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Petra)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8/29 [10:45]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나는 천사에게 ‘페트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합에서 시내산으로 가는 길에 몇 번의 검문이 있었다. 총을 맨 이집트 군인이 버스 안으로 올라와 신분을 확인하였다.  버스 안에는 나 말고 한국인이 한 명 더 타고 있었다. 이야기 중에 그녀가 전도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베트남 한인 교회의 초청을 받아 사이공에서 수년간 사역했다. 베트남 사역을 마치고 다음 사역지로 가기 전, 시간을 내어 성지순례를 하는 중이었다. 배낭 맨 그녀는 나와 정반대의 코스를 밟고 있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순례를 마치고 요르단을 거쳐 시내산까지 왔다. 다음 목적지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고, 요르단의 ‘페트라’를 꼭 들렸다 가라고 했다.

그녀는 며칠 전에 갔다 온 페트라의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페트라를 방문하지 않으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집트 행 비행기를 탔던 것처럼, 천사의 간곡한(?) 권유에 힘입어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방향키를 돌렸다.

▲ 페트라 입구     ©김환기


요르단 (Jordan) 

20세기 초까지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 이곳을 1차 대전에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 이후 무너지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였다.

1923년 영국은 요르단 강 동안 지역을 서안의 팔레스타인과 분리, 위임 통치국 ‘트란스요르단’으로 정하고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를 왕으로 세웠다. 압둘라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유명한 아랍 군단(軍團)을 설립하여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영국과 협정을 거듭하여 단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 1945년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1946년 5월 ‘트란스 요르단 하심왕국’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과 싸워, 다른 아랍 국가의 반대를 물리치고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병합, 1949년에 국명을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하고, 1967년 6일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강 서안과 예루살렘의 반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 후 요단강과 사해를 둘러싼 국경 분쟁은1994년 10월 경제 장벽을 없애고 안전과 수자원을 공유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 평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1979년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평화 조약을 맺은 후 아랍국가로서 처음 있는 일이다. 

▲ 요르단국기와 멀리 대신전이 보인다.     ©김환기


 페트라 (Petra) 

‘페트라’(Petra)를 가려면 ‘다합’(Dahab)에서 ‘타바’(Taba)항으로 가서, ‘아카바’(Agaba) 만을 건너 요르단의 ‘아카바’(Agaba) 항구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페트라’(Petra)로 가야한다.

‘타바’에서 검열 관계로 출발 시간이 2시간이나 지연되었다. 배 안의 요르단 이민관들이 입국 허가 도장을 찍어 주었다. 배 안에서 미국인 여행객과 일본인 청년을 만났다. 미국인은 카지노를 경영한다고 한다. 일본 청년은 온몸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페트라’까지 택시를 타기로 했다.  세 사람이 나누어 내면 버스 값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카바 항구’에서 페트라까지는 약 2시간 걸렸다.  요르단에 와서 놀란 것은 엄청난 물가이다. 요르단의 1 JD(Jordan Dollar)가 미화 1.3 정도 된다.  페트라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큰 미국친구는 호텔로 가고, 나는 돈 없고 못생긴 일본 청년과 배낭객들이 즐겨 찾는 ‘발렌타인인’(Valentine Inn)으로 갔다.       

페트라는 지역이 방대하여 2박 3일 지내야만 다 볼 수 있다. 하루에 끝낼 욕심으로 새벽같이 일본 친구와 함께 집을 나섰다. 벌써 매표소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시크’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 협곡을 통과하면 바위를 깎아서 만든 너비 30미터, 높이 43미터의 ‘알 카즈네’가 기다리고 있다. 

‘알 카즈네’는 ‘보물창고’란 뜻으로 페트라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보존된 건물이다. 하지만 ‘보물 창고’ 안에는 ‘보물’이 없었다.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 커피’가 없고, 이태리 가면 ‘이태리 타올’이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과 같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바위 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여 살았다. 

페트라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무역의 도시였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었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였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왕하 14:7,사 16:1, 42:11)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이고 페트라는 헬라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신약에서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Peter)의 이름은 헬라어 ‘페트라’에서 온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자, 베드로는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기뻐하며 18절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가톨릭에서는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겠다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 된 곳이다.  그러나 헬라어로 베드로는 Petro로서 남성이고, 바위인 Petra는 여성이다.  설마 주께서 여성와 남성을 혼돈하여 쓰셨겠는가! 주께서 교회를 베드로 위가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신다는 뜻이다. 교회는 바로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이다.

바위 길을 지나고, 바위산을 넘어 페트라에서 ‘알카즈네’ 다음으로 유명한 ‘대 신전’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아론의 무덤이 있는 ‘호르산’이 보인다.  현지 지명으로는 '아론의 산' 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 이라 불린다. 아론을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서는 ‘하룬’으로 부른다. 산꼭대기의 아론 무덤에는 비잔틴 시대에는 돔형의 건물과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스크 건물만 남아 있다.

‘페트라’에서 수도인 ‘암만’까지 버스를 타고, 암만에서 국경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숙소를 출발한지 5분 정도 되었을까!  불현듯 ‘여행노트’를 숙소에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버스 기사에게 말을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라 버스를 돌릴 수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여행 기록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젯밤 글을 쓰고 침대 옆에 놓고 잤다.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미처 노트를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내려서 다음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모든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모슬렘 국가인 요르단의 성일은 금요일, 이스라엘의 성일은 토요일이다. 내가 차를 탄 시간은 금요일 새벽이다.  금요일 오후에는 요르단이 국경을 차단하고, 토요일에는 이스라엘이 국경을 차단한다. 만약 시간 내에 국경을 넘지 못하면 나는 요르단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야만 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여행 노트를 포기해야만 했다. 요르단 국경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었다. 안내 책자에는 요르단 국경 검문소는 2시에 닫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입구 안내 표지판을 보니 12시에 문을 닫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요르단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킹 후세인’(King Hussein)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할렐루야 … 〠

 

김환기|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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