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함께 행복했던 시드니

리뷰초대석|임기 마치고 귀국한 채홍호 부총영사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1/03/28 [11:45]

시드니 총영사관은 나루터 같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당연히 그곳에 정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수한 손님(민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까지나 자리를 지킬 것 같았던 사공(영사)들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배에서 내려 떠나간다. 그럴 때마다 이별의 아픔을 겪으며 홍역을 앓게 하는 사공들이 많다.

특히 교민들의 아픔을 알뜰살뜰 보살피며 함께 호흡하던 사공들, 교회에서 낯을 익히며 가족처럼 지내던 사공들일수록 ‘고놈의 정 때문에’ 떠날 적마다 교민들은 가슴앓이를 한다.

이번에 시드니 부총영사직을 마치고, 한국 행안부로 복귀하는 채홍호 집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시드니를 떠나기 사흘 전에 영사관 그의 집무실에서 잠깐 만났다.

 
▲ 2년 전 시드니에 부임하여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한 채홍호 부총영사가 지난 3월 15일 본국행안부로 복귀했다.     ©크리스찬리뷰


 “내일 짐을 빼고 모레, 3월 15일 아침에 떠납니다.”

순박하고 친근하며 스며들 듯한 인상이었다. 하얀 머리가 내려 선비같은 인상을 주며 ‘밤새워 일하는 성실한 공무원’의 전형적인 트레이드마크가 예외 없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공’은 후임자를 위하여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간단히 말했다.

“2년 전 행안부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사무소장으로 시드니에 부임했습니다. 일년 만에 시드니 총영사관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국가 예산 절감차원에서 사무실을 폐쇄하고, 부총영사 직위를 받아 일하게 되었습니다. 시드니에 와서 한 일들은 총영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었습니다.”

 
뱃사공의 첫사랑

처음 맺은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그의 성실성은 교회 생활에서도 잘 드러났다. 시드니 처음 도착하여 출석한 교회에서 떠날 때까지 ‘처음 사랑’을 키워간 데서도 알 수 있다.

 “처음 바로 간 곳이 실로암장로교회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민박하고 있는 집 주인이 그 교회에 다녀 그곳을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워낙 교회 덩치가 커서 교회 거부감도 컸습니다. 거기에다 바빠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못하고 있었습니다. 뭐겉으로 드러나게 크리스찬이라고 못 밝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 시드니로 왔습니다. 교회가 ACU 대학 강당을 빌려 예배드리니 친근해요. 캠퍼스에 구경 온 듯한 느낌이 들고 아주 좋았습니다.”

▲ 2002년 미국 백인교회에서 세례 받은 채홍호 부총영사는 그 후 자신의인생과 생활습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토로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그분과의 사랑’ ‘이웃과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감동 그 자체였다고 했다.

 “제가 감명 깊은 일들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처음 갔을 때였습니다. 새신자반 도우미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해주시는지 그 친절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하시는 새신자반에 처음 들어가자마자 들었는데, 그곳에서 10년 다니면서도 잘 몰랐던 부분들을 신앙의 기본들을 명쾌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길에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새신자반을 마치고 나니 ‘이게 기독교구나. 크리스찬이구나.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되겠구나!’하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제까지 받아온 교육 가운데 가장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된 확실한 교육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아버지학교, 부부학교 등을 다녀보았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런 학교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새신자반에서 신앙생활의 기초를 확실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교회에서 ‘바나바’를 잘 연결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저와 같은 고향인 이원하 장로님을 소개시켜 주었지요. 이 장로님은 시드니에 오래 사셨기 때문에 처음 정착해야 할 저희들에게 시드니 생활, 신앙생활 등등을 조목조목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시드니에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폭을 교회뿐만 아니라 시드니 전반으로 넓혀주신 분이 바로 이 장로님입니다.

교회의 이러한 관심과 보살핌은 여릿여릿하게 타던 신앙에 강하고 급한 바람처럼 활활 타오르게 했다. 한국에서는 교회 가는 날보다 안가는 날이 더 많았는데, 여기서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제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시드니 와서부터입니다. 수요예배와 주일예배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 참석했습니다. 다윈이나 한국 등으로 출장 가는 경우를 제외하곤 다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도에 본격적으로 신앙생활 해보자고 하여 제자반과 사역반을 동시에 했습니다.

물론 규정상으로는 제자반 마치고 해야 하는데, 저는 이 두 과정을 동시에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반 수료할 때까지는 청강생으로 사역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자훈련하는 화, 목요일 저녁 시간, 수요예배에 주일까지. 가끔 토요일 새벽기도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교회까지 40분쯤 걸렸습니다.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지요. 목요일엔 아내와 함께 듣고, 화요일은 따로 들었습니다. 제자반 사역반도 제가 한국으로 갈 때와 브리즈번 등 출장 갈 때 두 번 빼고는 항상 참석했습니다.”

놀라운 일이다. 그의 직책과 일의 성격으로 볼 때 일주일에 반 이상을 교회 출석한다는 것은 ‘순교적인 각고’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야할 데가 얼마나 많으며, 만나야 할 약속이 얼마나 많은 자리인가?

 “총영사님께서 특별히 양해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그렇게 많이 와도 다 양해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총영사님도 우연히 저와 같이 부임하셨는데,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만, 기독교에 굉장히 개방적입니다. 지난 해 부활절 연합예배 강사로 김장환 목사님 오셨을 때, 김 목사님이 총영사님께 큰 관심을 가지셨고, 시드니의 많은 목사님들이 총영사님을 위해 기도도 많이 해주시는 과정에서, 많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저녁 시간을 빠지는 부분을 인정하고 허용해 주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총영사님이 허용적이고 푸근히 감싸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지, 안 그러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조직사회의 속성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오직 다른 사람들의 배려로 그에게 일어났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는 겸손한 표현이다. 그러나 평소에 그의 근무와 언행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간접적으로 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배려하고 싶어도 ‘받을 만한 그릇’이 안되면 안되는 것이 조직사회에의 특징이 아닌가.

이처럼 시드니에서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경험하고, 시간의 양을 질로 쪼개 쓰며, 그동안 못한 신앙이 압축성장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신앙서적을 읽으며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 총영사관에 새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고 애썼다. 신앙이 전혀 없이 막 함께 부임한 동료 가운데 이번 주일에 세례 받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테니스를 위하여

소위 ‘쉰세대’에 접근하여 신앙에 열정을 낼 만큼 그는 신앙적인 성장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사찰에 가거나 점을 보는 것은 금기사항 중의 하나였다. 어쩌다 절에 가는 경우 이상한 냄새와 느낌 때문에 비위가 상해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것은 교회에 대하여도 동일했다. 집 근처에 작은 교회가 있었지만 집안 분위기상 갈 수 조차 없었다고 했다. 어쩌다 크리스마스 날 빵이라도 얻어먹으면 공짜나 바라는 비겁한 놈으로 낙인이 찍히는 집안분위기였다고 한다.

▲ 실로암장로교회에서 간증하는 채홍호 집사.     ©실로암장로교회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예기치 않은 비라도 만나면 친구들과 하나님을 욕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 그 교회 전도사로 일하시면서 자전거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고 가끔 관심을 가져주시는 바람에 교회에 대한 감정이 다소 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 감정은 ‘완화’되었지만 교회 나가거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신앙생활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을 만큼 빡빡한 성장환경이었다. 빠듯한 집안 살림은 고등학교 80년 초, 구미 전자공고에 진학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구미 전자공고는 전교생이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는 특수학교입니다. 그런데 공고 졸업 후에 보니 적성에 도저히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 년 재수하여 서울시립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군대는 재학 시절, 시험 쳐서 카츄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카츄사에 번역병 제도가 처음 생겨 한국군을 다시 번역병으로 역차출할 때 뽑혀, 오산부대에서 근무할 때 외국인을 접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군 제대 후 그는 본격적으로 고시공부를 하여, 졸업하던 해인 89년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내무부(행안부)에 발령받아 경북 도청에서 5년 근무하고 다시 내무부로 가서 일했다. 20년 넘게 행정의 전 분야를 두루 섭렵했다. 경북 도청에서는 정책 기획계장을 하면서, 그 당시 ‘헐리우드 계획’을 세워, 문경 안동 등에 영화세트장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신앙은 결혼과 부인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들은 소위 ‘캠퍼스 커플’이었다. 부인 역시 전북 부안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행정학과에 늦게 입학한, 늦둥이 대학생이었다. 그가 군 제대하고 복학했을 때 서로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내는 원래 신앙이 없었는데, 전주 성심여고라는 가톨릭계 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마음속에 찾아오셨던 것 같습니다. 결혼하여 대구로 발령받아 가보니, 부안에서 왔고, 연고지가 전혀 없었던 곳 아닙니까?

저는 그때부터 운동하러 다니고…. 아기들 하고 힘드니 교회에 나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다니게 된 것은 서울로 발령받아 일산에 살 때부터입니다. 대구에서 아이 셋을 낳고 일산으로 이사갔습니다. 자연히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 등 여러 생각 때문에 일산 벧엘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제자반부터 본격적인 교회 생활 하더군요. 그리고 황성주 박사 교육 프로그램, 심지어 주님의교회 이재철 목사님에게 본격적으로 찾아다니면서 성경공부를 하고 그래요. 아이들에게도 독서 아카데미를 다니게 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부인은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했으나, 정작 자신은 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했다. 테니스에 공적으로 몰두했다고 밝혔다.

 
늦깎이 신앙

결혼 이후의 삶은 전형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했다. 집에는 돈만 벌어다 주면 가장의 역할은 다한 것이고 아이들 양육이나 집안 및 가족일(특히 처가 관련)은 모두 부인 몫으로 돌렸다. 대신 테니스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으며, 테니스를 위하여 교회에 ‘나가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신앙과 삶을 엮어내는 하나의 전환점이 생겼다.

“2001년 한 부처에서 한두 명씩 뽑아 유학을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저 혼자 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아내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시험 합격하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콜로라도 덴버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필립스 연합감리교회를 출석했습니다. 미국은 전형적으로 흑인은 흑인, 백인은 백인교회로 가더군요. 그때 저희 가족이 백인교회에 간 것은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 한국행안부로 복귀한 채홍호 부총영사     ©크리스찬리뷰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고 고백했다. 낯설고 물설고 말까지 선 그곳, 처음으로 하는 외국생활에 그곳 교회 성도들이 발 벗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4, 5학년이었던 아이들의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발표하셔서 각 아이들에게 개인교사를 다 붙여주셨습니다. 저한테 개인적으로 성경을 가르쳐 주는 분을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남성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콜로라도 산으로 다녔습니다.

광산 보험하는 사람들이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때 스키도 배웠습니다. 그분들이 저희 아이들부터 저까지 스키를 직접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들과 골프를 같이 치면서, ‘아, 교회는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곳, 딱딱하고 부담스러운 곳이 아니라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오픈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고정관념, 낡은 틀을 깨뜨리며, 늦깎이로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그곳 백인교회에서 2002년도에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저는 정확하게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 약간의 혼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것은 2002년 여름입니다. 바로 제가 덴버에서 유학하던 시기입니다. 그 이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세례를 받고 난 이후, 비록 아주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저의 인생이 그리고 생활 습관이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지요”

2003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행안부에 복귀해 홍보과장을 지냈다. 홍보과는 한마디로 기자들 상대하는 분야였다. 보도자료를 만들고, 정책 홍보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이곳 시드니로 오기 직전,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기획재정담당관을 지냈다. 대통령에게 업무보고, 대국회 관련 일, 장관 국회 답변 보좌, 행안부 일 년 살림 사는 예산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대통령께서 아침에 회의를 하시니 6시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장관들 회의 자료를 보좌하여 해드려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아침 7시 반은 무조건 출근 데드라인이었습니다. 퇴근은 자정이 넘어 어떨 땐 새벽 4시 되어 옷 갈아 입으러 집에 갈 정도였습니다. 옛 정부와는 다르게 일을 당겨서 하자고 주장하셨어요, 그 바람에 당해 연도 업무보고를 1~2월에 했는데, 대통령께서는 미리 당겨 12월에 업무보고를 종용하셨습니다. 그래서 2008년도는 3월에 업무보고를 하고, 2008년 12월에 2009년도 업무보고를 하는 등 한 해에 두 번의 업무보고 하는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한 부처에서 가장 중요한 기획 예산 국회 분야에서 관록을 쌓아갔다. 국장급으로 승진했을 때 시드니로 발령받아 이제 2년이 된 것이다. 다른 동기들은 본부에서 일부 국장석에 앉아있는데, 자신은 해외로 나오느라고 본부국장을 못했다고 했다.

 
시드니에서의 행복

 “하나님을 알고 나서 제 삶이 바울처럼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비해 빈도만 조금 줄었을 뿐, 아내와의 갈등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저를 미세하게 만져 주십니다. 바쁘고 힘든 직장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시고, 자녀들의 성장을 통해,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대화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직장에서 크리스찬임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좋은지를 말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는 노력도 약간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 다듬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호주에서 2년의 생활을 통한 성경읽기와 묵상, 제자훈련, 사랑방 등 교제와 훈련을 통해서 보다 많은 성장과 긍정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 행복의 유통업자 채홍호 집사     ©실로암장로교회


겸손한 신앙고백이다. 그의 가족은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제일 먼저 보험부터 끊었다고 한다. 하나님께 책임져주신다는 마음으로 생명보험부터 다 해약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 과외도 끊었다고 한다.

 “아내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 다 끊었습니다. 영어는 집에서 영어 성경으로만 했는데도 전국에서 1% 내에 드는 성적을 거두더군요. 큰 애, 둘째나 막내도 이곳에 처음 부임했을 때, 영어에 아무 부담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집에서 부지런히 영어성경을 읽도록 시킨 것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과외를 끊은 아이들은 대신 ‘월드비전’을 통해서 큰 애는 인도와 태국에 아이들 봉사단으로 보냈다고 한다. 한 번은 온 가족이 필리핀 선교 단기선교를 다녀오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가 워낙 열성이라서, 아내를 중심으로 저희 가족이 크리스찬으로 전향(?)하였습니다. 미국 다녀오고 나서 아내가 나서서 매일 저녁 본격적으로 영어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미국에서 영어를 유지하는 게 무지 돈이 많이 드는데 영어 성경으로 가정예배 드렸더니 영어가 유지되었습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제일 큰 고민 중에 하나였던 아이들 문제가 해결된 것을 너무 감사한다고 했다.

 “사춘기에 든 아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아이 대한 것은 제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저녁에 항상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에 아이들과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아이도 그것을 따라 주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가 변했습니다. 남자아인데 이번에 HSC 시험 치르고 울릉공대학 간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도무지 대학을 갈 수 없었을 아이였는데,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호주에서 교민들과,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며 ‘행복의 유통업자’로 지내던 그가 고국으로 귀국하면서 아쉬움도 피력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의 워홀러가 5만 명인데, 호주에만 3만 5천 명 이상이 있습니다. 호주에 있으면서 가장 절감한 것이 특히 워홀러 학생들에게 글로벌 리더로서의 비전과 자질을 함양하고 경험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드니교역자협의회, 한인회, 총영사관 모두가 유기적으로 협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 금년엔 그 일을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어서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시드니에 ‘그분’과 함께 생활했기에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가 더 많은 일이 기다리는 한국에서 더욱 새롭고, 더욱 영광스럽게 삶의 현장 속으로 찾아오시는 ‘그분’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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