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와 부자 사이에는 대문이 하나 있었다.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의 집으로 불러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다면 부자는 이생의 즐거움을 저승까지 가지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승에서의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는 구렁이 놓여 있어서 서로 오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물 한방울을 떨어 뜨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한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대문만 열면 되었는데 이제 부자는 넘을 수 없는 구렁텅이를 사이에 두고 나사로와 떨어져 있게 되었다 물 한방울을 구걸하면서 말이다.”(김호경의 예수의 식탁 이야기에서)
예전에 알젠틴에서 살 때에 사업하는 30대의 젊은 부부들과 성경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 우리 집 거실에 함께 모여 간식을 먹으면서 교회에서는 나눌 수 없었던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말씀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 모임이 아직도 내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모임에 참석한 젊은 남편(?)들은 모두 이민 2세들로 언어와 문화적으로 한국보다는 현지화된 친구들이었고 사업적으로는 나름 성공한 친구들이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대부분 아내들의 강력한 잔소리와 이끌림에 의해 끌려가는 친구들이었다.
한 2~3년 동안 우리 집 거실에서 수요일 저녁마다 모여 신앙에 대해, 삶에 대해 진실한 대화를 나누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시간을 공유함이 주는 은혜를 그 모임을 통해 많이 배웠다.
어느 수요일 저녁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목사님! 부자는 정말 천국에 가지 못하나요?”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상황이었기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말씀에 부담이 느껴지고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은 성경을 아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상의 부자에게도 듣기 껄끄러운 말씀이다. 당시에 내가 어떻게 그 친구에게 대답했는지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럭 저럭 그 친구가 이해, 공감, 납득할 만한 답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 친구가 다시 그 부자의 구원 문제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김호경 교수의 말을 참고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닫혀진 대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오면 된다. 그리고 그 문 밖에 있는 사람을 안으로 불러들여 함께 잔치의 기쁨을 나누면 된다.”
중국 사람은 돈을 벌고 나면 가장 먼저 담을 쌓는다고 한다. 나에게 찾아온 그 돈으로 인해 이전에는 없던 담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담은 부자의 심리적인 마음 상태를 대변하는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를 당연히 보호하고픈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담 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던 그 돈이 반대로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우리를 외로운 존재로 만든 것인데 실은 이것이 바로 만병통치약 같은 돈의 어두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의 삶은 세상과 단절된 삶이다. 성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부자가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이는 부자가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잔치가 열리면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열렸던 대문은 굳게 닫혀지고 그 안에서는 그들만의 축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자신과 수준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는 즐겁고 신나고 재미날 수 밖에 없다.
이럴 때에 쓰는 말이 ‘끼리끼리’라는 말인데 그 ‘끼리끼리’가 주는 편함이 바로 오늘 부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된 것이다.
교회가 정말 좋은 이유는 끼리끼리가 모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교제의 장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였다면 죽었다 깨나도 만나서 말 섞지 않을 사람들과도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의 특성상 함께 만나서 식탁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물론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가 때로는 힘들고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런 교제를 통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배우게 되고 나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게 된다.
이런 만남이 때로는 신경쓰이고 많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실은 우리의 실존을 알게 되면 이런 만남이 주는 유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게 된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인데 곱씹을수록 마음에 울림이 있는 말씀이 있다.
“좋은 사람은 만나면 성장하고, 싫은 사람은 만나면 성숙한다”
만약 부자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사람들을 과감하게 떠나 자신과 세상을 구분하는 그 굳게 닫혀진 문을 열고 밖에 있는 나사로를 자기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 나사로도 그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즐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부자가 그랬다면 그 부자는 이생의 즐거움은 저승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집 대문은 굳게 걸어 잠그고 오직 자신의 수준과 격에 맞는 부류들과만 함께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많이 했던 일은 함께 밥을 먹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함께라는 말 속에 정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던 세리나 창녀, 아니 그들의 삶으로 인해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손가락질 당하던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난할 때에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대문 밖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은 그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이 베푼 식탁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진짜 부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를 그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진정한 부자의 품격을 보여 주셨다. 물론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하기 어렵겠지만 부자의 품격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부자들은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내지 말고 삶에 지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찐부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탁 교제의 행복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최주호|멜번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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