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존 스토트를 추모하며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8/29 [10:43]

영국 복음주의 거장 존 스토트 목사 별세

성경적 복음과 사회참여의 균형 강조

복음주의 팽창 속에 본질상실 걱정

 
▲ 존 스토트 목사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목사(Rev. John Robert Walmsley Stott)가 지난 7월 27일 영국 링필드의 센바너바스 칼리지 숙소에서 90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존 스토트 목사는 도심목회의 역동적 모델을 제시한 목회자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복음주의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였고, 복음주의의 자폐성을 극복하기 위한 ‘양쪽 듣기’(do-uble listening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와 복음 양쪽에 귀를 열어야 한다는 표현)로 성경적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예언자였고, BST(Bible Speaks Today)시리즈 주석 8권을 비롯 총 48권의 신학서적을 저술하여 동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성경과 지성을 어떻게 조화하는 지를 보여준 학자이기도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하나님께 헌신

이밖에도 국제기독학생협회(IFES)회장, 영국궁정목사, 사회적, 지적 균형을 가진 기독교지도자를 키우는 ‘현대기독교를 위한 런던학교’(London 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 제3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돕는 ‘랭험협력 국제재단’(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등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특히 랭험재단은 자신의 저작권비로 삼세계 목회자들의 교육을 돕는 복음으로 사회참여를 도모한 활동이었는데, 동시에 이것은 평생을 독신으로 하나님께만 헌신한 그의 일생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모습이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의 존 스토트 목사는 영국 최고사립학교인 럭비스쿨에서 내쉬 목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이 사건은 점진적인 회심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캠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언어학부를 졸업한 뒤 일반적으로 가게되는 학자와 외교관의 길을 포기하고, 리들리홀 신학교에서 목회과정을 밟아 영국 성공회 목사가 된다.

1945년 안수를 받고, 5년간 부목과정을 거쳐 1950년부터 런던 랭험팔레스에 위치한 올소울즈교회를 담임한다. 지금은 런던을 찾는 신앙인들에겐 순례지처럼 되버린 올소울즈교회지만, 당시 그를 기다리던 목회현장은 그리 유망한 곳은 아니었다. 교회는 환락가인 소호지구와 주말에는 텅 비는 금융가 사이에 자리했다. 한쪽에서 신앙을 등진 환락의 문화, 다른 한쪽에서는 영국상류층의 명목적 신앙문화 사이에서 사역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쾌하고 지적이며, 분기별로 사전 공고된 계획에 따라 이뤄지는 체계적인 강해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주중 정기 전도훈련과 불신자들의 까다로운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지한 토론이 계속된 새신자초청예배, 당시 런던대학에 몰려들던 수많은 유학생들을 포함한 학생사역, 새신자를 위한 가정제자훈련, 직장인을 위한 주중점심예배, 주변 상가를 위한 전문사목임명, 주일학교의 활성화 등, 당시로선 혁신적인 목회전략으로 주변의 걱정을 잠재우고, 올소울즈교회를 전 세계를 향해 사역후보생들을 파송하는 교회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당시 영국을 휩쓸던 은사주의의 영향이 자신의 교회에 닥쳐왔을 때는, 이와 분명한 거리를 둠으로써 영국 복음주의의 지적편향을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는 체험보다는 성경과의 진지한 씨름이 중심된 신앙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졌던 그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교회 성장 운동에는 상당히 비판적

그의 목회적 성공은 영국성공회 고위직으로 향하는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영국 성공회 주교직은 교회차원의 권한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권한까지 행사하는 의회 의원의 자격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스토트 목사는 대신 지역교회와 청년훈련, 그리고 성서유니온 같은 풀뿌리 복음주의 단체의 부흥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19세기 이후로 쇠퇴기에 있었던 영국 성공회 내 복음주의 운동을 부활시키기 위해, 영국성공회 복음주의연맹을 창설해 후배들을 이끌었고, 로이드 존스, 패커 목사와 함께 영국 내 개혁주의적인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급진보다는 점진,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선호했다. 1966년 영국복음주의자 전국회의에서 영국 주요교단들에 속한 복음주의자들에 교단을 탈퇴해 새로운 복음주의교단을 만들자는 로이든 존스 목사의 호소 앞에, 당시 의회장을 맡았던 스토트 목사는 그답게 완곡하게 거부의사를 밝히고 성공회 내부에서의 개혁을 계속해 나갔다.

스토트 목사는 1970년 올소울즈교회에서 은퇴한 뒤, 보다 적극적으로 신학저서 저술과 집회 활동에 나섰다. 그는 빌리그래함과 함께 1974년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회의’에서 복음주의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로쟌선언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그동안 지적으로 폐쇄적이고 사회와 거리를 두던 복음주의 주류로 하여금 외연을 넓혀가도록 인도한 파라다임의 변화를 이끈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영어권 각지역에 ‘랭험파트너쉽(전 존스트토 미니스트리)’를 조직하여 제3세계 목회자들의 박사학업을 지원하고, 신학서적을 기증하는 사역을 해왔다.

의 관점에서는 전세계적인 복음주의운동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양적 팽창에 급급한 나머지 지도자의 지적 내실이 무시되는 위험을 우려했다. 이점에서 그는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교회에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운동에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의외로 열성적인 조류 관찰자이기도 했던 존 스토트는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목회자로 자부하며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역과 결혼한 사람처럼 살았던 이 정력적인 신학자를 통해, 영어권 복음주의는 십자가를 사역 중심에 세우고, 체계적인 강해설교의 능력을 다시 깨달았다. 자신부터 대형교회를 추구하기보다는 사람을 키워 보내는 사역에 집중했던 스토트는, 특히 기독학생세계에 보다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균형 잡힌 지도자들을 키워내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신학과 사역 이면에는 그의 내적 성숙, 삶의 모습이 자리한다. 그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대목은 그의 개인 연구 조교로 그를 볼 수 있었던 존 야트가 스토트의 80세 생일을 맞이해 쓴 글에서 발견된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세 단어로 표현된다. 겸손함, 기도의 생활화 그리고 일과 휴식의 균형이 바로 그것들이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시작된 그의 일과는 가죽으로 된 기도노트에 적힌 중보뿐 아니라, 항상 성령의 열매를 자신 안에서 맺기 갈망하는 염원을 담은 기도로 시작됐다. 매일 세 장씩 성경을 읽는 어릴 적 버릇을 놓치 않고, 항상 기도의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또한 세계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자신을 방문한 이들에게 직접 차를 타 대접하고, 식사마다 직접 설거지하고, 제자들의 편지에 손수 답장을 써주고, 주일마다 만나는 성도들과 대화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주변의 새를 관찰하는 즐거움을 기쁨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이런 소박하면서도 겸손한 삶의 자세와 기도가 그의 성경적 진리에 대한 확신이 평생 일관성있게 표현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이름으로 외형적 확장과 성경적 계시의 경계를 자주 무시하는 무분별한 영성운동, 그리고 사회마저 등을 돌릴만한 교회 내 여러 부조리와 불합리 속에 씨름하는 한국교회에게 이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신앙적 표현만을 사용한다면 참다운 십자가의 의미를 잃어버린 탓은 아닌지? 생전에 존 스토트를 만났던 한인 유학생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그는 한국교회가 진정한 성경중심적 신앙과 건강한 사회적 책임을 회복한 진정한 부흥을 이루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랄 것이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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