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Sydney Royal Easter Show) 개막식 취재를 위해 지난 4월 3일 시드니 올림픽공원 내 쇼그라운드를 찾았다.
매년 부활절을 즈음하여 열리는 이스터 쇼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호주 농업과 공동체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이다. 기자는 해마다 이곳을 찾지만 매번 다른 이야기와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기자는 미디어 센터를 먼저 방문했다. 예전에는 우드초핑(Wood chopping) 경기장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사진 촬영이 가능했지만, 금년부터 안전과 운영상의 이유로 촬영 규정이 강화되었다. 이제는 미디어 센터에서 별도의 허가를 받고 지정된 안내자의 동행 하에 경기장에 입장해야만 촬영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자 일행을 안내할 담당자가 배정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애슐리(Ashley)였다.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넨 애슐리는 자연스럽고도 친절한 태도로 기자 일행을 안내했다. 복잡한 동선을 지나 우드초핑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행사 운영과 경기 진행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우드초핑 경기장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처럼 이스터 쇼의 현장은 단순한 행사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살아있는 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우드쵸핑과 럼버 잭 쇼
우드초핑 경기장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도끼 하나에 온 힘을 실어 통나무를 내려치는 순간마다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관중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경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참가 선수들의 다양성이었다. 호주 각 주에서 모인 선수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선수들도 눈에 띄었다. 이 경기가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대회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여성 선수들의 경기였다. 남성 선수들 못지않은 정확한 타격과 리듬감 있는 도끼질은 단순한 힘의 경쟁이 아니라 기술과 경험의 축적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도끼의 각도와 박자, 그리고 끝까지 흔들림 없는 집중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드초핑은 여전히 이스터 쇼의 심장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전통과 국경을 넘어 모인 사람들의 열정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우드초핑 경기 취재를 마친 뒤 애슐리는 기자 일행에게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권했다.
“럼버 잭 쇼(Lumber Jack Show)를 보셨나요?”
여러 해 이스터 쇼를 방문해 왔지만 ‘럼버 잭 쇼’라는 이름은 기자에게도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Lumber’는 벌목업자를 의미하니 직역하자면 ‘벌목꾼 잭의 쇼’쯤 될 것이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벌목업자 복장을 한 출연자들이 톱과 도끼를 이용해 나무를 자르고, 균형을 잡으며 통나무 위를 오가는 묘기를 선보였다. 이어 카누를 타고 물 위를 질주하거나 통나무 위에서 중심을 잡고 경쟁하는 장면들은 관중들의 웃음과 박수를 끊임없이 이끌어냈다.
경쟁의 긴장감보다는 유쾌함과 재미에 초점이 맞춰진 공연이었지만 그 안에는 벌목이라는 호주의 전통 산업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이스터쇼의 심장과도 같은 ‘엔지 스타디움’
럼버잭 쇼 장의 스피커 소리와 전기톱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오래 머물기에는 힘들었다. 기자 일행은 개막식이 열리는 엔지 스타디움(Engie Stadium)으로 이동했다. 이스터쇼의 심장과도 같은 이곳은 그랜드 퍼레이드와 주요 시상식이 펼쳐지는 메인 무대이다.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한 무리의 말들과 라이더들이 일렬로 관중을 향해 서 있었고, 모두가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승부보다 더 깊은 어떤 ‘여운’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한 여성 라이더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그녀의 말 위에는 보라색 챔피언 러그(Champion Rug)가 덮였고 목에는 노란 꽃 화환이 걸렸다. 여기에 ‘Champion’이라 적힌 띠까지 더해지며, 그날의 주인공이 또렷이 드러났다. 그녀는 엘 망간(Elle Mangan)이었다.
관람석 뒤편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Wow Congratulations(와, 축하해요!)!” 순간적인 환호와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이어지는 박수와 함성. 그 목소리는 단순한 응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 전체를 향한 축하처럼 들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고 환호하는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 우승자의 가족인가요?”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네, 제 엄마예요.” 그녀의 이름은 Evie Mangan.
챔피언의 영광 뒤에는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환호하는 딸이 있었다.
엘 망간은 뉴사우스웨일스 탬워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승마인이며 여러 대회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선수였다. 딸 에비 역시 주니어 승마 대회에서 입상 경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막식, 전통과 존중이 만나는 순간
개막식에 앞서 그랜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말과 소와 양, 알파카 등, 다양한 가축들과 마차들이 음악에 맞춰 경기장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수많은 동물들이 함께 움직이지만 놀랍도록 질서가 유지되는 모습은 이스터 쇼가 단순한 축제가 아닌 ‘농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무대임을 실감하게 했다.
개막식은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육·해·공군 의장대가 입장했고 이어 호주 연방총독 사만다 모스틴(Samantha Mostyn)이 입장했다. 총독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장병들을 사열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맞추고 짧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권위적인 형식이 아니라 진심 어린 격려에 가까워 보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기자는 호주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권위보다는 사람, 형식보다는 존중, 그것이 이 나라가 오랜 시간 지켜온 질서이자 문화일 것이다.
이어 원주민들의 전통 정화 의식(Smoking Ceremony)이 진행되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디저리두 소리가 울려 퍼지자 순간 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호흡으로 묶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땅의 오랜 역사와 영성이 그 짧은 시간 속에 응축되어 전해지는 듯했다. 이날의 개막식은 단순한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아니었다. 땅과 하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사람과 공동체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로데오의 질주와 남겨진 이야기
이어 펼쳐진 로데오 경기는 또 다른 긴장과 열기를 만들어냈다. 말을 타는 로데오와 황소를 타는 로데오가 번갈아 진행되었는데, 두 종목은 분명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 말을 타는 경기에서는 의외로 제법 오랜 시간 균형을 유지하는 선수들도 눈에 띄었다. 거친 움직임 속에서도 중심을 잡아가는 모습은 숙련된 기술과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소 로데오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기였다. 거대한 몸집의 황소가 땅을 박차며 몸을 비틀고 튕겨내는 순간, 선수들은 몇 초도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오래 버티는 선수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부분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그만큼 황소를 다루는 것은 말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해 보였다. 그 짧은 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동물의 힘의 대결은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했고 경기장에서는 환호와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장면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호주의 역사와 현재가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무대였다.
오토바이 쇼와 불꽃 놀이로 하루 행사를 마감한 이스터 쇼는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스터 쇼는 그렇게 끝나는 행사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즐거움으로, 누군가에게는 한 해의 결실로,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억될 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스터 쇼의 진정한 가치는 화려한 공연이나 이벤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종 농작물 경연 대회와 정성껏 키운 가축들의 경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농부들의 땀과 시간, 그것이야말로 이 행사의 중심이다. 경기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전시관마다 가득한 농산물과 축산물, 그리고 수많은 볼거리들이 이스터 쇼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2026년 시드니 로열 이스터 쇼는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총 12일간 시드니 올림픽 파크에서 열렸으며 100만 명의 관객이 이스터 쇼를 찾았다.
하루로는 다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이어지는 만큼 여러 차례 방문해도 아쉬움이 남는 행사이다.
이곳을 걷다 보면 단순한 축제를 넘어 호주라는 나라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이날, 기자가 본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땅의 사람들과 시간 그리고 삶이 함께 빚어낸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호주인의 삶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Ph.D) 권순형|본지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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