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말씀이냐, 성령이냐? (1960-1994년) 1편
1960년대는 영적으로 침체기였다. 전반적으로는 불확실성과 세속주의가 만연했던 시기였다. 동시에 개신교 안에서는 이런 적들과 싸움에 전투적으로 나서는 분위기가 인기를 끌었고, 학구적인 개혁주의 칼뱅주의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조류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사회학자 한스 몰의 주장에 따르면, 1960년대는 그동안 정적이었던 호주의 종교는 동적인 변화를 겪은 뒤, 처음엔 급격하게 이후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1971년 당시, 호주는 ‘종교를 추구하는 기독교 국가이자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이교도 국가’로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교파별 신도 수는 1931년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지만 이는 여전히 인구 증가율을 밑돌았고, 1960년대 전반부에 정점을 이루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주류 개신교도 수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1961년 뉴사우스웨일즈의 ‘기독교’인은 총 3,479,371명이었고, 1981년에는 17퍼센트 증가에 그친 4,081,542명이었다. 동기간 호주 전체 인구 증가율은 38퍼센트였는데, 뉴사우스웨일즈에서 스스로를 ‘무종교’로 답한 인구가 3천 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이것은 종교와 완전히 등을 돌린 사람들이 증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것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려는 분위기가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를 일컫는 사회학적 용어가 ‘세속화’다. 세속화는 종교적 활동의 감소를 나타내거나 호주인의 생활에서 교회가 비주류로 이동되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근대화가 반기독교화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호주는 유럽에서 나타난 세속화 과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양국에서 각각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흥미로운 대조를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인구 비율이 1949년에 94퍼센트였다가 1969년에 98퍼센트로 증가한 데 반해, 호주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95퍼센트에서 87퍼센트로 감소했다. 동시에 기독교는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종파가 처음으로 호주 내에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리스, 러시아, 세르비아, 시리아(현재 안디옥), 루마니아, 불가리아, 콥틱 교회 등의 정교회가 교세를 확장하여 다양성을 더했다. 카톨릭도 수십만 명에 이르는 이민자의 유입으로 인종 및 민족별 교구가 등장했다. 교회들의 연합, 호주연합교회 탄생 개신교 안에서는 오순절 운동과 다민족 사역이 연결되어 크게 일어났고, 1977년에는 (감리교, 회중교, 장로교 일부가 연합하여 설립된) 연합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되었으며, 남태평양과 한국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의 전통적인 유대가 강화되기도 했다. 1960년대의 오순절파는 급격한 성장을 보였고 은사 부흥의 형태로 주류 교회에도 스며들었다. 호주인의 교회 출석률이 1960년의 41퍼센트(월 1회 이상)에서 1985년의 24퍼센트로 떨어진 상태였지만, 오순절파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했고 청년층에 흡입하는데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교회였다. 주류 교단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러한 감소 현상에 대한 해답으로 교회 연합을 추진했다. 오랫동안 성공회와 카톨릭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나뉘었던 교회의 연합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 시드니 성공회 대주교인 도널드 로빈슨(1982-93 재임)은 세계 성공회 총회라고 할 수 있는 램버스회의에서 이러한 흐름에 반대를 표명했다. 그는 ‘내 생각엔 교회의 머리를 다시 하나로 회복하자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오직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성경에 나온 교회의 머리가 무엇인지 계속하여 찾아보면 답은 이미 나와있다.’라고 말했다. 교회연합운동에서 더 성공적이고 더 깊은 영향을 준 것은 감리교, 장로교, 회중교회의 일부가 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병합된 것이었다. '연합의 기초'라는 통합안 초안은 1972년에 각 교단회의에 투표로 붙여졌고 감리교와 회중교회는 80퍼센트 이상이 찬성 투표를 던졌다. 장로교 총회는 1974년 5월에야 비로소 연합 안건을 통과했으나 가결 정족수인 5분의 3에서 단지 7표가 많은 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상당수 교인들은 통합 후 새로운 호주연합교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들 대부분은 회중교회 신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장로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이렇게 이뤄진 연합은 또다른 파벌과 종파의 경향을 유지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당시 세계 기독교의 변화는 교회 간의 갈등을 많이 줄여버렸다. 카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총회(1962-65)를 통해 한 세기 이상 호주 사회의 주요 특징이었던 개신교와의 갈등을 상당부분 와해시켜 버렸다. 보수적 개신교 안에서도 그동안 위협으로 여겨지던 자유주의 신학은 사회와 교회에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 영향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잘 알려진 영국 성공회 자유신학자자 J.A.T. 로빈슨의 ‘신 앞에 정직하기(Honest to God, 1963)’란 책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맞는 ‘새로운 도덕성’으로 기존의 탈도덕 상태를 합리화했다며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자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The Secular City, 1964)’는 세속주의가 기독교 안에 있는 해방 기능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저자조차 놀랄 정도의 반응을 불러냈다. 하지만 이때부터 자유주의의 하향세가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문제의 심각성 어쨌든 당시에는 여전히 자유주의의 문제는 심각했다. 1967년 당시 뉴질랜드 장로교 신학교 교수인 로이드 기어링이 예수의 부활을 부인해 총회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판결되자, 시드니 서덜랜드의 그레이엄 커 목사는 호주 장로교로부터 탈퇴하여 1967년 호주장로교 개혁교단을 설립했다. 1970년대에는 존 힉이 영국에서 저서 ‘신과 신앙의 세계’(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1973)와 그가 편집한 ‘성육신 신화’(The Myth of God Incarnate, 1979)를 통해 영국의 자유주의 신학을 이끌었다. 1980년에는 돈 큐핏이 ‘신에게서 떠남’(Taking Leave of God)을 출간했다. 호주에서는 시드니의 복음주의 심장부 출신인 바바라 티어링이 사해 문서를 바탕으로 신약을 급진적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보수 진영을 경악시켰다. 티어링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이들의 또다른 공격대상은 미국 연합교단의 스퐁 주교였다. 스퐁 주교는 1990년대 초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고 동성애를 인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자유주의보다는 여성학적 관점에서 기존 기독교에 많은 질문이 던져졌다. 처음에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여성주의를 자유주의의 지류로 인식했었다. 그러나 식자층이나 현대과학을 이해하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기독교를 만들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도는 실패작이었다. 교회 내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연합 운동과 연합교회 안에서 입지를 찾았으나 전반적으로는 확실히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성도들이 세속주의의 힘에 무릎을 꿇고 교회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흐름을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 반대로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로 인해 교회가 비어 가기 때문에, 보수적 성경적 기독교를 통해서만이 교회가 성장하며 미래사역자가 양성된다고 믿었다. 전체보다는 지엽적으로 강성해진 복음주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 복음주의가 보인 저력과 끈질김은 기독교의 쇠퇴를 예견했던 이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에서는 이 시대의 한 가운데였던 1976년을 ‘복음주의의 해’라고 이름 붙였다. 호주에서도 미국,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주의는 개신교 교회 내에서 가장 강성한 운동으로 재등장했다. 신학적 성향이 다른 국내외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 복음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는 운동이 일어났다. 상당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이전 세대의 복음주의의 특징이었던 사회적 책임감을 회복했다. 개혁 신학의 르네상스로 인해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복음주의 전도자들이 양산되었고, 시드니는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의 중심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호주 오순절파는 기초를 놓는 기간을 마치고, 어느 교파보다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79년, 위대한 능력과 기간을 보인 부흥이 마침내 교회가 가장 필요로 했던 세대 즉, 호주 원주민사이에게 일어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호주 기독교인들이 ‘위대한 성령의 바람이 부는 남쪽 지역(호주를 일컫는 표현)’을 언급하고 기도하면서 부흥을 고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력의 증거와 더불어, 복음주의의 지위가 약화되는 징조도 있었다. 교회 내 자유주의의 몰락에 따라 복음주의의 주된 공격 대상 중의 하나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는 무엇이든 ‘자유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향이 있었고, 자유주의 신학의 정의에 대해서 일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이 운동은 분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동의 적은 없는데다 숫자적인 지원이 늘어나자, 이 운동은 곧 기대한 만큼 일치와 단결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복음주의안에서 전통적인 주류였던 경건주의 복음주의는 최소한 네 가지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 청교도 전통의 개혁 복음주의, '좌파적' 복음주의(월드 비전, 자독, 에레모스 같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룹을 설립), '우파적' 근본주의(창조 과학과 성경의 무오류 옹호), 은사주의 운동 및 오순절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복음주의 운동의 분열로 인해 건강한 복음주의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인 성령, 말씀, 세상이라는 가닥이 서로 나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각자는 더 강성해졌으나 서로를 제어하고 보정하기보다는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보편적 교회에 속했다는 진리를 인정했지만, 그 ‘교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주교(교황을 일컫는 표현) 아래 세계 교회의 하나로 복음주의를 위축시키겠다는 교회 연합 운동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자, 복음주의자들 교회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은사주의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 맞서, 이제껏 등한시했던 예배학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와 예배에 관심을 커질수록,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었다. 물론 실상 양쪽 모두에 관심을 쏟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은사주의 운동과 보수적인 복음주의 평신도 복음주의자들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교회의 필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이 가르치자 ‘교회 중심주의’경향에 불평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복음주의자들도 사회 참여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동기가 부족했다. 이것은 그동안의 어떤 신학도, 복음주의, 자유주의, 카톨릭신학 어떤 것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대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전례 때문에도 풀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여기에 맞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했다. 일부는 이를 복음선포와 교회사역의 긴박성을 조장하는 메시지였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신학이 세속화와 다문화 사회에 대한 압박감에 별 관련이 없다고 여기도록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언제나 교제보다는 교리를, 감정보다는 말씀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에 따라 구현된 의를 믿어야 함을 인식해 왔다. 하지만 말씀과 교리가 교제와 따뜻한 경건함, 열렬한 경건의 추구를 총체적으로 배제하는 쪽으로 가면, 어느쪽이 남든지 그건 건강한 복음주의가 아니었다. 기독교는 경험 이상의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개혁주의적 조직 신학이 소화하기 어렵고 궁극적으로 영양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은사주의 운동에서 풍부한 식단을 발견했다. 그러나 오순절파는 주관적인 신앙적 기반에 따라 말씀을 내던지고 대신 감정적이며 난해한 경험에서 영적 권위를 구했다. 말씀, 성령, 세상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심이 서로 분리되고, 한쪽으로만 치우치자 교회는 단기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복음주의 운동 전체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의 방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중 하나는 전통복음주의의 옹호자였던 웨일즈의 강해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가 1981년 사망하기 전에 했던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보수적 개혁 복음주의가 무작위로 공격했던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그는 복음주의자들과 개혁 신앙인들이 새로운 오순절파의 주장에 대해 ‘성령의 활동을 다시 실현해야 할 교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고 기존의 입장만을 되풀이한다면, 이는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바로 그 재앙이 호주 복음주의에 일어났다. 1966년 10월 18일, 런던에서 열린 복음주의 연합이 개최한 제2차 전국 복음주의 총회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각자의 교파에서 나와 복음주의 연합 교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호주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 이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한 교파로 자유주의자나 의식주의자들과 공존하는 것이 구미에 맞아서가 아니라, 복음주의 명분에 맞게 전체 교파(또는 적어도 한 교구처럼 그 일부라도)를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1966년, 호주성공회 대주교이자 복음주의자였던 휴 고프는 이임사에서 성공회보다 복음주의를 우선하는 시드니 성공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을 비난했다. 실제로 시드니 성공회 교구민 대부분은 호주성공회 전체와의 연결점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시드니 교구에는 복음주의를 우선하고 복음주의 노선으로 교구를 개혁하고자 했던 이들과 성공회 정체성을 지키려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알력이 있었고, 이것은 주로 ‘성공회 기도서'의 개정과 사용범위 문제를 놓고 일어났다. 후자는 '성공회 기도서'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굳건한 복음주의의 표현일 뿐 아니라, 성공회의 특징인 포용과 영적 풍부함의 문화, 따뜻한 영성을 지켜나가기에 좋은 도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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