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서 구제하는 구세군 될 터

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6/27 [12:01]
벨모어에 있는 구세군시드니한인교회(이하 구세군교회)는 지난 5월 22일(주일) 제5대 담임사관으로 이한상·허성은 사관을 맞았다.

그동안 구세군교회가 교민사회에 보여준 왕성한 활동을 감안한다면 새로 부임한 담임사관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크다. 이에 크리스찬리뷰가 이한상·허성은 부부 사관을 만났다.

▲ 구세군시드니한인교회 제5대 담임사관으로 부임한 이한상 허성은 사관                   ©크리스찬리뷰


 온유한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첫인상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잊혀지지 않고 남을 만큼 중요하다. 구세군교회 사무실 문을 열고 마중을 나온 이한상 사관의 첫인상은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안경 너머로 환하게 웃는 이한상 사관의 얼굴은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로 가득했다. 서둘러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구세군 제복을 입은 여성 사관이 살며시 들어왔다. 허성은 사관이었다. 이한상 사관과 첫인상이 같았다. 그녀도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 청년시절 돈암동구세군교회에서 김환기 사관(왼쪽)의 지도를 받았던 이한상•허성은 사관이 시드니에서 반갑게 재회했다.     ©크리스찬리뷰

처음 만나 서먹하고 다소 어색한 자리를 오랜 지인으로 구세군교회 제2대 담임사관을 지낸 김환기 사관(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이 풀어 주었다. 김환기 사관은 이한상 사관과 동부인과는 오랜 인연이 있었다. 김 사관이 처음 사역을 나간 교회는 돈암동 구세군교회였다. 이한상 사관은 당시 돈암동 교회의 청년부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허성은 사관은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허규현 사관의 자녀로 역시 청년부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한상·허성은 사관은 청년 시절에 김환기 사관의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구제가 없다면 구세군이 아니다

이야기가 오고 갈수록 첫인상은 굳혀져 갔다. 시종 온유함을 잃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성실하게 답해 주는 이한상·허성은 사관은 한국에서 전도유망한 사관이었다. 이한상 사관은 방학동 구세군교회를 개척한 뒤 한국구세군 본영에서 정보센터 담당관으로 사역을 했다. 이제 막 전산화를 도입한 한국구세군 본영컴퓨터와 전산망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다시 목회지로 부임한 곳이 인천 만수동 구세군 교회였다. 인천의 만수동은 그때만 해도 빈민촌이었다. 사과 궤짝으로 엉성하게 만든 판자집과 동네마다 어수룩하게 세워진 공동화장실이 있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 이한상 사관     ©크리스찬리뷰

이곳에 부임을 하자 이한상 사관은 덜컥 걱정이 됐다. 자신들이 거주할 새로 지은 사택이 너무 크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이한상 사관은 “내가 목회해야할 교인들은 가난하고 비좁게 사는데, 저희만 넓고 큰 집에서 사는 것이 너무도 황송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온유한 이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구제와 섬김이 없는 구세군은 더이상 구세군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며 그 넓고 큰 사택에 치매노인복지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치매로 고생하는 노인들을 돕기 위함이었다. 원장은 허성은 사관의 몫이었다. 허 사관은 집 안을 그들을 돕는 용도로 꾸몄고 전문 사역을 위해 학교를 다니며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렇게 2005년부터 시작한 치매노인복지센터에서 이들 부부 사관은 매일 20여 명의 노인들을 돌보고 방문하면서 시드니에 오기까지 7년을 한결같이 사랑으로 노인들을 섬겨왔다. 

 
잊혀진 소명 질병으로 다시 찾다

왜 사관이 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이한상 사관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프러포즈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한상 사관과 허성은 사관의 만남은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돈암동 구세군교회에서 문학의 밤이 열렸는데, 이 사관이 그 교회에 다니는 친구에게 기타를 빌려줬다. 나중에 기타를 돌려받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가 지금의 아내인 허성은 사관을 보게 되었다. 이한상 사관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기타는 안중에도 없었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리고 즉시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 허성은 사관     ©크리스찬리뷰

대학에 다닐 때였다. 당시 이한상 청년은 허성은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관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와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면 어떨까?”

허성은 사관은 “그것은 분명한 프러포즈였어요. 구세군교회는 부부가 사관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라며 한바탕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름답게 사랑을 키운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일구게 되었다. 그러나 바쁜 사회생활로 사관이 되어서 교회를 섬기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겠다는 소명은 잊혀져갔다. 결혼은 이루었지만 소명은 잊어버렸다.

그러다 이한상 사관이 30세가 접어든 해에 이름 모를 병이 찾아왔다. 극도로 피곤함과 어지러움을 느끼며 급기야 누워있는 것조차도 힘이 들 정도가 되었다. 가끔씩 발병을 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며 일년에 두세 차례씩 일주일을 입원 해야 했다. 그러기를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귀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어지러움증이 몰려올 때가 있다고 한다.

이한상 사관은 병상에 누워서 건강과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곁에는 언제나 남편을 간호하는 허성은 사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석하는 교회 사모님이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병원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사모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하나님이 두 분께 약속을 지키라고 하십니다”였다.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이한상·허성은 부부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아!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게 있었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프러포즈할 때 함께 받았던 소명이었다. 이들 부부는 즉각적으로 헌신하기로 했다. 잊혀진 소명을 질병으로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 해에 사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이한상 사관은 한국에서 구세군 사관으로 사역을 하면서 아프리카를 품게 되었다. 그래서 5년 전에 해외사역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영에서는 아무런 답이 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지난 2010년에 본영에서 호주로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온 것이 아프리카였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다. 자신들의 비전은 가난한 아프리카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풍요의 땅 호주로 가라고 하신 것이다.

▲ 김환기 사관     ©크리스찬리뷰

호주에서 특별히 중점적으로 계획하는 사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한상 사관은 “청년 사역에 집중할 것입니다. 특히 1.5세들을 위한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사역에도 관심이 많아요. 이민자의 자녀들에게 알맞는 교재도 개발하고 지도할 계획입니다.”

이번에는 허성은 사관이 입을 열었다. “구세군의 슬로건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처럼 실질적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단순히 물질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내 시간을 들여서 봉사하고 구제하는 사역을 할 것입니다.”

이한상 사관이 거들었다. “빵 하나를 나누어 주어도 정말 필요한 분들에게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정말 생활 속에서 구제하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이한상 사관이나 허성은 사관의 생각은 온통 타인에 대한 것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남을 도울 수 있을까?’ 이들은 정말 ‘구세군’이었다.

이한상 사관의 목회 철학은 특이하게도 ‘교제’다. 교인들끼리 교제가 친밀하고, 사관과도 교제가 친밀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 철학이 새삼스럽다. 어찌보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과의 사귐, 성도들 간의 사귐, 이웃들과의 사귐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이한상 사관에게 ‘꿈꾸는 교회’에 대해 물었다.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서로 떡을 떼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의 꿈처럼 구세군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기를 바라며 교회 사무실을 나왔다.〠

 

글·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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