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려 봐 때려 봐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4/23 [11:56]

두물머리 강가에서 ‘나 홀로’ 법률사무소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칠십 고개를 마주한 나이에 혼자 살면서 직원도 없이 혼자 이따금씩 들어오는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잘 있냐?”

  

내가 물었다. 그도 몸이 불편한 독거 노인인 셈이다. 우리는 서로 가끔씩 안부를 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일본뿐 아니라 우리의 시골에서도 노인들의 고독사가 생긴다고 했다. 

  

“잘 있다. 지금 창문을 통해 화사한 벚꽃에서 꽃비가 내리고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에 실려 오는 자두나무 꽃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의 목소리에 꽃향기의 감동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뭐하고 있었냐?”

  

내가 물었다.

  

“성경을 읽다가 접어두고 지금은 항소 이유서를 쓰고 있다. 이 변호사라는 직업이 참 좋은 거야. 늙어서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내가 쓰는 항소 이유서 정말 웃겨.”

  

“무슨 내용인데?”

  

“우리 나이 또래 비슷한 시골 사는 칠십 대 영감끼리 싸운건데 마을에서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은 것 같아. 한 영감이 상대방에게 머리를 들이밀면서 ‘때려 봐 때려 봐’한 거야. 그러니까 상대방 영감이 젊어서부터 성질이 거칠었는지 진짜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그랬어. 

  

자기가 때리고는 증거로 씨씨티브이 영상이 담긴 유에스비를 법정에 제출했는데 그걸 보니까 때리고 차고 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와있는 거야.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를 그대로 내는 걸 보니까 자기가 한 번도 보지 않고 그대로 낸 것 같아. 완전 꼴통이야. 

  

영상을 보니까 말이야 슬로우 비디오같이 주먹이 천천히 나가는 거야. 그래놓고는 그 원심력에 자기가 엎어지는 거야. 발로 차는 모션을 해 놓고는 뒤로 벌렁 나가 자빠지고 있어. 

  

관념 속에서는 젊은날 같이 날렵하게 잘 싸우겠지. 웃겨. 젊은 형사나 검사 판사들 앞에서 망신 아니야? 그런데도 시골에서 그렇게 싸워. 그거 항소 이유서 써 주고 있는 거야.”

  

세상이 아주 메마르고 팍팍해졌다. 서울과 부산의 시장 선거철이다. 정치인들끼리의 말싸움, 욕 싸움이 주먹 다툼 보다 더 심한 것 같다. 그들의 세 치 혀가 상대방의 뼈를 꺽으려고 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들의 밥통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들의 선동에 휩쓸려 패를 갈라 싸우는 시민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분열과 고발 그리고 선동은 생활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탁한 물결이 내가 사는 아파트의 골방까지 스며들어왔다. 

  

내가 사는 아파트로 뇌성마비로 전신 장애인 불쌍한 사람이 법률상담을 하러 왔었다. 엘리베이터에서 그 모습을 본 주민 한 사람이 아파트에서 변호사 영업을 한다고 고발을 했다. 그런 장애자가 오르내리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게 법률상담을 했던 다른 아파트 주민도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나의 방이 사무실 같은 모습이니까 불법적으로 용도변경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가 아파트 관리단장을 할 때 지지하고 표를 찍어주지 않았다는 원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흠을 찾거나 없으면 모략이라도 해서 짓밟고 누르고 싶은 악마성이 평범한 시민들의 삶에까지 검은 물처럼 들어차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아내가 교회 사람들을 불러 작은 모임을 가진 것도 비밀 영업 회의를 한다고 대자보를 만들어 붙여 주민을 선동하고 있다.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두 여자에게 밉보여 꽤나 고생을 하고 있다. 

  

골방에 박혀 살아도 세상은 그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대꾸를 하지 않으니까 점점 더 화를 내는 것 같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하나님에게 물어보았다. 철저히 밟게 하고 져 주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책장 위에 있는 어머니가 남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의미를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노자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원한을 가지지 말라고. 네가 대응하지 않더라도 며칠 후면 죽은 그의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걸 볼 거라고 말이다. 

  

공격하는 그들의 승리감을 충족시켜줘야 할 지도 모른다. 져야 할 것 같다. 져 주는 사람이 마음의 여유와 평안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봤다.〠 2021. 4. 27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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