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로 거룩한 도성의 그림을 그린다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1/05/30 [10:21]
20년 만의 만남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와의 처음 만남이. 그를 처음 만난 84년은 각별한 해였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8월에 여의도에서 있을 100주년 기념집회 그에 앞서 뚝섬에서 세계교인들이 모여 금식기도를 하는 소위 ‘한국판 미스바 집회’인 세계교회기도성회를 6.25에 맞춰 열리는 해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집회의 디자이너가 당시 CCC 총재였던 김준곤 목사였고, 김 목사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최대 그룹이 바로 CCC 졸업생들로 구성된 20만 명 정도(당시)의 ‘나사렛형제들’이었다.


▲ 의료선교협회 총무와 회장으로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며, 현대 한국 의료선교 근간을 다진 CCC출신의 이건오 장로.     ©크리스찬리뷰

나사렛형제들 중앙회장이란 타이틀은 이러한 헌신과 조직의 상징이요, 정신적인 지주라 할 수 있다. 84년, 특별히 대형집회가 두 번이나 열리던 그 해, 중앙회장이 바로 이건오 장로였고, 필자는 ‘간사’라는 타이틀로 말석에서 선배들의 심부름을 할 때였다.

당시 그가 기도회를 인도하던 모습과 추진력과 헌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리더십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전국 단위의 큰 집회뿐만 아니라 작은 기도모임 하나하나까지도 지극한 정성을 쏟으며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런 그를 20여년 만에 시드니에서 만났다. 간혹 매스컴이나 소문을 통하여 들려오는 소식 가운데 한 토막 가운데 홍정길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서안복음병원 원장을 잘하고 있는 사람을 하용조 목사가 꾀었어요. 한동대학에 기증된 포항 선린병원을 맡을 사람이 없었단 말이에요. 이건오 박사만한 분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단순하단 말이야.

좋은 명분으로 하 목사가 유혹하자 적자투성이 병원인데도 앞뒤 가리지 않고 부임을 해요. 대박이 났어요. 병원경영만 잘한 것이 아니라 포항시장, 법원지원장, 지청장 등 포항 유지들을 모아 그 오래된 <열단계 성서 교재>로 성경공부를 하고, 그게 나중에 포항성시화운동의 모태가 되었어요. ‘이건오’란 한 사람의 헌신된 사람이 포항 시내 분위기를 바꿔놓고 말더군요.”

그의 주특기인 작은 순모임 하나도 소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거목으로 키우시고, 마침내 큰 숲을 이루는 것이 그의 삶에 배여있는 살아있는 간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인도해온 CCC 출신 의료인들과 학생들의 모임인 ‘아가페의료 봉사단’도 그랬다. 현재 이끌고 있는 세계의료인선교협회도 마찬가지이다. CCC, 나사렛형제들, 아가페의료봉사단, 포항성시화운동 등 그의 이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그를 이렇게 만든 토양은 어디에 있을까?

 
신학교 가면 족보에서 파버릴 거다

그는 진해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 개척교회에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시골교회 전도사가 이끈 성경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신학교에 가서 그런 전도자가 되고 싶었는데 복병을 만났다.

“아버지가 조용히 부르더니, ‘신학교 가면 가봐라 족보에서 파버릴 것이니...’하는 거에요. 할 말이 없어서 전도사님에게 기도부탁하고 물어봤더니 ‘너희 세대에는 4년제 대학 졸업하고 신대원 가면 훨씬 나을 것이니 일반대학 먼저 가보라’하시는 겁니다.”

신학교 진학은 좌절됐지만, 교회봉사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인력수급이 제대로 안되는 시골 교회의 일은 도맡아놓고 했다. 고2 때 이미 시골교회 부장을 하고, 수요예배, 주일학교 예배를 인도했다. 한 마디로 그 시골 교회가 장래 지도자로서의 싹수를 키워온 모판이었던 셈이다.

“설교래야 자료가 없었으니 안성진 목사님이 쓰신 주일학교 설교집 하나 읽어서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매일 그 설교를 한 번씩 읽고 당일에는 7번 읽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하는 본문에 어느 의사가 시골에서 병원하면서 전도도 하고 시골 봉사하는데 마음에 누가 이 사람처럼 될 것인가 질문하면서, ‘하나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서원했지요.

그렇게 설교 마치고 ‘의과대학 가겠습니다’하고 아버지께 말씀 드리니 ‘누가 돈 대줄 것인가?’해요. 우리 집은 시내버스 종점 있는 아주 변두리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그때는 비전이나 꿈을 말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6.25 직후 모든 사람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가난한 시골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국립 부산대학교 의대에 진학한 그는 CCC 윤두혁 간사를 만나면서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

“아무런 꿈이 없을 때, 어느 날 김준목 목사님이 오셔서 민족, 열방, 선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열방에 대한 꿈이었지요,”

그 꿈을 먹으며 CCC에서 훈련 받고 졸업했다. 인턴 마치고 외과 레지던트를 부산침례병원에서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변수가 생겼다.


▲ 포항성시화운동의 주역 이건오 장로는 “시드니성시화운동을 통해 정직,경건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2세들이 주류 사회 안에서 충분히 세워갈 수 있다."고 진단했다.             ©크리스찬리뷰

“4학년 때 졸업반 때 전도해 놓은 친구가 나한테 와서 자기가 외과할 것이니 양보해주겠느냐 해요. 그 당시엔 내외과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 친구가 원망스러웠지만,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신 음성이 ‘저 친구는 너 쳐다보고 예수 믿는데 네가 이거 하나 양보 못하면 뭘 해주겠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양보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지도교수였던 유기형 박사님께 ‘저는 군대를 갔다와서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그분이 어디론가 전화해주셨습니다. 바로 장기려 박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병원에서 장기려 박사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쪽방촌을 찾아 무의촌 진료를 하며,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스승, 장기려 박사와 그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한 영혼 위해 양보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스승을 예배해 두셨더군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한 장 박사님을 만나면서 의사가 뭔지, 의학이 뭔지, 전인치유, 그리고 의료와 전도하는 것이 뭔지를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게 복음병원에서 외과 수료를 하고, 군대를 갔습니다. 그때는 군대 있으면서 대학원을 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가톨릭 의대에서 석박사 마치고, 장기려 박사님 추천으로 남부시립병원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장기려 박사 수제자의 길을 걷다

이곳에서 ‘낮은 데로 임하는 의료인’의 길을 걸었다. 남부시립병원은 모든 행려병자들이 다 몰려드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행려병자들의 밑바닥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콩나물 하나 떠다니지 않는 국물을 먹고 사는 그들을 보면서 결단했다. 갈비집을 돌아다니면서 갈비를 얻어다 국에 넣어주었다.

당시 CCC 안에 있던 MS팀이 독립하여 메디칼 전도팀이 되어 의료의 사각지대에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그때 미국인 의사 게리슨이 아가페 메디칼 무브먼트 직능별 선교전략차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그가 76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자 모임이 와해될 위기에서 그가 불씨를 살려내어 큰 불을 일으키듯 했다.

“나하고 학생 5명이 모여 기도와 말씀을 보는 월요 모임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CCC 아가페 의료인 2천명이 모이는 첫 계기가 됩니다. 회원들이 월요 성경공부를 하고, 토요일엔 신창동 무의촌 의료 진료소를 통해 아가페가 자라고 태동됐습니다. 무의지역, 독거노인 진료, 영등포 노숙자 진료 등으로 진료팀이 발전해나갔습니다.

아가페는 92년도에 김준곤 목사님 말씀에 따라 파키스탄에 ‘선한사마리아인 병원’을 지어 선교사역을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되는데, 한국팀이 만든 제일 오래된 사역팀입니다. 석계역 쪽에 선한이웃병원을 만들어 그곳에서 진료를 합니다.”

국민일보사와 협력하여 사랑의 의료봉사단을 통해 국내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국민일보는 버스를, 우리는 사람을 지원하여 도시 근로자 영세민들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가페가 커져가면서 CCC 아가페 의료인 선교대회를 했다. 이때 이 선교대회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이명수 박사 등이다. 이들은 의료선교대회를 하고 싶었지만 학자들로서는 학술대회차원에서만 생각하면서 한계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침 아가페 대회를 보고 그와 같은 것을 의료선교대회 하겠다고 한 것이 바로 ‘1차 의료선교대회’(89년)였다.

그때 이건오 장로는 의료선교협회 총무를 맡았다. 이후 줄곧 총무, 회장으로 20년 이상 장기집권을 하며, 현대 한국 의료선교 근간을 다지기도 했다.

“2년마다 한 번씩, 의료선교사가 이 대회 통해 발굴되어 나갑니다. 지금까지 나간 의료선교사가 76개 단체에서 400명 정도 됩니다. 한국 사람이 세운 의료기관은 의원·병원급이 30개국 47개가 선교지 병원, 현장 병원인데, 이런 병원들이 의료선교대회 중심으로 훈련받고 나간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되니 전 세계로부터 한국 의료인들을 선교사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끊임없이 몰려옵니다. 한국이 다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지원자들을 동원해야겠다는 마음으로 2006년도에는 일본기독병원 협회에 요청하니 일본에는 선교사로 갈 사람이 없습니다. 선교마인드가 축소되어갑니다. 대만에 가서 기독병원 중심으로 도전하니 대만은 이미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수아질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할 정도에 이르렀으니 선교의 싹이 났더군요. 도저히 안되어 재외동포 의료인들을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미주지역 한인들을 도전하기 위해 미주 지역을 3바퀴나 돌면서 독려했다. 그리하여 미주지역 한인의료인 대회를 2006년도에 얼바인 벧엘교회에서 열었다. 전 미주 지역에서 의료인 850명이 몰려왔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후 격년마다 열려서 작년에 3차 대회를 했다고 한다.

특히 2007년도에는 2세들만 선교대회 할 만큼 성장했고, 2세들이 처음엔 한국 사람들이 뭘 하겠느냐고 비관적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우리 한국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기대도 부쩍 높아졌다고 했다.


▲ 84년 나사렛형제들 중앙회장을 맡았던 이건오 장로(오른쪽)와 간사로 섬겼던 송기태 목사가 20년 만에 대양주의료선교대회 준비 모임에서 만나 함께 찬양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처음엔 그곳의 은퇴하신 분들에게 도전하려 했는데, 2세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굉장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일을 경험하고, 작년 연말부터 시드니에서 교민 의료인들을 도전하자고 하여, 이번에 대양주 한인선교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선교대회가 열린 후에는 선교지원자를 훈련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의료선교훈련이지요. 각 선교단체들이 함께 모여 선교의 중복투자가 되지 않도록 협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입양도 따로 하여 효율적인 선교를 하도록 구체적으로 도전하고 독려하는 일들이 이번 시드니 선교대회를 통하여 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시드니 오기 사흘 전에, ‘시드니 하면 브라질 교민들도 하겠다’고 하는 전갈도 받았습니다. 아마존 지역에 일하는 상파울로 의료인들을 동원하는 일에 하나님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료선교의 새 장을 열다

이렇게 2년마다 한 번씩 열려 올해 12회째 접어드는 의료선교대회를 통해 한국의 의료선교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의료선교는 일반선교에 거부감이 적은 것이 큰   장점이라고 했다. 사람 살리는 일에 복음을 붙인 것이라고 비유했다.

“의료와 선교를 말할 때, 의료는 선교를 위한 도구가 아닌, 의료가 곧 선교입니다. 전인적인 치료를 하기 때문이지요, 육체를 치료하고, 마음을 치유하고, 영을 치유하는데 함께 가는 것이 의료선교입니다.

이전에 캄보디아에 의료선교를 갔을 때입니다. 남자들마다 모두 어지럼증이 있는 거예요. 계속 그런 사람이 오는데, 공통점이 다 안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3개월 전 한국의 의료선교팀이 왔다갔다고 해요, 부흥회 설교를 하고는 위장약 필요한 사람, 안경 필요한 사람... 이런 식으로 줄 세워 나눠줬다는 겁니다. 눈과 안경도수가 안맞으니 어지러울 수밖에요. 거두라고 하니 아무도 안내놓는 겁니다. 몇 사람 검안해서 교정된 안경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설교하고 하나의 방편으로 의료를 하면 육신의 건강에 오히려 지장이 있습니다.”

그는 의료자체가 선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의료인들은 현지인들을 제일 만나기 쉬운 게 보통 장점이 아니라고 했다.

또 한 번은 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아프리카에서 다발성심장으로 10미터도 못걷던 아이를 한국에서 데려와 한양대 병원에서 살린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가 살렸다는 그 아이의 간증이 그 동네 무당을 쫓아낼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무지한 탓이라는 각성이 생겨 교육 방법이 바뀌었습니다. 그 아이는 교회마다 다니면서 선교사들이 살렸다고 간증하고, 교회 앞에 큰 독을 갖다 놓아 양식과 돈을 모아 심장재단을 설립할 정도였습니다.

현대 의료선교는 목회자, 교육자, 직업 훈련자, 의료인 등 모든 전문직능이 함께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팀 선교로 가야 합니다. 서구 선교사들이 200년 동안 엄청난 돈을 퍼부어도 변화되지 않는 그런 곳에 ‘도시변화’라는 개념으로 들어가니 처음부터 접근법이 달라집니다. 교육, 직업 등이 함께 맞물려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제일 골치 아픈 곳은 선교지에서 목회자가 병원 지어놓고 오라면 안가는 것입니다. 전문성이 없으니 도무지 병원 공간이 안됩니다. 그러나 의료인들이 병원 세워놓고 오라면 갑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착실하게 협력선교가 잘됩니다. 지금까지는 한국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많이 깨진다는 게 극복되고, 한국 사람들이 모여 병원들을 잘 꾸려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선교협회 사역도 축적되고, 또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들이 많아졌다. 특히 그들의 선교지 경험과 노하우는 앞으로 시행착오를 막는데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 썩히는 것이 아까워 그들이 모여 선교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선교정책국이 만들어졌다고도 했다. <의료와 선교>를 발행하여 정보의 공유화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특별히 그는 이번 6월 24~25일에 개최되는 대양주 의료인 선교대회를 계기로 남태평양 일대 선교사역지로 나갈 헌신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 2009년에 열렸던 제11차 의료선교대회 포스터. 2년마다 열리는 의료선교대회가 금년에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9월 23-25일 개최된다.     ©크리스찬리뷰


병원의 개념을 바꾸자

서울에서도 할 일 많은 그가 아무 연고도 없었던 포항행이 궁금했다.

“어느 날 CCC 후배인 하용조 목사님이 이런 저런 말 끝에 ‘형님이 포항 한동대 선린병원에 좀 가주십시오’해서 ‘기도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김영길 총장님이 전화를 하셔서 ‘우리 대학에 오시겠다면서요, 할렐루야!’하시고, 국무총리를 지내신 이영덕 이사장님께서 ‘할렐루야! 쟁기를 들고 뒤를 보면 안됩니다’하시는 거예요.

가게 된 동기는 후배 의사들이 나한테 ‘우리 세대가 왔을 때도 계속 기독병원, 예수병원을 그대로 할 겁니까? 지금은 기독병원, 예수병원 하면 꾀제제하고 낙후되어 싫습니다’하여 밤새워 토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병원, 기독병원이란 말 쓰지 말고, 선교병원이란 말을 쓰자, 옛날 기독병원처럼 교회를 돕고, 목회를 세우는 일도 하지만,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전문병원을 만들자, 지금까지는 찾아오는 환우들을 잘 돌봐드리면 좋은 병원이었지만, 지금은 지역사회로 들어가 사회적 병리를 찾아가 도와주는 행복한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자’ 이런 것들이 토론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병원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하여 2002년 4월에 선린의료원장으로 부임했다. 주말에는 아가페 선한이웃병원을 봐주어야 했으니 당연히 일인다역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의 계획대로 선린병원이 선교 기지병원, 의료선교가 잘 이뤄지지 않는 부분을 감당했다. 의료선교사를 발굴하여 선교현장으로 보내기 위해 선교훈련원을 세워 훈련했다. 현재 의사부부 6가정과 간호사 2명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단기 선교사역은 1년에 적게는 15번, 많게는 20번까지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선교 현지인 교육도 중점적으로 한다고 했다.

“인적 물적 자원도 한계가 있으니 의료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면 우리가 의료기술을 가르쳐주고, 일대일 훈련을 시켜 보내 그 나라 사람을 훈련시키도록 하자는 프로젝트입니다. 현재 16개국 의료인들이 훈련받고 갔습니다. 의료인 50명 이상을 긴급 재난 구호팀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국가든지 재난 후 7일 이내에 빨리 안가면 한국팀은 선교팀인 줄 알고 안받습니다. 의공과를 육성하여 선교지에 병원 라운딩하면 휴즈가 나가면 비싼 의료기기가 다 고장나고 녹슬어 못쓰게 되니 선교비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포항 성시화운동, 도시의 변화

그가 포항시장, 지검장, 지청장, 한동대 총장 등과 함께 시작한 CCC식 순모임이 ‘포항’이란 한 도시를 이끌어갈 무브먼트가 된 것은 항상 ‘준비된 사람’을 통해 인력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 듯하다.

“인구 50만 도시가 성시화운동이 제일 성공하는 사이즈입니다. 30만 이하는 의식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성시화하자고 해도 그 이유를 못느끼고, 도전을 못받습니다. 70~80만 이상이면 너무 많아서 안됩니다. 52만 포항에서 움직일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04년 세계성시화운동을 포항에서 하고, 2002년 5월에 포항성시화운동 본부를 결성하여 범죄와 부패가 없는 살기 좋은 거룩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성민, 성가, 성회, 성직, 성사, 성국, 성세 등 ‘7성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성시화운동의 요체는 말씀운동이었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말씀공부한다고 했다.

“설교로는 사람이 안변합니다. 말씀에 직접 헤딩해서 박살나는 게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어기고도 겁을 내지 않는 현실입니다.”

 
▲ 지난 5월 실로암장로교회 교육관에서 열린 대양주의료선교대회 준비 모임에서 이건오 장로가 대회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처음 성시화대회가 끝나고 나서 이 도시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천착했습니다.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51% 전도하는 운동입니다. 성시화운동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안믿는 사람보다 한 사람이라도 많아야 성시화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51% 예수믿는 사람 만들기 위해 전도요원을 훈련하고, 전도대학을 운영합니다. 둘째 정직운동하자는 겁니다. 한국의 가장 병폐가 정직 아닙니까? 셋째는 경건운동입니다. 야고보서는 환난 중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않는 것을 얼마나 소중한 덕목으로 강조합니까?

이것들을 사회 속에 어떻게 스며들고 존재하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한 끝에 평신도운동으로 순수하게 가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평신도 운동의 리더는 정치적인 인물은 조직은 빨리되는데 활동이 안됩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덕망있는 사람들이 모여 앞장서서 할 수 있도록 있습니다.”

말씀의 토대 위에 세 가지 활동덕목을 세우니 놀랍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과거에 조폭에 있다가 돌아선 사람 간증이 엄청난 파급을 일으켰다. .

“포항시의 경우 실제로 조폭 하나가 바뀌면 범죄율이 3% 줄어든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생계형 범죄는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검찰청 지청장과 이야기해보니 그 사회를 지배하는 주먹들이 거의 모든 대형범죄를 일으키는데, 그런 두목들이 예수 믿고 ‘얘들아 더 이상 욕심내지 말라’고 하면 범죄율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요즘 조폭들은 노래방 같은 합법적인 영업소를 가지고 영업하는데 옆집 노래방이 잘되고 자기 노래방이 안되면 옆집에 가서 내놔라 하고 못내놓겠다 하면 찔러서 발생하는 것이 대형범죄입니다. 성시화운동을 하면서 포항의 범죄율이 30% 준 것은 지청장들이 말해주어서 알게된 것입니다. 실제로 추석 전날은 범죄가 가장 많을 때인데, 2006년도에는 경찰서 유치장이 텅텅 비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큰 변화입니다.”

특히 포항시장이 예수 믿고 술 담배 끊고 새벽기도하고, 다른 유지들도 끊으니 술을 마시러 경주로 간다고 한다. 소방서장이 장로님인데, 그의 말로는 포항의 술집이 많이 줄었다고 한단다.

“화재예방 때문에 모든 술집 신고를 소방서에서 다 받는데, 이전엔 포항에 600개 술집이 등록되었는데, 400개로 줄었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지요. 그래서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하니 YMCA하는 사람이 ‘그게 시장 때문이냐 우연히 경기가 안좋으니 그렇지’ 하는 거에요. ‘아니 하나님이 술집을 망하게 하려니 술 경기가 안좋게 하지’하는 등 행복한 대화가 오가기도 해요.”

실제로 도시가 변하는 성시화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 도시의 현황은 이혼율 전국 1위, 아동·노인 학대 1위였다. 그래서 의료만 가지고는 행복한 도시가 안되고, 영적으로 건강해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신념으로, 목회자 홀리클럽, 지도자 홀리클럽, 평신도 홀리 클럽, 여성 홀리 클럽, 청년리더십 아카데미, 언론인 홀리 클럽 등 직능별 홀리클럽을 조직했다. 그 이후 괄목할 만한 변화는 불명예를 안고있던 ‘도시의 1등짜리’들이 성적(?)이 뚝 떨어졌다.

전국 1등이었던 가정해체 이혼율은 6등으로, 범죄율은 4등으로 내려앉았다. 포항시장이 한창 뜨겁게 믿을 때는 범죄률이 9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에서 도박예방 세미나, 도박으로 인한 송사건수가 제일 많던 포항, 여성 도박이 뚝 떨어진 것이다.

“포항에 도박이 무슨 문제냐고요? 포항의 주력 업종인 철강이 남성 위주의 산업입니다. 남성들이 3부 교대로 가정을 비우는 날이 많습니다. 처음엔 미장원 목욕탕에서 작은 도박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곳에서 외부의 도박 전문가들이 와서 돈을 잃어줍니다. 늘 잃어주며 재미를 붙이게 하고 솔깃해지면, 그 다음엔 아파트 가정집 도박으로 연결시켜요, 아파트 몇 호로 오라고 하니, 그곳에선 잃었다가 따다가 약오르게 하다가 다음 단계는 아지트로 가는데, 그곳에는 완전히 다 빼앗기고 마는 정글입니다.”

 
누구나 성시화 요원이다

성시화운동 이후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성도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성시화 이전엔 대구와 부산이 7~8%, 포항이 10~12%가 기독교인이었는데, 2010년 조사했을 때, 대구와 부산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포항은 18~20%로 적지 않게 늘어난 것이다. 포항 성시화운동 본부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성시아카데미를 열었다. 선린대학 내에 평생교육원 과정으로 성시화과를 두었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기능직 홀리클럽이었다.

 
▲ 대양주의료선교대회 준비 모임에서 인사하는 이건오 장로     ©크리스찬리뷰

“처음엔 그분들이 ‘성시화운동은 지식 있고 돈 많은 사람만 하는 겁니가?’하는 거예요. 그러자 목회자 홀리클럽 중에 목사님 한 분이 ‘아니다. 너희 기술은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은사다’라고 하여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분들의 봉사가 얼마나 열심인지요, 지금까지는 보고 받아 흑판에 써놓고 자기 시간에 맞춰 가서 독거노인들 중심으로 각 가정의 보일러, 수도관 등 고장난 부분을 고쳐드렸습니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봉사하는데 쓰고, 이제는 자기 당번이 돌아오면 일 마치고 와서 그날 밤 12시가 넘더라도 다 고쳐드립니다. 이분들은 그 봉사로 포항시장상, 경북 도지사상도 받고, 포항시와 블라디보스톡시가 자매결연 맺을 때 포항시장이 데리고 가 집을 지어주고 오기도 했습니다.”

누구에도 소외됨 없이 다가가는 모범적인 포항 성시화운동을 전세계에서 벤치마킹하려고 문의해 온다고 했다. 특히 그는 이 성시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로 함께 CCC 활동을 한 포항제일교회 김광웅 목사(포항성시화운동 대표)를 들었다.

“김 목사님은 성도들이 8천 명이나 되지만, 돕고 섬기는 일 외에는 당신 교회 사람들 다 뺍니다. 한국에 집단 이기주의, 교회 이기주의가 얼마나 심합니까? 자기 교회 이름 안나면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회 안의 물질주의는 ‘돈만 있으면 예수님 안계셔도 다한다’는 식입니다. 쾌락주의,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세상과 똑같습니다. 기쁨 주기 위해 복 받는 설교를 하고, 교회 권위주의가 팽배하다 보니 교회 직분을 ‘직급’으로 생각하여 직급 올라가는 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장로 되려고 선거운동하는 것은 세상보다 더하더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울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와서 사람이 바뀌기 전에는 사람이 안됩니다. 성시화운동에서는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모습들이 나타나 도시가 바뀌어야 합니다. ‘다 전도하러 갑시다’ 하고 자기만 빠지면 안됩니다. 성시화운동이 우리 시대에 마지막 하나님이 맡기신 운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빈이나 웨슬리 운동을 연구해보면 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민 사회에서도 한국 교민들이 살 수 있는 길이 정직운동이고, 주류사회를 향하여 말을 할 수 있는 길도 정직운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시화 운동이 세계 어디에서나 필요한 운동입니다.”

 
사회변화는 사람의 변화

사회변화와 도시변화에 적지 않은 고민을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성시화의 소명을 그는 한 도시를 변화시키자는 목표점은 가치관이나 문화나 시스템 같은 것들은 아무리 해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며, 유일한 길은 사람을 바꾸는 길이라고 거듭 역설했다.

“7성 운동은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변하면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나라가 변합니다. 도시변화 가운데, 그동안 포항에 부임했던 검찰청 지청장 3명이 예수 믿고 떠났습니다.

특히 옛날 대학 다닐 때 조금씩(?) 믿던 김우경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다 25년 동안 검찰계 폭탄주의 대부였습니다. 간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지요. 지도자 홀리클럽에 나와 변화되었습니다. 어느날 검사직 그만두겠다고 하여, 3개월 기도한 후 검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분이 ‘사법연수원 때 누군가 나를 붙잡아주었다면 내가 바른 길을 걸었을 터인데’하고 후회하면서, 지금은 ‘청년의 뜰’을 조직하여 직장 새내기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드니성시화운동을 통해 정직·경건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2세들이 주류사회 안에서 충분히 세워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진단했다. 밤이 맞도록 의료선교와 성시화, 그리고 도시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칠 줄 몰랐다. 어디를 눌러도 소명을 향한 강력한 에너지를 끝없이 발할 것 같았다.〠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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