은데 옛날에는 화물차에도 있었고, 건물이나 공장 또 차고 같은 것도 다 그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런 회사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일 년 정도 있었지요. 처음 들어갔는데 도저히 못하겠어요. 내가 망치는게 더 많았어요. 리딩 핸드가 탁탁 치면서 ‘괜찮아. 나도 처음에 그랬어.’ 그러면서 격려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 년을 버텼어요.”

  

그 후 그는 멜번으로 이동하여 파워스테이션(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힘든 환경 속에서도 금전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멜번 트랄라곤(Traralgon) 지역에 화력발전소를 크게 만드는 거에요. 그때 호주 사람들이 집시처럼 떼로 몰려 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누군가 그러는 거에요. 파워스테이션 건설 같은 일은 몇 달 혹은 몇 년 하면 끝나니까 웨지(wage)가 높다는 거에요.

  

보통 웨지의 세 배는 받는다고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가는데 따라 간 거에요. 처음으로 삽질을 했는데 하늘이 노랗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못할 것 같았는데 주위 한국인들이 헌신적으로 도와줘서 결국 웨어하우스(warehouse) 일을 하게 되어 2년 일을 했는데 당시 4만 불을 벌었어요. 저 위에 계신 분이 도와주셔서 버틸 수 있었어요. 그걸로 플레밍턴에 아파트를 샀어요.”

 

고단한 이민자의 여정-

한국사람은 뭐든지 해낼 수 있어!

 

시드니로 들아온 그는 에쉬필드(Ashfield)의 한 식료품점(grocery shop)을 매입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매장은 그리스인 여성이 운영하던 가게로 당시 2만 달러라는 적지 않은 금액에 매입했다. 이는 아파트 가격이 4만 달러였던 시절 큰 모험이라고 볼 수 있다.

  

▲ 김춘광 화백의 일상은 화실에서 작품을 제작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낸다.©크리스찬리뷰     

 

“이제 뭐가 좋을까? 당시에는 콜스(Coles) 같은 큰 슈퍼마켓이 없을 때여서 이런 식료품점이 잘될 때였어요. 그래서 에쉬필드의 그리스 사람이 운영하는 큰 식품점을 2만 불에 샀습니다.

  

그때 그리스 여주인이 저에게 안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가족이 다 달라붙어서 해도 힘든데 너 혼자 할 수 있겠냐?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 한국사람이야! 한국 사람은 뭐든지 해낼 수 있어!”

  

식료품점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새벽 3시에 플레밍턴 시장에 가서 꽃, 과일, 야채를 대량으로 구매해 매장으로 돌아오는 것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밀크, 신문, 빵 등의 배달 물품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덧 오전이 지나갔다.

  

김 화백은 하루 종일 일하며 한 달만에 무려 20kg이나 체중이 빠졌을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의 끈기로 매장을 운영했고 나중에는 부모님과 형을 초청해 가족의 도움을 받아 일 년을 버텼다. 부모님과 형님이 매장 운영을 도우며 큰 힘이 되어주었다. 결국 그는 손해 없이 식품점을 매각할 수 있었고 그 시기에 부모님을 호주로 초청해 영주권을 받게 되는 행운도 있었다.

  

식료품점을 매각한 후 그는 새로운 직업으로 택시 운전을 선택했다. 그때 택시 면허를 구매하는데 7만 6천 달러가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의 집값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택시 업계는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으로 평가받았다.

  

택시 운전은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는 그즈음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카슬힐(Castle Hiill) 지역에 새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새로 구입한 집의 모기지(mortgage)와 택시 대출금(loan)을 갚기 위해 하루 17~18시간을 밤낮없이 일하면서 모기지를 갚고 가정을 부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끈기와 노력으로 5년간 택시 운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장시간의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는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그는 피부병을 얻게 되었고 손에서 진물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고객과의 접촉도 어려워져서 택시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다행히 장애 판정을 받아 연금을 받게 되었다.

  

▲ 김 화백은 화실 입구에 새장과 꽃밭을 조성해 놓고 소재로 사용하기도 한다.©크리스찬리뷰     

 

이때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는 이대 앞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던 중 김 화백과 결혼하며 양품점을 동생에게 주고 호주로 왔다. 그러나 동생도 결혼을 하게 되어 양품점을 아내가 운영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아내는 양품점 운영을 위해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고 그 역시 아내를 따라 한국에 나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기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명 ‘언덕 위의 교회’ ©크리스찬리뷰     

 

예맥 화랑과 서일전문대학, 그리고 한국에서의 예술 여정

 

1992년 아내를 따라 한국에 나간 김 화백은 홍익대학교 동문의 제안으로 인사동의 예맥 화랑에서 이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갤러리는 단순히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투자 대상으로 자리 잡았고, 예맥 화랑은 인사동에서 가장 노른자 땅에 위치해 있었다.

  

이사로서 김 화백은 큐레이터 역할 및 기업들이 새로운 빌딩을 건설하면 미술품을 설치해야 하는데 기업과의 작품 거래를 통해 친구의 화랑사업에 기여했다.

  

예맥 화랑에서 활동하며 그는 서일전문대학에서 야간 강사로도 일했다. 운좋게도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 선배의 제안을 받아 서일전문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비록 대학원 학위는 없었지만 그의 실력과 경험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했다.

  

이는 김 화백에게 새로운 배움과 성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예술 여정에도 또 다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시드니에 혼자 있는 것보다 아내가 양품점 때문에 한국에 다시 나가야 되니까 같이 나갔죠. 한국에 나갔는데 뭔가 될라 하니까 고등학교 선배인 대학선배가 상명여대 학장으로 있다가 서일전문대학 학장으로 옮겨가면서 저를 스카우트한 거예요.

  

제가 한국에 가자마자 야! 너 강의 좀 해라. 아니 난 대학원도 안 나오고 그 당시에는 대학원 안 나오면 강의 못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위에 계신 저분(하느님)이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어용교수라 그러죠? 엉터리 교수들 있잖아요. 낙하산 타고 들어온 교수들을 학생들이 쫓아낼 때에요.

  

실력 없다. 성추행했다. 그래서 학생 파워가 굉장할 때에요. 그런데 선배가 상명여대에 있다가 서일전문대학 학장으로 가면서 저를 부른 거에요. 그때도 저 위에 계신 분이 저를 도왔습니다. 이렇게 저는 지금까지 위에 계신 저분이 도와주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수업에는 많은 학생들이 몰렸다. 전에 강의했던 교수들은 강의만 했지 그림을 직접 그려가며 강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직접 그림을 그려가며 강의를 하였고 그가 직접 그린 그림 실력은 학생들에게 인정을 받아 인기가 많았다.

  

▲ 작품명 ‘예어스록의 유채’ ©크리스찬리뷰     

 

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에 몰렸다. 이러한 강의 활동은 그에게 교육자로서의 보람과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호주 영주권자였던 김 화백은 한국에 머물기 위해 7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일본, 홍콩, 뉴질랜드 등으로 출국해야 했고 경제적 부담과 체력 소모가 큰 도전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과 한국에서의 활동 한계를 느끼며 호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 천 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한 김춘광 화백의 작품을 제한된 지면에 소개하기는 어렵다. ➊한낮의 Woy Woy ➋피고 싶은 꽃 ➌빅토리아의 봄 ➍마음의 고향     

 

천 점의 그림과 끝나지 않은 예술 여정

 

김춘광 화백이 다시 시드니로 돌아온 것은 그의 예술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개인전을 열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대중과 나누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1998년 시드니 실버워터의 어번 한인성당에서 열렸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그는 다양한 갤러리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시드니에 있는 컨템퍼러리 갤러리(Contemporary Art Gallery)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2001년에는 본다이 비치의 상징적인 건물, 본다이 파빌리온 갤러리(Bondi Pavillion Gallery)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본다이 파빌리온은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공간으로 김 화백은 이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호주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전시회에 대해 “갤러리 공간은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넉넉한 공간을 활용해 작품 하나하나가 돋보이도록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전시 활동은 단지 호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서울 조형 아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한국과 호주를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그는 에핑 아트갤러리, 혼스비 아트 갤러리, 이스트우드 브러쉬팜(Brushfarm Gallery) 아트갤러리 등 시드니 전역의 주요 갤러리에서 연이어 개인전을 개최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김 화백은 전시회마다 평균 40점에서 50점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대규모 전시에서는 60점 이상의 작품을 걸었다. 그는 “15회의 전시를 통해 약 700점 이상의 작품을 전시했고 지금까지 그린 작품은 약 1천 점에 달한다”며 이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호주의 자연 풍경과 새들을 중심으로 하며 자연이 품은 신비로운 색감과 생명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는 “늘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며 그의 그림 속 자연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넘어선 고달픈 삶의 여정과 희망을 함께 담고 있다고 전했다.

  

▲ 2000년 1월 31일부터 10년 동안 성경 66권을 필사한 김춘광 화백. 마지막 장에 2011년 1월 21일에 끝냈다고 기록되어 있다.©크리스찬리뷰     

 

특히 그의 그림은 시드니 지역의 많은 한인 가정에 소장되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 시티의 웬만한 곳에는 김 화백의 작품이 한 점씩 걸려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는 이 같은 반응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기쁨을 느끼며 자신의 예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

  

이미 인터뷰 내용을 통해 느꼈겠지만 그는 겸손한 신앙인이다. 그는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말끝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도와준 분은 “하늘에 계신 저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분 때문에 고비고비마다 넘어올 수 있었고, 한없이 부족한 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현한다.

  

그는 감사와 신앙의 표현으로 2000년 1월 31일부터 무려 10년간 하루에 한 장씩 꾸준히 성경을 직접 써내려 갔다. 10년의 세월 그 숱한 세월을 꾸준히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저분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였다고 고백한다.

  

김춘광 화백은 자신의 인생과 예술을 통해 긴 여정을 걸어왔다. 그가 1978년 한국을 떠나 호주로 온지 46년이 지났다. 그 이후 이민자로서 고단한 삶을 살아왔지만 고비 때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의 새로운 장을 열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저분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비록 늦게 작품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이민자로서 겪은 삶의 과정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예술로 풀어내 왔다.

  

▲ 김춘광 화백은 성경 전권을 필사한 용지를 서무실에 쌓아놓고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크리스찬리뷰     

 

그는 "제 그림을 보면 사람들이 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예술이 바로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임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색감과 구도는 그의 인생 철학과 깊이 맞물려 있으며 그의 예술은 그의 인생 이야기 이민자의 이야기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 점의 그림’을 그린 그가 남긴 예술적 발자취는 단지 작품의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김 화백의 그림에는 그의 삶과 내면, 호주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가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예술의 추구를 넘어 이민자로서 겪은 문화적 충돌과 성숙을 포함한 한편의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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