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앙, 바른 교리, 바른 교회

글|송기태,사진|고석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7/25 [11:19]
3대에 걸쳐 목사 5명 배출한 가문

- 시드니에서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주제로 교의학 강좌를 개설한 원광연 목사님(시드니영락교회 협력목사|EM담당)의 새로운 도전과 열정을 경하합니다. 먼저 이 일을 시작하신 목사님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마샬 맥루한이란 커뮤니케이션 학자는 ‘메신저가 메시지’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내용도 중요하지만 누가 하느냐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목사님의 신앙배경, 이를테면 구원 체험이라든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 같은 것을 듣고 싶군요.


 
▲ 지난 7월 20일부터 40주 일정으로 ‘바른신앙을 위한 교의 강좌’를 개설한 원광연 목사.     ©크리스찬리뷰


“저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라, 특별한 구원 체험은 없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점진적으로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목회자 집안에서 출생, 성장하였습니다. 제 조부님은 원춘도 목사님으로, 김구 선생님과 함께 황해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셨지요. 일찍이 1907년 평양 대부흥 때에 예수님을 믿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일제시대 때 황해도 풍천교회와 장연교회에서 목회를 하셨고, 신사참배 반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6.25 동란이 발생하자, 가족들을 모두 남하시키고 당신께서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그대로 남아 계시다가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이송되던 중, 공산당들이 방에 가두고 바깥에서 불을 질러 순교하셨습니다.

용인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에 제 조부님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 부친과 친척 어른들은 조부님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자부심이 대단하셨고, 항상 모이실 때마다 조부님 이야기를 늘 하셨고, 조부님의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저희 집안은 3대에 걸쳐 목사가 5명입니다. 부친은 6.25동란으로 신학공부를 중단하셨다가 후에 다시 공부하시고 강원도에서 목회를 하시다 소천하셨습니다. 사촌 형이 둘인데, 큰 형님은 인천에서 합동측 교회에서 30년 담임하고 금년에 은퇴하셨고, 둘째 형님은 현재 마산의 고신측 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저는 호주장로교회 소속 목사입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라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구원, 신앙, 이런 것은 당연한 것으로 늘 여겼습니다. 어머니는 불교 집안 출신으로 결혼하신 후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저의 신앙적 성장에는 제 어머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계시’를 주제로 첫 강좌에서 말씀을 하는 원광연 목사     ©고석호


어머니는 제가 아주 어릴 때에 저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다섯 번이나 서원기도를 하려다 너무 아까워서 하지 못하다가 여섯 번째에 결국 저를 하나님께 목사로 드리셨답니다. 그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게 말씀하시면서, “너는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늘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는 6.25동란 때에 영어 통역으로 생활을 하실 정도로 영어를 잘 하셨던 분이어서,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자 틈틈이 제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문서사역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준비된 일인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생활이 궁핍하여 어머니는 늘 바깥에서 장사를 하시거나 가게를 보셔야 했는데, 그런 힘든 생활 중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늘 “얘야,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가 없단다.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인지 모른다”라고 신앙고백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늘 성경을 읽으셨고, 제게 “성경 말씀이 꿀보다, 꿀 송이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말씀이 진짜란다. 네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크면 그 맛을 알아야 한다”라고 어린 제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힘든 생활 중에도 교회에서 교사로 성가대 반주자로 성실하게 활동하셨고, 모든 생활에서 귀한 신앙적인 모범을 보여주시다가, 제가 대학 3학년이던 1975년,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소천하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늘 설교를 들으며 자라갔으나, 신앙에 대해 항상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1973년 총신대학 신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선배 신학생들에게서 받은 실망 등 여러 가지 이유로 4년 내내 영적 방황의 길을 걸었습니다.

1977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공군장교에 지원하여 5년 동안 전투요격관제사로 근무하면서 불신자들의 생활 모습을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접하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제 앞날을 생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이 평생 그렇게 바라시던 대로 제가 목사가 되어야 한다면, 제게 바른 신앙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래서 강단에서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도록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인생을 설계해보지 않았었습니다. 신학공부가 그저 당연한 저의 임무라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상당한 영적인 회의가 있었고 영적 방황과 갈등이 너무나 컸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풀리지 않는 갈등과 고뇌가 있었습니다.

▲ 원광연 목사의 대표 역서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전 3권). 원 목사는 29년 동안 60여 종의 기독교 서적을 출간(번역)했다.     ©크리스찬리뷰


결국 호주로 오기로 결정하였고, 호주 장로회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비로소 서서히 구원과 신앙과 관련된 수많은 의문과 문제 거리들을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신학 공부 과정을 통해서 회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지금의 이 강좌를 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 바로 저 자신이 가졌던 신앙적인 의문과 회의에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번역 사역


- 호주에 상당히 일찍 오셨는데, 특별히 오신 계기와 그동안의 사역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국에서 신학교 재학 중이던 1982년 말, 현재 성서원의 전신인 성서교재간행사에서 <오픈성경>을 발간할 계획을 세웠는데, 신학교를 1년 휴학하고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뉴톰슨 주석 성경>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간의 번역 사역과는 달리 성경을 직접 상세히 공부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교회에서 배웠던 내용들에 대해, 온갖 의문이 생겼습니다.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보니, 과거에 제가 배우고 믿어온 내용들 중에 성경본문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의문점이 더욱 커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외국에 가서 직접 공부를 하면서, 내게 있는 갖가지 의문점들을 해결해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호주로 인도하셔서, 1987년 12월에 시드니로 왔고, 그 이듬해인 1988년부터 호

처음 신학교 입학을 위해 면접할 때에 당시 학장이시던 존 데이비스 교수님께 제 의도를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학교 졸업이 목표가 아니라 제 속에 있는 영적인 문제의 해결이 목표입니다. 허락해 주셔서 시간을 주시면 제가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면서 이 목표를 이루고 싶다고 했지요.

다행히 학장님께서 허락해 주셨고, 그 후 4년 동안 학교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늘 영어 원서와 함께 생활했었기 때문에, 언어 장벽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장서들을 모두 내 책처럼 여기고 직접 찾아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바른 신앙, 성경이 가르쳐주는 참된 신앙의 정체를 깨닫고 알고자 하는 열정이 동력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무렵, 학장님의 권유로 개척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비크로프트 장로교회를 소개해 주어 그곳에서 ‘성도장로교회’를 개척하였고, 호주 장로교단의 목사후보생으로 인허되었습니다. 졸업 후 1992년 12월 호주장로교회 시드니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성도장로교회 시절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바른 복음을 교민사회에 알리기 위해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부정기 신앙잡지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한샘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그 동안 문서사역을 계속 병행하였습니다. 그리고 2005년 1월부터 시드니영락교회의 사역에 협력목사로 합류하여, 2010년까지 청년부와 영어예배를 담당하였고, 현재는 영어예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적인 바른 신앙의 전파를 위하여 고심하던 중, 2007년-2008년에 근 1년 동안 한국에서 <생명나무>라는 월간 큐티 잡지를 발행하였는데, 매일 성경 묵상 부분을 존 칼빈 등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의 해설을 발췌 번역하여 실어서, 독자로 하여금 심도 있는 말씀 묵상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주요 특징이었습니다.” 〠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고석호|새빛장로교회 안수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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