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경계 목회자료-구원파에 대한 설교

교회와신앙 | 입력 : 2011/08/18 [13:33]
예장 합동(총회장 최병남 목사)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연구위원회(이대위, 위원장 박호근 목사)가 지난 8월 2일 전체회의를 열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10여개 교단이 매년 9월 첫 주를 ‘이단경계주일’로 함께 지키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가 실시하는 ‘이단경계주일’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는 듯합니다. 매년 8월 첫째 주일은 예장 통합측이, 매년 9월 첫째 주일은 10여 개 교단들이 함께 지키는 ‘이단경계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예장 통합측(총회장 김정서 목사) 이대위(위원장 유한귀 목사)가 <이단경계주일을 위한 목회자료집>을 배포했다는 본 사이트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의 보도를 접한 여러 목회자들이 “자료집에 나오는 설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해오셨습니다. 이에 통합측 이대위의 허락을 받아 이단경계설교 전문 5편을 하나씩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구원파가 간과한 진리
이단경계주일 목회자료집-구원파에 대한 설교(딤전 1:15, 마 7:13~27)


최태영 목사 / 예장 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박옥수 씨와 그가 중심이 된 기쁜소식선교회는 신구원파로 불려지는데, 비교적 역사가 깊은 권신찬 계열을 구원파라고 할 때 역사가 짧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박옥수 씨는 권신찬과 딕욕이란 선교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주로 ‘기쁜소식선교회’ 및 ‘IYF’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옥수파나 권신찬파나 이요한파는 모두 구원파에 속하는데, 그 주장하는 바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원 문제에 집중적 관심을 기울이므로 구원파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구원파 중에서 박옥수 씨는 비교적 지성적인 사람으로 설교에 있어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어 따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기성교인들 가운데도 그의 설교에 감화를 입어 추종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과 또 다른 저서들, 강연들을 통하여 자기의 신학을 전파하고 있는데, 이 책들의 내용은 일반 성도들로서는 그 이단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상당히 성경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옥수파는 이단 중에서는
비교적 지성적인 이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옥수 씨가 주장하는 바는 상당 부분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나름대로 성경 연구를 열심히 하였고, 구원론 특히 칭의론을 매우 쉽게 잘 가르치는 장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교회 목회자들도 도전을 받을만합니다. 현대의 교회가 설교나 교리공부시간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소극적인 데 비해, 박옥수파는 구원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서 구원 의 진리에 관한 한 교인들로 하여금 일가견을 갖추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 면은 매우 좋은 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데도 있지만 확실히 비성경적인 면이 동시에 있고, 그 비성경적인 면은 구원교리 및 신앙생활 전반에 현저한 낭패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주의하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박옥수파의 어떤 가르침이 문제입니까?

1. 구원파의 첫 번째 오류는 구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자기들만 알고 일반 교회는 모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소위 정통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목회자들이 구원교리를 잘 모르거나 잘못 가르친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기 교회와 목회자들을 불신하여 교회로부터 떠나기 쉽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자기들만 알고 정통성을 가진 보편 교회는 모르고 있다는 생각 자체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집단으로 생각함으로써 보편 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이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집단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교회를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개신교의 역사적 뿌리인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무엇인가를 생각만 해도 이들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진리, 특히 구원의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믿음으로써 기독교를 바른 구원의 진리 가운데 세우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에서 나온 중요한 명제들이 바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구원의 진리가 오직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는 운동이었으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알고, 모든 업적주의와 행위구원사상을 배격하였습니다. 종교개혁운동 곧 개신교운동은 성경적 바른 구원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교리는 종교개혁 사상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구원파도 이 종교개혁운동으로 말미암은 개신교에 속하는 집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구원론에 근거하고 있는 교회에 구원의 진리가 없고, 오직 자기들만이 성경적인 구원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훼손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혹시 현대의 많은 개신교가 종교개혁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 구원론을 소개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해야만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바른 구원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구원파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일부의 진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온전하고 바른 교리에서 벗어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적 인 구원의 진리를 50%만 알고 그것만 주장하면서 교회를 잘못되었다고 비판 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원파가 바로 알고 가르치는 50%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3대 구호 속에 들어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오직 은혜와 믿음을 가르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바른 가르침입니다.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기본적인 구원교리를 등한히 하는 것은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이점에 관한 한 구원파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파를 쓰셔서 구원의 기본교리를 등한히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회개 시키고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나머지 50%를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2. 구원파의 두 번째 오류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죄용서 받고 의인이 되므로 다시는 죄인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한 번 회개할 뿐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이 자꾸 회개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죄인인 이상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것이 구원파 교리의 결정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파는 회개의 개념을 50% 만 알고 있습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하나는 단회적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적 회개입니다. 구원파는 단회적 회개만 알고 계속적 회개 개념은 모르고 있습니다.

단회적 회개란 죄인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을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죄짓는 대로 향하던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이런 의미의 회심이고 회개입니다. 이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죄에 속했던 자가 하나님께로 속하게 되는 것, 곧 주민등록을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여 더 이상 죄를 안 짓게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짓는 본능이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하여 죄를 짓는 생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성장 하면서 죄짓는 질과 양이 점점 줄어들겠지만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죽을 때까지 불가능합니다. 이사를 가더라도 옛날에 살던 동네가 그리워서 가끔씩 놀러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원하지 않는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에 죄라는 때가 끼었으므로 회개하여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를 위한 계속적 회개라고 합니다. 이런 회개는 일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를 회심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일생에 단 한 번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상 그들의 회개 개념은 보편적인 회개 개념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회개 개념은 구체적으로 범한 죄들을 회개하 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회개라고 가르칩니다. 자세히 말하면 회개에는 3단계가 있는 셈입니다. 첫 단계는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 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는데,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박옥수 씨가 가르치는 회개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은 칭의론적으로 맞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박옥수 씨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법적으로는 의인이 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신분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주장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죄를 구체적으로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구체적으로 범죄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박옥수 씨의 처방이 없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께서 단번에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으니 “나에게는 죄가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의인이다.”라고 계속 주장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의 회중들에게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우리는 의인이라고 하면서 소위 기쁜소식을 전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니까, 혹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죄지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죄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를 못합니다. 우리도 죄를 짓는다고는 말하지만 그것에 대한 분명한 대책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문제이고 구원파의 오류인 것입니다.

구원파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대목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주기도문이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는 필 요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예수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는데, 지금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죄 용서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짓기 전에 우리가 지을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이미 용서받은 죄를 우리가 짓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죄를 짓고도 용서를 구할 마음을 가지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죄를 지으면서도 내 죄는 진작 다 용서되었으니까, 죄인으로서의 마음, 겸손히 낮추는 마음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는 의인이요라고 주장하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의식을 부인하면 된다는 격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주장입니까?

정통성 있는 교회와 구원파의 교리적 차이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용서받은 죄인, 곧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지만 그러나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항상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옳습니까? 믿은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계속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항상 의인으로서의 태도를 가지고 일절 용서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습니까? 이것을 판단하는 데에는 단 한 가지 질문으로 충분합니다. 곧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도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정답은 전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의인으로 여겨 주시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 곧 디모데전서 1:15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서 괴수니라라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괴수였지만 지금은 개가천선하여 의인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여전히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는 사도 바울의 일생 중에서 성숙한 말년이었습니다.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되는데, 하나는 사도 바울 같은 성자까지도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만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누구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격이 성숙하면 할수록 자기 죄에 대 하여 민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같은 분이 죄인이라면 누가 죄인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구원파 사람들은 자기들은 더 이상 죄인이라고 의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들은 그 구절의 현재형은 역사적 현재용법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한 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스스로 부정하는 오류를 더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12). 예수를 믿으므로 이젠 됐다고 안심하지 말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죄와 무관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한 해석입니다. 사람이 죄짓지 않고 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도 죄에서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파 처럼 자기는 죄와는 무관한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단 기분은 좋을지 모르나 뒷감당이 안 되는 억지일 뿐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오류이고 실제적인 삶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구원파의 세 번째 오류는 그들의 교리대로 살면 죄에 무감각해지고 성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칭의론에 근거하여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임을 주장함으로써 구체적인 죄를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니 당연히 회개를 할 수가 없고, 이와 같은 교묘한 변명으로 인하여 결국 구체적인 범죄를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이고, 날이 갈수록 점점 죄는 쌓이게 되고, 죄에 대해 감각이 없어지고, 이러니 성화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있지, 온갖 회개하지 않은 죄가 가득한 그들의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그 길은 필경 사망의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 하는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곧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구원의 길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어쩌다가 은혜로 선택을 받았으니 이젠 안심이다, 나는 구원의 로또에 당첨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 개신교의 문제인데, 구원파는 더욱더 쉬운 것으로 가르칩니다. 구원은 너무 쉬운 것, 나는 이미 얻었으니까, 이제는 놀러 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는 됐다 하고 방심하는 순간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다음,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틀림없는 자라고 여김 받는 자 중에서 몇 종류의 사람들을 지목하며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능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낸 사람들, 곧 유명한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하시며, 천국의 문을 열어 주지 않으신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고, 교회의 집사이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나아가서 교회의 목사이기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를 이미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요약 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보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나무 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고, 나쁜 나무는 아닌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좋은 열매는 선행을 가리키고, 나쁜 열매는 악행, 불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곧 구원을 얻는 것은 좋은 나무여야 합니 다. 그런데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 선행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그가 구원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그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말로써 구별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좋은 나무라고 주장해도 그렇게 말로만은 안 됩니다. 불법을 행하는 선지자들처럼 자기가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주장해도, 그 말로써 그가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가 하는 행실이 보여 줍니다. 그가 선행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거짓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신자라 하면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종교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살펴봅시다. 루터와 칼빈은 이신칭의론, 곧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구원파도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개혁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칭의, 곧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지 신자들이 실제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고 여기시지만 그들이 실제로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의로워지는 성화는 칭의의 순간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어서 영화로워질 때까지 계속 이루어가야 할 과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형용사이지만 죄인은 명사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의롭다고 여김 받더라도 죄인은 죄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죄인은 죄인입 니다. 다만 죄용서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바로 이 그리 스도인의 상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과 구원파의 인간론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개혁자들과 정통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본질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자로 봅니다. 그러므로 아직 죄인인 그리스도인은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부응하기 위해 참으로 의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는 주장만 강조함으로 써 죄인으로서의 본질에 눈을 감고 구체적인 회개와 의로워지고자 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탄식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 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자기 속에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서로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실존을 잘 말해 줍니다. 우리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신자처럼 죄만 짓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순간순간 선택하며 사는, 의롭다고 인정된 죄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 고, 그때는 완전히 의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한,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점점 성화되어 갈수록, 죄를 점점 더 적게 짓게 되겠지만, 불꽃같은 주님의 눈앞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히 무관한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많든 적든 죄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삽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의 실존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회개하면서 살아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죄를 지으면서도 나는 죄와는 상관없는 의인이다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죄로 인식 안 하고, 따라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용서받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사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죄에 마비된 양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삶은 점점 더 죄를 쌓아 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신앙양심이 마비된 가운데 죄를 점점 쌓아가는 삶을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구원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죄에 대하여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도 큰 죄로 여기는 사람과 큰 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때 누가 더 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죄도 큰 죄 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작은 죄도 크게 보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점점 더 성화시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출처ㅣ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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