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담을 허무는 예배자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1~4)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2/28 [12:54]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가 '보편적 교회'다. 다른 말로 Universal Church, '우주적 교회'다. 우주적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함께’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다. 그 중에 태양처럼 뜨거운 행성이 있는가 하면, 명왕성처럼 평균기온이 영하 248도인 별도 있다. 목성처럼 큰 별이 있고 달처럼 작은 별들도 있다. 이 모든 별들이 ‘함께’ 하는 곳이 우주다.

우주적 교회

교회가 바로 우주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된 자나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모두 ‘ 함께’ 하는 곳이 우주적 교회다. 우주적 교회는 인종, 지역, 재산, 학력, 신분, 나이에 구별이 없는 만민의  교회다. 그래서 우주적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차별이 없는 교회, 막힌 담을 허무는 교회다.

교회가 우주적 교회라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도 마땅히 우주적 예배이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이 우주적인데, 교회의 믿음을 표현하는 예배가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땅을 떠나 갈릴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유대와 갈릴리를 가로막고 있던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방법이 하나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보통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가곤 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을 개만도 못한 이방인 취급을 했고 사마리아를 부정한 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행여 사마리아 땅을 밟기라도 했다면 그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신발을 털고 먼지도 털어내었다. 사마리아의 흙도 먼지도 부정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면 사마리아인들은 가만히 있었겠나? 자신들을 경멸하던 유대인을 좋게 봐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유대인과 사마리안인들은 서로 으르렁 거리며 원수처럼 지냈다. 그 세월이 수백 년을 넘어섰다. 그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그들이 쌓아올린 미움, 질시, 경멸, 적대감의 담은 높고도 두터웠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다. 특히 유대 왕국의 자랑스러운 혈통인 다윗의 자손이셨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가 기록되어 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나치신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통과하셨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지난 호에 예수님이 유대땅을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경쟁과 질투, 교만하고 우쭐대던 모습들을 버리고 낮고 겸손한 예배자가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 경쟁과 교만의 땅 유대를 떠나 낮고 겸손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신 것이다.

그런데 낮고 겸손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었다. 먼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일이다

 
막힌 담을 허무는 예배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남과 북으로 갈라선 채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쌓아올렸던 담을 허무는 것이다. 서로 원수처럼 지내면서 미움, 경멸, 조롱, 적대감으로 쌓아올렸던 두터운 담벼락을 사랑으로 허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함께’하는 우주적 축제, 사랑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경멸하고 원수처럼 지내면서 어떻게 ‘함께’하는 우주적 교회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한 번도 만나지도 않고 말도 섞지 않고 서로의 땅을 밟지도 않고서 어떻게 ‘함께’하는 우주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는가?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는 참된 예배의 공동체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먼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갈릴리로 간다한들 제자들의 예배는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에는 ‘함께’ 할 수 없는 높은 담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자들이 진정으로 낮고 겸손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여전히 사마리아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제자들이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사랑을 배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섞지 않는 그들이 참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내가 먼저 담을 허물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미움의 담을 허물고, 배신의 담을 허물고, 원수의 담을 허물고 사마리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 예배를 드려도 답답하고 삶이 무기력한가? 담을 허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여전히 내 안에 쌓아올린 미움과 질투의 담으로 인해 ‘함께’하는 참된 예배, 우주적인 예배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23-24을 통해 이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앞서 먼저 해결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형제와 화목하는 일이다. 형제와 나를 사이에 두고 높이 쌓아올린 원망의 담을 먼저 허무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형제와 화목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오래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위대한 연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흑인들과 백인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난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될 그날, 그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손을 맞잡는다’고 하는 것은 흑인과 백인 사이에 두텁께 쌓아올렸던 담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산마다 낮아지는 것’은 내가 먼저 낮아지는 것이다.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고 험난한 곳이 평지가 되는 것’은 내가 먼저 고르지 않고 험난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예배, 모든 육체가 ‘함께’드리는 우주적인 예배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닮은 참된 예배자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사마리아 땅,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모든 사람들이 꺼리고 미워하고 조롱했던 사마리아, 그 십자가에 기꺼이 달리셨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져 내렸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의 사마리아를 기어이 통과하셨다.

지금 나의 사마리아는 무엇인가? 또 누구인가? 이제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미움, 배신, 분노, 자존심, 상처의 담을 허물어야 한다. 내가 먼저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먼저 사랑의 손을 내 밀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그러면 갈릴리로 갈 수가 있다. 주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우주적인 예배자,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다.

 

*지난 호에 ‘장소를 통해서 본 예배의 본질’로 실렸던 본 시리즈를 이번 호부터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시리즈 명을 변경합니다. <편집자 주>

 

정지홍

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관련기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