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조 목사 소천…이명박 대통령 등 교계 및 각계각층 인사들 조문

“선교가 없다면 온누리교회도 없습니다”

전정희/교회와신앙 | 입력 : 2011/08/04 [15:05]
   

7월 31일 주일, 그의 마지막 설교제목은 “변화산에서 생긴 일”(막 9:2~13)이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얼굴이 변모돼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게 어떤 모양인지 모르죠.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성경 저자는 이렇게 표현을 한거에요. 아마 이게 천국의 의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영적인 세계에 입고 다니는 옷이 아니었을까?”

불과 몇 일만에 故 하용조 목사는 궁금해 하던 천국의 의상을 직접 입고 있을 것이다. 지난 8월 2일 오전 8시 40분 소천했기 때문이다. 향년 65세였다. 하루 전인 1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진 하 목사는 곧바로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임종을 지켜본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는 “사랑하는 친구 하용조 목사님이 마지막 영원으로 떠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킬 수 있어 감사했다”며 “그는 정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은 “하 목사는 온누리교회를 개척해 문서선교와 해외선교, 청년사역 등으로 한국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며 “7전8기의 암 투병 속에서도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 열정의 자취는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빈소인 온누리교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故 하용조 목사는 1946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건국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7년간 활동하다 1972년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20대에 앓았던 폐결핵에서부터 간암으로 이어진 간염과 간경화, 그리고 일주일에 3번씩 신장투석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신부전증 등으로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 목사는 지금껏 묵묵히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선교가 없다면 온누리교회도 없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서울 온누리교회의 벽면에 있는 대형포스터 슬로건이다. 이 표어가 평생 하 목사가 걸어온 목회철학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고인은 “청년을 통한 제2의 선교한국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차세대 사역에 남다른 의지를 나타냈었다.

1985년 서울 한남동 한국기독교선교원에서 12가정이 모여 기도한 것을 모태로 시작된 온누리교회는 현재 서울 서빙고동 성전을 비롯해 양재·부천·수원·대전 등 전국 9개 성전과 4개 기도처, 25개 비전교회가 있다. 세계 59개국에 1천 15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출석 교인 수는 7만5천여 명이다.

故 하용조 목사가 1980년 12월 시작한 두란노서원 출판사역은 현재까지 2천200여 종의 단행본을 1천700여 만 권 발간했고, <생명의삶>, <빛과소금>, <목회와신학> 등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일대일 제자양육, 큐티, 아버지학교와 같은 프로그램은 전 세계 교회는 물론 학교, 기업체, 교도소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며, 2005년 3월 개국한 선교전문 위성방송 CGN TV는 현재 5개의 위성과 8개의 위성빔을 사용해 전 세계 8개 권역 174개국에 송출하고 있다.

고인은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부회장,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총장, 두란노서원 원장, 신동아학원 이사장, CGNTV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다>, <나는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 <광야의 삶은 축복이다>, <예수님은 능력입니다>, <기도하면 행복해집니다>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 이형기 사모와 슬하에 성석, 성지 등 1남 1녀가 있으며, 장지는 강원도 문막 온누리동산이다.  
 

 
 
 
 
 
   
 
 
   
 
 
   
 
 
   
출처ㅣ전정희/교회와신앙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