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역설

강승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5/01/24 [15:53]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은혜’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주일 예배 후에 “말씀에 은혜 받았습니다.” 고백하고 간증할 때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무엇이길래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헬라어에서 카리스(charis)라는 단어가 은혜인데, 기쁨과 즐거움, 선한 의지, 사랑, 호의, 긍휼, 은혜의 선물, 자비, 감사, 보답’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값 없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카리스에서 알게 되는 은혜는 감정 같은 정적인 개념보다 의지 같은 동적인 개념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감정이 아니라 의지이기에 고난이 와도 쓰러지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구제헌금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 할 때 이렇게 표현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고후 8:1-2,새번역).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마케도니아 교회를 소개할 때 이 교회는 헌금을 많이 했다고 자랑하듯이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마케도니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편지 한다.

  

다시 말해서 헌금 이야기 즉, 돈 이야기는 은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큰 환란의 시련을 통해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환난 다음에는 낙심과 슬픔이 오고 고통이 왔다고 말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가난으로 쪼들린 후에는 티끌만큼 작은 헌금이 나와야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큰 환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베푸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가능할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혜가 돈에 대한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 헌금의 문제는 돈 문제가 아니고 은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은혜의 역설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180도 바꾸는 힘이 있다. 은혜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물질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을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어 준다. 보물을 땅에 쌓을 것이 아니라, 도둑이 없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쌓도록 관점을 바꾸어 준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에 헌금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바울에게 구제 헌금하는 특권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이 돈 주는 사람을 을로 만들고 가난해서 돈을 받는 사람을 갑으로 만들 수 있는가? 바로 은혜가 그렇게 만들었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힘을 다해 일면식도 없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구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원해서 헌금했다고 한다. 이처럼 헌금 이야기, 즉 돈 이야기는 은혜의 이야기가 된다. 은혜의 체험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에 대양주의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넘치고 은혜의 역설이 입술에서 고백 되어지는 복된 2025년 새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강승찬|시드니새생명교회 담임목사

▲ 강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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