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참 좋아하는 말이다. 우리 인생은 one way이기 때문에 한 번 가는 인생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피할 수 없는 인생길, 그 길은 즐기면서 가야 하는 길이리라.
그런데 말이다. “어차피 즐기리라”하며 살려해도, 실제의 삶은 우리를 그렇게 즐기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실질적인 여러 가지 위협과 근심, 염려가 ’즐기자‘ 하며 다짐하는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을 즐겁게 살려 해도, 그 수많은 근심 중 어떤 근심은 실제로 우리에게 위협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근심하지 않고 거기서도 즐거워하자 하며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문제를 방치하는 것이 되고, 실제로 그것 때문에 자신의 삶이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이 근심의 문제 앞에 어떻게 즐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되고 근심거리라 해도, 그것을 풀 수 있는 방책(方策)과 도구(tool)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염려가 아닌 한낱 스릴을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믿는 구석이 진짜 믿는 구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믿는 구석 때문에 오히려 교만해지고, 그 교만과 거만이 인생을 넘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믿는 구석이 지푸라기 같이 약한 줄을 몰랐다가, 그것이 어떤 어려움 앞에 끊어지는 순간 그것이 헛된 믿는 구석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인생을 진정 즐기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건전하고 믿을 만한 “믿는 구석”은 없는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반에서 서기를 맡고 있었다. 그 당시 서기는 그날 각 시간마다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는 학급일지와 학생들의 출결을 정리하는 출석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때 나의 반에 고등학교 2학년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 일진(학교 내에 존재하는 학생 폭력 조직)의 두목이 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자기 마음에 따라서 출석과 결석을 맘대로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어느 과목에 결석이 된 것으로 알고 나는 결석처리를 하였고 방과 후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에게 일지 확인을 받으며 그 일진 아이의 결석을 보고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일진 아이의 결석을 보고받은 선생님은 그 시간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여 결석 사실을 알렸다. 그 때 그 아이의 어머니는 학교 육성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셨다. 선생님께 연락을 받은 그 어머니는 오후에 집에 온 아들을 혼을 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오늘 수업에 잘 참여했다고 하면서 자신이 혼나는 것을 억울해 했고, 그런 말을 누가 했느냐고 하면서 결국은 내가 그렇게 보고를 한 것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화가 난 일진 아이가 나의 집에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학교 자율학습 (밤 10시까지 학교 남아서 공부하는 학습)에 있느라, 나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그 아이는 나의 어머니에게 욕을 하면서 “당신 자식 내일 학교 오면 가만 안 놔두겠다”고 위협과 협박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밤 11시가 다 되어 집에 갔는데 그때까지 어머니가 주무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셨다. 그러면서 오후에 있었던 그 일진 아이와 통화한 얘기를 하시면서 근심의 얼굴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일 학교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학생이 학교에 안 가요?”라며 가겠다고 하자 그럼 어머니가 학교 담임 선생님께 알려 놓을 테니 일찍 가지 말고 선생님이 조회하는 시간에 맞춰 선생님하고 같이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었고 그 시간은 무사하게 들어간다 해도 매시간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 별일 있겠어요?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셔요.”
근심하는 어머니를 안심시켜 놓고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무리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데 근심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머릿속에 상상이 되는데 학교 담장 밑에서 그 일진 아이에게 두드려 맞는 상상까지 그려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으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는데 마침 책상 위에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그 전 해인 고등학교 1학년 때 회심을 체험해서 그 이후로 성경을 처음으로 꾸준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책상에 가서 성경을 읽었다. 그날이 순서대로 읽는 성경의 마태복음 5장 이하를 읽는 차례였는데, 그때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당시 성경을 처음 읽는 때여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읽은 말씀이 지금 정확하게 내일 일을 염려하며 근심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너무 말씀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믿는 구석이 되는데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 전에 찬송 한 장 부르고 기도해야지 하고 찬송을 찾는데 마침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라는 찬송이 눈에 들어와 그 찬송을 반복해서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찬송을 불렀고 이어서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마음에 확신이 생기며 모든 불안 염려가 사그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고 그 평안은 그 후에 보호에 대한 확신이 되어 갔다. 기도를 마친 후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늘 가던 대로 6시 반에 학교로 출발했는데 그날 학교에 가서 반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날 때 거기서 또 놀라게 되었다. 늘 늦게 오던 그 아이가 그날은 제일 먼저 와서 아무도 없는 교실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들어갈까 말까 솔직히 고민이 되었는데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들어갔고, 원래대로 제일 앞자리에 앉아 책을 책상 속에 정리하는데 신경은 온통 뒤에 가 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나의 어깨에 손이 터치되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은 되었지만 태연한 척 뒤를 돌아보는데 그 아이 하는 말 “야, 미안하다. 어저께 너의 엄마한테 욕한 것 미안하고, 너 협박한 것 미안하다. 앞으로 너 괴롭히는 애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속에서 ‘할렐루야!’가 되었는지. 그 이후로 그 아이와 부딪힐 일도 없었고 그 아이의 보호를 받을 일도 없었다. 이 체험은 그때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나에게 확고한 체험이 되었다.
“이게 진짜 믿는 구석이구나”
교만해지지도 않으면서 진짜 확실한 도움이 되는 진짜 믿는 구석. 성경을 보니 진짜 즐거워 할 수 있는 믿는 구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편68:3) 〠
원영훈|케언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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