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회는 서로 있음으로 서로가 성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좋은 사회는 같이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크게 누리게 하는 사회다.
반대로 병든 사회는 같이 있음이 주는 좋은 점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게 된다. 건강하지 않은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덫을 놓고, 서로를 못 가게 붙들고 늘어지는 사회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잘 볼 필요가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가장 우월한 자로 내세우지만 가장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도 못하면서 남도 못하게 한다고.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이 많아지면 무엇을 못하는 사회가 되고 자유를 제대로 못 누리게 된다.
어느 사회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 사회에 바리새인들이 많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바리새인들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말을 듣자마자 유대인들이 펄쩍 놀라면서 이렇게 대꾸한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 이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었는가?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해서 포로생활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오래 전에는 애굽에서도 종살이를 하지 않았는가? 더 결정적인 것은 과거가 아니라, 당장 그들이 살고 있던 그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역사적 사실이 너무 분명한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자기네들은 종살이를 한 적이 없다고 우기는 걸까?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은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마비가 오는 것은 이성이 어딘가에 강하게 구속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결과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그토록 이성적으로 마비시킨 것이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그 대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이 하는 말 속에 그 대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에 그들의 이성이 마비된 원인이 있다. 즉 강한 ‘우리’ 정신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좋은데, 그 ‘우리’라는 정신이 지나쳐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종이 되지 않고, 종이 된 적도 없다고 사실 부정, 사실 왜곡으로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로 돌아오자. 교회를 다녔든 안 다녔든 대한민국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던 사람들 중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예수의 이 말씀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감동과 도전을 받지 않은 청년이 있었던가? 거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다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청년은 또 얼마나 있었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지독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무슨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진리를 안다는 것을 무엇을 하나 알고 모르고라고 생각을 한다. 나름대로 진리를 찾고, 진리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자세가 무엇인가? 자기가 세상의 무슨 이론을 좀 더 알고,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것을 내세우지 않는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리다!(I am the truth!) 그렇다. 진리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Truth is not a concept) 진리는 한 인격이다(Truth is a person). 진리는 예수이시다. 이걸 깊이 깨닫지 못하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즉 ‘진리가 하는 일’에 꽂혀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가 하는 일’, 즉 ‘진리의 기능’보다 더 근원적이며, 더 중요한 것은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진리는 예수시다. 진리는 무엇을 하나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예수 그분이 진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를 가지려면 공부만으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게 해서 얻은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얻은 사람에게는 참된 자유가 있다. 진리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범위를 더 확장해보자.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는 그만큼 참된 자유, 깊은 자유가 있다. 사회가 혼란하고, 혼탁하고, 서로 붙잡고 늘어지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그만큼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라는 복음의 진리에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지 않은가? 예수가 진리이시다는 것을 안 들어본 성도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제대로 깨닫는 것은, 반드시 진리이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명구|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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