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물입니다

탁구스타 용인대 교수 이에리사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4/26 [10:59]
감동은 훈련의 열매

이에리사, 그는 한국의 탁구역사를 새로 쓴 인물이다. 1973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우승의 주역으로 세계 제패를 일군 탁구 선수였다.

▲ 한국 탁구의 미다스의 손 이에리사 교수. 그는 1973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의 주역으로 세계 제패를 일군 탁구 선수였다.  ©국민일보

새마을운동을 일으키며 후진국의 때를 털려고 노력하던 그 시절, 그의 승전보는 팍팍한 삶을 살고 있던 온 국민에게 타작마당의 시원한 냉수같은 소식이었다. TV도 별로 없던 시절, 라디오 중계에 귀 기울이던 국민들은 순간순간 중계되는 감격스런 승전보에 함께 웃고 떠들며, 열광하고 응원하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어렵던 시절, 십대 여고생, 손안에 드는 작은 백구 하나로 온 민족을 감동의 도가니로 이끌어낸 그의 이름, ‘이에리사’는 민족의 가슴가슴마다 새겨졌다. 당시로서는 썩 드물고도 독특한 이름이었기에 더욱 잊혀지지 않았다. 그 당시의 일들을 잔잔히 밝혔다.

“중국과 일본에 이어 번번이 3위를 했습니다. 한 번은 꼭 넘어서고 싶었는데 예선에서 중국을 이겼을 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지요. 그 상승세가 이어져 결승에서 일본을 3대 1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만년 3위에서 두 계단을 오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세계 정상을 탈환한다는 게 결코 공짜는 아니었다. 인간이 한계에 도전하는 훈련의 결과였다. 그 훈련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영여중 3년 때 국내 최고를 가리는 종합선수권대회에서 실업선배를 꺾고 대표선수가 될 정도였으니, 타고난 재능에 훈련은 필수였다.

선수촌에 합류해 훈련하며 남자선수들이 하는 드라이브를 해보겠다고 천영석 코치에게 졸랐다. 그때부터 지옥훈련이 계속됐다. 하루 700개씩 연속해서 드라이브를 성공시켜야 했다. 중도에 끊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카운트. 라켓을 쥐고 있다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쉬지 않고 연습에 매달렸다. 드라이브를 해낼 만한 체력훈련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겨울에도 땀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얼도록 혼자 남아 트랙을 달렸다. 그는 큰 부상 없이 자기관리를 잘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훈련을 했습니다. 훈련을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밥 먹을 때나 심지어 잘 때도 항상 시합 생각만 했습니다. 실수 없이 한 번에 랠리 1000번을 했고, 라켓이 손에 있는지 없는지 감각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맹훈련을 했습니다. 하지만 라켓을 눌러주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혹사했던 후유증이 나타났습니다. 아침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을 수 없어요.”

온국민의 감동을 견인해낸 것은 다름 아닌 체력의 한계를 이겨낸 훈련과 연습이었다.

 
똑같은 두 번의 꿈

국내 탁구 일인자의 자리인 전국종합선수권대회 7연속 우승을 지킨 그는 8연속 우승에 실패한 이듬해, 1977년 버밍엄 세계탁구대회를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 조급함은 화를 부르고 기다림은 해결점을 찾는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내하는 내공이 쌓였다는 이에리사 교수.     ©국민일보


“은퇴를 결심하게 한 1976년 종합선수권대회 결승 경기는 기술적인 요인보다는 심리적 요인으로 졌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는 이기원 선수(산업은행)였는데 제가 평소대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하고 뭔가 신경이 계속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소속팀인 신탁은행의 코치로 승격한 그는 지도자로도 최고가 될 결심을 하고 서독으로 진출했다. 프랑크푸르트 FTG클럽의 선수 겸 코치로 2년 8개월 동안 활약하며 선수들을 부드럽게 지도하고 융통성있게 포용하는 유럽식 지도방법을 체득하기도 했다.

이즈음 그는 독특한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선수생활하던 20대에 그저 ‘좋은 말씀 듣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오던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열리는 꿈이었다.

“사실 선수생활하면서 교회 생활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차원에서 한 것은 아니에요. 은퇴 후 78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이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선수생활은 연습만 하면 되었는데, 은퇴하고 나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었습니다.

꿈에 전쟁이 일어나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적군이 총을 쏘는 순간 제가 성경을 펴었습니다. 아 그랬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 자신과 성경 말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내 손에 들려지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저에게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후 신앙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말씀’과 관계된 신앙생활, ‘내 마음속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등의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좋은 신앙인들이 많았다.

“양영자(올림픽 탁구 금메달리트, 현 몽골 선교사)가 좋은 신앙의 동지였고, 저를 독촉하고 몰아부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출석하는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관심과 애정이 탁구선수들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고,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걸 보고 믿는 사람이 많은 그 자체가 자연적인 전도의 길을 닦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의 평소 지론은 ‘하나님은 선물이다’는 것이었다.

“제가 느끼기에 하나님은 선물입니다. 믿음생활도 선물이고 말입니다. 그 선물을 그냥 받아서 전혀 손해볼 것 없는 보석같은 선물이지요. 그것을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겐 사람을 통해서, 어떤 사람에겐 고통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신앙생활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무수한 기회로 열어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조급함은 화를 부른다

 
이제까지 그의 생활 자체가 합숙소나 해외 원정생활이 많아서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할 때가 많고, 간혹 주일예배도 본의 아니게 못드릴 때도 많지만 항상 ‘내 마음에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 신앙 가진 자로서의 중심’에 존재의 의미를 두며, 제대로 서고자 한다고 했다.

▲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탁구 감독으로 참가한 이에리사 감독이 북한 선수와 포즈를 취했다.     ©국민일보

“선수생활이든 지도자 생활이든 매순간, 수시로 개인적으로, 관계적인 면에서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고 합니다. 항상 조급함이 화를 부르고 기다림은 해결점을 찾는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하면서 이제는 인내하는 내공이 쌓였습니다. 모두가 잘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뭔가 견뎌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순종의 행복’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고통 후에는 행복이란 선물이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삶은 하루도 쉴 틈이 없을 만큼 국제적, 국가적으로 종횡무진한 일들로 가득 찼다. 그만큼 그가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는 말이다. 선수 은퇴 직후 곧바로 서독에 진출, 플레잉 코치로 활약한 이후 서울올림픽과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자탁구 감독을 맡았다.

그는 지도자로서 격려와 배려로 출중한 선수들을 키워냈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양영자·현정화 콤비가 88서울올림픽 복식에서 금메달을 일궈내도록 했고, 2004년엔 김경아가 단식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일조했다. 대표선수들을 지도할 때나 대학과 실업팀에서 코치, 감독을 할 때도 그는 늘 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했다.

최고의 선수에서 지도자로도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는 틈틈이 해온 만학에도 마침표를 찍고 1996년엔 이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현대백화점 탁구팀을 창단, 지도했던 그는 2000년 용인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경기인 출신의 교수들이 모여 여성 체육인 후배들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준비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은퇴 후의 진로에 대해 가이드하고 지도자로서의 준비와 교육 등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조직을 꾸리고 싶어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으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평가는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던 거지요. 이제라도 경기인 출신 전문인들이 힘을 모아 우리의 체육문화유산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 후배들이 탄탄한 조직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력관리의 선진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입니다.”

 

최초의 여성 촌장

 

특히 지난 2005년 3월부터 2008년까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장을 지냈다. 임명 사면팔방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사’라며 우려의 시선을 보냈었다. 그러나 예의 ‘인내와 기다림’으로 견고하게 기초를 다진 그의 인격은 빛을 발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75kg 이상급)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한 장미란 선수     ©국민일보

“1966년 태릉선수촌이 설립된 이래로 여성이 촌장을 맡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태릉선수촌은 선수시절 제가 자라온 집과 같기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1969년 탁구대표선수로 입촌해 훈련한 선수촌 1세대다. 36년 만에 다시 간 태릉선수촌의 시설은 체육계의 발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선수촌이 문화재지역 안에 있어 예산집행 또한 여의치 않았다. 여기저기 발로 뛰어 확보해놓은 선수촌 시설보수 예산이 날아갈 위기에 처하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대전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극성스러운 노력까지 했다.

태릉선수촌장을 맡은 그는 그런 노력을 통해 많은 일들을 이뤄냈다. 훈련시설을 리모델링하고, 대표선수들의 연간 훈련비 지원 예산을 110일에서 190일까지로 늘렸고, 2010년엔 200일, 그리고 2011년엔 적정 수준인 210일까지 지원받도록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지도자 수당도 올리는 등 선수와 지도자들이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힘썼다. 그 결과 우리나라 올림픽 대표팀은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 7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향했던 일각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했다.

“선수들을 부상에 대한 스트레스와 승패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촌 직원들에겐 내 딸, 아들처럼 잘해주기 위해 늘 고민하자고 했죠. 깔끔하고 예쁜 환경으로 선수들이 새롭게 느끼고, 지루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국가대표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이라면 ‘창살 없는 감옥’이 아니라 소속팀의 숙소나 집보다 편안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면 언제나 찾아올 수 있게 촌장 집무실을 오픈해 ‘우리 아이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때 대한민국 선수단의 총감독으로 선수들을 뒷바라지의 주역이 되었다. 3년 반 동안 태릉선수촌의 장을 지내며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훈련에 열중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베이징으로 떠날 무렵, 촛불시위 후유증으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했기에 우리 선수들이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기쁜 소식을 많이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와 바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온 선수들을 알기에 그들에 대한 믿음도 컸었고요.”

특히 이번에 함께 시드니에 온 역도의 장미란 선수가 베이징에서 세계신기록을 기록하는 순간, VIP임원석에서 젊잖게 지켜보던 그에겐 ‘초인적인 용기’가 발동했다고 했다.

“바벨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는데 세계신기록 탄생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흥분해 함성을 토하기 시작하더군요. 순간적인 판단으로 그 소음이 미란이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관중석을 향해 조용히 하라며 두 팔을 들어올려 막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거죠.”

 
노메달에도 격려를

그만큼 몰입해 응원을 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는 당시 기자들과의 인터뷰 때마다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메달을 따내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뜨거운 격려를 해주십시오”하며 “이제는 스포츠팬들이 성숙한 관중 매너를 보여줄 차례”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사실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쓸쓸히 떠나는 선수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당연히 그들에게도 큰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그들이 함께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금메달이 나오겠어요.”

다행히 금메달 획득 선수들에게 버금갈 만큼 노메달 선수들에게도 언론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카누의 이순자, 남자체조의 양태영, 역도의 이배영 선수 등 노메달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는 여러 이벤트가 있어 그들이 아픔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했다.

올림픽 이후, 선수촌장의 임기가 몇 달 남아있었지만 사표를 냈고 학교로 돌아갔다. 용인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코칭론, 스포츠 카운슬링, 탁구를 가르치고 있으며, 기획처장이란 보직을 맡아 그동안 선수, 지도자, 체육행정가로서 경험을 밑바탕으로 새로운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탁구와 결혼하여 남은 활동기를 보람있고 멋있게 보내고 있었다. 부친이 대전부시장을 할만큼 명문가 출신인 그에게 ‘둘이 함께 걷는 길’을 택할 수는 없었을까?

 “20대 후반엔 지도자로 성공하고 싶은 꿈에 매달렸죠. 지인들의 소개도 있었고 중매도 들어왔지만 제 개인사에 마음 쏟고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3남 5녀 가운데 막내인 저를 위해 부모님은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결과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과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것도 보람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반반이었어요. 그래서 저의 생각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이 이어졌습니다.”

체육계에선 ‘깐깐한 왕언니’로 통하며, 원칙주의자로서 ‘얼굴 붉힐 일 있으면 붉히는’ 스타일이라 주변과 충돌할 때도 있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선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이 에리사.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했다.〠 <사진제공|국민일보>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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