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들의 친구, 허유신 선교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9/26 [14:46]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원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섬기는 한국인이 있다. 허유신 선교사다. 퍼스 시내에서 자동차로 40분을 달리면 칼라 카바딘이라는 원주민 마을이 나온다. 그곳이 허유신 선교사의 삶의 터전이요, 목회지요, 선교 현장이다.

허유신 선교사가 칼라 카바딘에 온지는 벌써 11년이나 되었건만 한인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인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원주민 마을로 들어간 까닭이다. 오늘도 그는 원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허유신은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형제가 되었다.

▲ 원주민과 함께 어울려 살아 가고 있는 허유신 선교사는 “원주민 선교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라고 강조한다     ©크리스찬리뷰


윤택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던 과거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난 허유신 선교사는 대부분의 목회자 가정이 그렇듯이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행복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래서 청소년 때에 이미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는 본래 마라톤 선수였다. 그래서 마라톤으로 성공하기 위해 하루에 40km씩 달리고 또 달렸다. 다른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로지 윤택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서 달렸다. 그는 마라톤에 재능도 있었고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와 함께 운동을 했던 유망주였다.

그러나 과욕이 화를 불렀다. 하루 빨리 성공하고픈 욕심에 너무 운동을 많이해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병을 얻어 6개월간 운동을 쉬게 되었다. 결국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극심한 실망 속에 방황을 하게 되었다. 

 
호주로의 유학 그리고 소명

운동을 그만두고 주변의 강압적인 권유로 서울신학교에 들어가 신학도의 길을 걸으면서 사역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변의 강요 때문에 시작한 사역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고 윤택한 삶에 대한 목표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호주로의 유학이었다. 순전히 윤택한 삶을 위해서였다.

호주 유학 중에 우연히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조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위해 전 생애를 던진 닥터 홀의 삶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하나님 앞에 참회가 이어졌고 ‘한번뿐인 인생인데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허 선교사의 눈에 밤마다 시티에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는 원주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원주민들을 보며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 저들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원주민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 허유신 선교사가 퍼스에서 펼치고 있는 원주민 선교 현장     ©허유신


 
키보드 들고 원주민 속으로 

원주민 선교에 대한 소명을 확인한 허유신 선교사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한 손에 키보드를 들고 곧장 원주민 마을인 칼라 카바딘으로 들어갔다. 본래부터 어린이 사역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원주민 어린이들에게 키보드를 가르치며 사역의 첫발을 내딛었다. 커뮤니티 홀을 빌려서 본격적으로 주일학교를 열었고 키보드 교습을 병행하며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려고 했다.

칼라 카바딘은 원주민 30가구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원주민 마을이다. 그 마을에는 특히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아이들이 아니었다. 10살 밖에 안된 아이가 줄담배를 피워대고 본드, 페인트, 마약 등의 환각에 빠져 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거칠다.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이 일어나고 병을 깨고 유리를 부수는 일이 다반사다. 거리에는 유리조각이 난무한 것은 일상이 되었고 맨발로 다니다 유리 조각에 발을 다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허유신 선교사가 시작한 일이 거리에 뿌려진  유리조각을 치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혼자 거리를 청소한지 3년이 지나서야 효과가 나타날 정도로 유리 조각이 널려 있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커뮤니티 홀을 빌려 교회를 개척해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됐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원주민들이 몰려왔다. 교회에서 점심을 준다는 소문이 나자 또 몰려왔다. 교회에 아이들도 들어오고 노인들도 들어오고 심지어 개들도 들어왔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토요일 밤늦게 음주를 한 터라 정신이 맑지 못해서 교회 안에서도 툭하면 싸우고 다투기 일쑤였다. 그래서 경찰이 교회를 찾는 경우도 허다했다. 예배는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허유신 선교사를 중국인이라고 놀리며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기도 했다. 발로 채이는 일은 다반사였다고, 심지어 선교사 자녀들도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허유신 선교사는 원주민을 돕기 위해 법정에도 가고, 감옥으로 면회도 가고, 판사에게 붙들린 원주민을 위한 선처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과 관계성이 세워져 갔다. 그렇게 허유신 선교사는 험난한 과정 중에 그들과 친구가 되어 갔다.

 
부흥하는 원주민 교회

허유신 선교사는 흔들림이 없는 헌신과 사역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세례도 베풀었다. 1996년에 처음으로 원주민 9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듬 해에는 17명으로 늘었다. 3년이 지나자 그 마을의 50%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 교회는 빠르게 부흥되기 시작했고 아웃리치까지 나가게 되었다.

어느덧 이웃 원주민 마을에도 허유신 선교사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퍼스에서 2시간 30분 떨어진 네로진이란 마을에서는 아예 허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된 사역이 네로진 사역이다. 허 선교사는 매 주일 칼라 카바딘에서 예배를 마친 후 네로진을 향해 달려간다. 그곳에도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방학 때가 되면 네로진에 내려가 어린이 성경학교를 열었고, 결혼 사역도 진행했다. 건강한 원주민 가정을 세우기 위해 허 선교사가 시작한 것이 결혼 사역이었다. 예식장, 주례, 피로연까지 전부 허 선교사가 준비를 하고 신랑과 신부는 예복만 입고 오면 되었다.

허 선교사가 결혼 사역을 시작한 것은 원주민 가정 교회에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 가정은 상처투성이다. 집들마다 유리창은 깨져 있고 조명도 다 부서져 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폭력이 난무하는 비디오 영상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도 원주민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허 선교사는 가정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집집마다 심방을 가서 기도해주고 말씀을 전했다.

상처뿐인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었다. 그렇게 한 가정씩 섬기다 보니, 이제는 서로 자기 집에 와달라는 요청이 밀려온다. 가정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선교는 삶이다

원주민 선교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 친구가 되어갈 때 사역도 예배도 살아나게 된다.” 그래서 허 선교사는 오늘도 원주민들과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허 선교사는 “원주민 선교는 호주인들은 할 수 없다”며 “한인들이 앞장서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늘 넓은 길을 원했던 허유신 선교사 그는 지금 좁은 길을 가고 있다. 늘 윤택한 삶을 원했지만 지금 그는 가장 낮고 험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허유신 선교사의 삶을 통해 마약과 폭력이 가득했던 원주민 마을이 사랑과 복음으로 변화되고 있다.

같은 호주땅에 살고 있는 한인교회와 성도들이 더 많은 관심과 후원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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