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사람들은 아름답고 건강한 삶을 사는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많다. 웰빙을 위해 사람들은 살 궁리를 하며 살아간다. 삶의 노력과 목표가 살 궁리에 맞춰져 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축인 죽음에 대하여 ‘죽을 궁리’는 살 궁리보다 많이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이 죽은 뒤에 이용하는 것이 ‘관’이다.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미리 구입해 놓음으로 안정감을 갖는데, 건강한 사람이 ‘관’을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죽을 궁리는 안하고 산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자기 ‘관’을 미리 사 놓거나 자기가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죽어서 들어 갈 관 속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죽어서는 알 수 없는 관 속을 체험한다고 한다. 나중에 죽어서 들어갈 관에 살아있을 때 들어가서 그 느낌이 어떤지를 느껴보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관은 아니지만 가묘(假墓)라 해서 살아생전에 미리 자기 묏자리를 만들어 놓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하면 더 오래 산다는 나름대로의 믿음 때문이다. 이것 또한 죽음보다는 오히려 또 하나의 살 궁리가 아닐까?
죽음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일은 사람에게 지혜를 준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전 7:2) 고 하는 것이 자신의 죽음을 보는 자가 겸손할 수 있는 것이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남은 인생을 허송세월이 아닌 진지하게 살아갈 수가 있게 해 준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와 열매는 살았을 때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었느냐에 따라 갈라지게 된다. 살기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기도 잘 죽어야 하는 것이다.
웰빙도 중요하지만 ‘웰다잉’(Well-dying)이 중요한 이유이다. 웰다잉의 문제가 안락사 논쟁에서 촉발된 면은 있지만, 단순히 죽는 순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일 때 의미있는 죽음을 향한 과정의 문제라고도 보는 것이다.
죽음을 과정으로 볼 때, “잘 죽어가는”(dying well) 것도 중요하다. 진짜 바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바른 죽음의 과정, 그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마16:24) 이 되는 것이고, 사도바울이 몸소 실천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의 삶이 되는 것이리라.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날마다 죽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웰빙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잘 죽은 예수님, 사도바울의 삶이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아름다운 웰빙의 삶이셨다. 그래서 well-being 과 well-dying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잘 죽고 있는가?
예전 한국 시골에서 첫 목회할 때 일이다. 당시 그 교회에는 부인 집사만 교회 나오고 남편과 자녀들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 특히 남편과 외아들이 술을 많이 먹는 집안이었다. 특히 남편은 부인이 교회를 나가는 것을 핍박하는 분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장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6개월 시한부 판정이었다.
여 집사 가족들은 큰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남편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때 그 영혼을 구원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 가정에 40일 예배를 작정하고 매일 그 가정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목사의 심방에 마음이 뻣뻣했던 남편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점점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40일이 지나갔고, 남편의 병세는 정말 죽음 직전까지 심각해졌다.
그러던 어느 눈이 많이 오던 금요일 새벽 1시, 그 가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간이라 혹시 하는 직감은 했지만 받아보니 그 가정의 장녀가 아버지가 임종하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눈보라를 뚫고 그 가정에 도착하니 정말 임종 직전이었고, 마침 부인 집사와 외아들과 다섯 딸들이 다 모여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임종예배를 드렸고 남편 분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하자 이미 혀가 말려 말을 할 수 없자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남편분이 뭔가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모두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들이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큰소리로 묻자, 그때 힘을 내어 하는 말이 “너희들 다 교회 다녀”하는 것이었고, 그 말을 들은 자녀들이 다 “아버지”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는데, 바로 그 말이 마지막 유언이 되면서 소천한 것이었다. 그 한마디 말로 가족들을 다 교회 나가도록 전도하고 그분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워낙 새벽이라 장의사가 오기 전에 시신을 수습해 놓은 후 일단 나도 교회로 돌아가 새벽기도 하고 오전에 상갓집에 가서 상주인 외아들과 가족들 만나서 장례절차를 의논하였다.
보통 한국에서 하는 대로 삼일장으로 치르려는데 마침 금요일에 소천하셔서 주일이 장례일이 되는 것이었다. 교회 다니던 여 집사는 남편이 예수님 믿고 돌아가셨으니 교회 장으로 치르자고 하는 데는 아들도 동의하였으나, 날을 잡는데 이견이 생겼다.
어머니인 여 집사는 주일은 안되고 장례를 하루 더 해서 월요일에 하자고 하고,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던 아들은 삼 일째인 주일날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목사로서 어머니 의견인 월요일에 하면 어떠냐고 아들에게 묻자, 그때 아직까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던 그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네가 그래도 목사냐!”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 무례함에 순간 화도 나고 모욕감도 느꼈지만그때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이 떠오르면서 내가 죽어야 할 순간임을 깨닫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작은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아들과 부딪힘 없이 그 순간을 이길 수 있었다.
그때 그 여 집사와 주변 사람들이 그 아들을 말리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그 해프닝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진정된 후 다시 이야기가 되어 장례를 교회 일정에 영향이 없는 시간에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장례를 치루고 그 다음 주일이 되었다. 예배 시간에 보니 여 집사와 자녀들이 다 나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후로 그 가족들은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소문이 빠른 시골지역 특성상, 그 아들의 무례함 앞에서도 목사가 잘 참더라는 소문이 퍼져 지역 선교하는데 좋은 역사를 이룬 것이 내가 죽는“죽음의 은혜”때문이었다.
만일 그 아들이 도발하던 그때 내가 죽지 않았다면 그 가정의 구원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역사회의 선교에도 악영향이 될 뻔 했던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웰빙은 ‘잘 죽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진리를 깨닫는 체험이었다.
살 궁리보다 우리 내면이든 육체의 죽음이든 죽을 궁리를 잘 하는 것이 진정 나와 세상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길 임을 새기게 된다. 아니 죽을 궁리를 먼저 하는 것이 진정한 살 궁리를 위한 길 임을 생각해 본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
원영훈|케언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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