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도는 힘이 있었다

글|송기태,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9/26 [14:53]
경악, 충격

이윤진 선교사, 그는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인 이명박 장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막내 여동생이다. 그 대통령은 기업가 출신으로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서울시장 재직시절엔 월급을 한 푼도 안가져 가고 몽땅 어느 재단에 기부할 정도로 돈에 아쉬운 집안이 아니다. 선교사의 부군 역시 기업가 출신이다.

▲ 이명박 대통령의 막내 여동생 이윤진 선교사가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대통령을 낳은 어머니의 신앙을 말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런데 호주에서 이 선교사 일행이 체류한 민박집은 참으로 소박하다 못해 충격 그 자체였다. 대문 입구부터 칠이 벗겨진 데다 문을 여니 카펫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게다가 인터뷰할 만한 공간도 하나 없었다. 이른바 ‘선교사 체질’이라 그런 집에 유숙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열악한 제3세계 선교사들의 생활공간도 이보다 낫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소박한’ 공간을 벗어나 가까운 교회로 옮겼다. 이번 인터뷰는 ‘대통령을 낳은 어머니의 신앙’을 중심으로 풀어가기로 했다.

“어머니에게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장사하시고 아무리 늦게 오셔도 한숨 주무시고 나면 반드시 기도를 하셨어요. 우리는 그 기도소리에 따라 깨어나 따라서 기도하다가 졸기도 자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라를 위해, 목회자를 위해, 거주 지역을 위해 기도하시고, 고아들,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신 다음 맨 마지막으로 자녀 5남매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형제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시다가 네 번째 이명박 대통령 올 때는 이름을 부르다가 안부르다가 제 이름은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마지막 순서에 자리 잡은 이유로 무척이나 짧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내용은 항상 ‘저는 가난하고 무식하고 연약하고 정말 아무 것도 없고, 제게 맡겨주신 5남매에게 해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뜻대로 되게 해주십시오’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겐 ‘너희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 예수님만 잘 믿으면 아무 염려하지 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열심히 일하셨고, 열심히 사셨습니다. 저하고 비교하면 일주일 사는 것이 어머니는 하루만에 사시는 것처럼 열심히 땀 흘리며 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응답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형제들은 80, 90이 다 되어가도 한가한 적이 없었고, 또 우애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제일 먼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두 번째 교회와 담임목사를 위해서, 세 번째 이웃을 위해서 특히 동네 유지인, 중고등학교 교장, 국회의원 부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나는 가난하고 돈이 못배웠기 때문에 많이 배운 사람이 그래도 하나님 앞에 큰 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마음으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위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전했다.

 
4대 기독교 집안 

그 어머니가 바로 대구 근교 반야월에서 3대째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채태원 집사이다. 그러나 철저한 유교 집안인, 경북 영일군 흥해면의 이충우 씨와 결혼했다. 당연히 시집살이는 매운 고추맛이었다. 죽음과 맞바꿀 만큼 단호하게 신앙을 주장함으로써 집안 식구들은 물론 주위 친척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농토도 없는 이들 부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다가 해방을 맞이해서 귀국 도중 연락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가져오던 재산이 바다에 수장되어 버렸다.

빈털터리로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근근히 생활의 안정을 찾아갈 때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일어났다. 포항 시가지는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이들은 산기슭에 곧 쓰러져 가는 빈 절간 방을 하나 얻어 일곱 식구가 지냈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어머니의 행상’이 시작되었다. 폐허가 되어버린 포항 시내에 유일하게 포항 제일교회만이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갔다. 항상 새벽 4시에 아이들을 깨워 기도를 시킨 후 자신은 다시 교회로 달려가 새벽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가 참 예뻤어요. 오빠들은 거기서 주일학교 교사들을 하고, 글씨 모르는 어르신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비로서 목장을 하신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13년을 더 사셨는데, 상당히 효자였습니다. 돈을 좀 벌면 시골에 땅을 사고, 16대 조상 비석까지도 세우실 정도로 유교적인 아버지도 마지막에 세례받고 교회 충성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 간증하는 이윤진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딸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내에게 무능한 남편이라고 했던가요? 어머니께서는 남편을 세워주셨습니다. 남편을 존중할 줄 아는 어머니였습니다. 딸은 첫째인 언니와 막내인 저하고 둘이었는데, 딸들을 무섭게 키우셨습니다. 밖에 못나가게 하시고, 크리스마스 때 누구하고 있는지 꼭 확인하고, 딸들을 엄하게 키우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찢어질 듯이 가난한 살림에 힘든 고생을 다했지만, 십일조는 당연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섬김과 나눔의 모델 같은 삶을 살았다. “주의 종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 잘 섬겨야 한다면서, "명절 때는 아무리 힘들고 가난해도 계란 한 줄이라도 선물하셨고, 담임목사님에게 축복기도 받고오라고 하시며, 목사님을 굉장히 존중했습니다. 그 당시 신앙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복받는 비결이고, 또 담임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행복한 신앙생활의 비결처럼 사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교회와 가정에 국한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지극했다.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국가관과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해 작은 정성을 쏟았다. 결혼식이나 잔치 때 먹는 국수를 국경일에 삶아줄 정도였다.

“국경일 등에는 좋은 걸 먹고 기뻐해야 한다면서, 뜻있는 날은 국수를 삶아주셨습니다. 그렇게 나라와 민족의식을 심어주신 것 같습니다. 큰 오빠는 국회부의장, 작은 오빠는 대통령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섬기는 토대가 바로 이처럼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은연 중에 국가관을 배운 것 같습니다. 일제 시대, 6·25를 거쳐오신 어머니는 국가와 민족이 있어야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신앙, 시련의 벽을 뚫다

신앙은 좋았지만, 가난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란 아이들은 곧고 바르게 자랐으며, 공부도 기막히게 잘했다.

“어머니 옆에 늘 세 오빠가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큰 오빠(이상은)는 돈벌기 위해 일찍 객지에 나가셨고, 둘째 오빠(이상득)가 정말 효자였습니다. 폭이 넓고 어쩌면 제일 잘해주셨습니다.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고, 한마디로 ‘어쩜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알뜰했습니다. 얼마나 알뜰한지 목욕탕에서 수건 두 개 못쓰게, 와이셔츠 두 번 못 빨게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를 생각해보라면서 말입니다. 자상하고, 어떻게 보면 우리집 살림을 둘째 오빠가 도맡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오빠(이명박)는 빼어났습니다. 대화를 나눠보면 항상 앞서갔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야무쳤습니다. 실수가 없었고, 미루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수박장사하면 같이 하고, 풀빵 구우면 같이 하고, 어머니와 고생을 제일 같이 하신 오빠지요. 오빠들 역시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날 대한민국 뉴스메이크인 두 오빠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둘째 이상득은 소년 시절부터 형제 중에서 가장 신앙생활을 잘 해서 교회에서는 그를 학생회장까지 맡겼다. 이상득은 고교 졸업 후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다리 관절염으로 자퇴를 하고 집에서 침술로 치료를 받으며 대학입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어머니 행상에는 셋째 아들 이명박을 데리고 다녔다. 이명박의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행상의 종류는 당시 성냥 대신으로 사용했던 나무에 황을 붙여서 사용하는 황성냥 장사, 김밥 장사, 아이스케키 장사, 나무 장사 등이었다. 추운 겨울 행상길을 가다가 따뜻한 양지가 있으면 어머니는 좀 쉬어 가자면서 짐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었다.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미소를 짓는데 이것은 이명박에게 성경이 얼마나 재미있는 책이란 것을 은연 중 알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고된 행상을 마치고 돌아오면, 둘째 이상득은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달동네 비탈길에 물지게로 미리 물통을 가득 채워 놓고 술도가에서 얻어온 술찌끼로 끓인 죽이지만 전 가족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저녁 준비까지 해놓고 있다.

▲ 이윤진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이상득은 하루종일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부만 하기 위해 자신의 발목을 아예 책상다리에다 줄로 매어 놓고 책을 보았다. 이상득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머니의 행상은 더욱 바빠졌다. 특히 등록금 낼 때가 가까워 하늘이 노랗게 될 정도였다. 행상으로서는 생계비와 등록금을 모을 수가 없어 풀빵을 구워 팔기도 했다.

어느덧 이명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에 응시, 수석 합격이 되어 장학생이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한 이상득은 당시 한국은행 총재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입학금, 등록금 때문에 수심에 잠겼던 어머니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라고 하면서 계속 감사기도만 했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흘렀고 특히 매일 먹는 주식도 술찌끼에서 강냉이 가루죽으로 격상되었다.

 
이태원의 기적

이명박이 고교 3학년 때, 어머니는 포항의 행상으로는 아이들 학비와 가족의 생계가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서울행을 결행했다. 뻥튀기와 과일 장사 등 3년간의 장사로 동지상고 야간부 3년을 수석 졸업한 이명박 역시 서울로 합류했다. 어머니는 이태원 시장 노점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역시 부엌도 없는 판자촌에 방 한 칸을 얻어 전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이명박은 이 방에서 함께 살 수 없어 건설현장의 날품팔이를 하면서 노동자 합숙소와 고향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대학입시 공부에 전념했다. 대학을 다닐 수 없는 처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합격만 해놓으면 그것이 대학 중퇴란 말로 이력서에 들어가는 줄 잘못 알았다.

어렵게 입시 책을 구해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일거리를 찾아 다녔다. 한 번은 시험공부 도중 졸도를하여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한편 고향 친구 재수생을 따라 갔다가 함께 산 입시원서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원서였다. 경영학과가 무슨 과인 줄도 모르고 산 원서였다. 시험 결과 재수생 친구는 낙방하고 이명박은 합격이 되었다.

이태원 시장 노점 바닥에서 채소를 팔다가 아들의 대학 합격증을 받아 본 어머니의 얼굴에는 등록금 문제로 수심이 가득 찼다. 노점 채소장사의 아들이 고려대학교에 합격이 되었다는 소문이 이태원 시장 안에 퍼졌다. 이들의 딱한 형편을 알게 된 시장 상인들은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면서 대신 시장 청소를 하게 했다.

▲ 중국 선양 생명길 신학교 교장으로 16년간 중국 선교에 헌신해 오고 있는 이윤진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이렇게 이명박은 대학 2학년까지 시장청소로 학비를 조달해 가면서 그야말로 청운의 푸른 꿈을 키워갔다. 이상득은 코오롱에 입사했고, 어머니는 드디어 시장 안에 조그만 노점 자리도 얻게 되었다. 노점 행상이 끝나고 자신의 좌판자리가 생긴 그 날은 어머니의 생애에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가정의 경축일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축하의 인사를 하면 채 집사의 답변은 항상 정해져 있다.

“나는 무식해서 돈도 없고 다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한편 이명박은 대학 2학년 1학기 때 일찍 군복무를 마치기 위해 자원입대를 했다가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신체검사에 불합격이 되어 군대를 못가게 되었다. 3학년 때 친구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상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다.

4학년 때 한·일 국교 굴욕 외교 반대와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대학가의 데모가 서서히 일어날 때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 대행으로 고려대 데모의 선봉장으로 6.3시위에 앞장선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어머니의 소천

어머니는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착한 아들이 형무소에 들어갔다면 이것은 필경 나라의 대역죄로 다시는 살아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4년 9월 서대문 형무소에 면회갔던 어머니는 아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말했다.

“명박아! 너 새벽기도 꼭 하고 있나? 그리고 성경도 꼭 보고 있나? 그리고 나는 네가 별볼일 없는 자식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번 사태를 자세히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구나!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껏 행동하기 바란다”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어머니는 일어났다. 입회인이 면회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더 말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다시 한번 “새벽기도와 성경 똑똑히 읽어라”이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형무소 뜰을 걷고 있는 어머니는 자신이 평소 앓고 있는 심장병이 서서히 악화되고 있다는 징조를 알게 되면서, 어느 날 이웃에서 녹음기를 빌려와 유언을 남긴다. 유언을 하기 전 먼저 찬송가 431장(‘내 주여 뜻대로’)을 불렀다. 찬송이 끝나자 그의 유언은 평소 항상 하는 말 그대로였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라”..... 그리고 이명박에게는 “명박이 너는 앞으로 큰 일을 할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리고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라”.....

▲ 탈북자 선교를 하는 이윤진 선교사는 북한은 친 손자를 삶아 먹을 정도로 기아에 굶주리고 있는 등 실상을 전했다.     ©크리스찬리뷰


어머니는 이명박이 6개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한달 만인 1964년 12월 15일 소천했다. 둘째 아들 이상득이 조그만 주택 하나를 막 계약한 직후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행상과 노점생활로 열심히 노력했으나 내집 마련은 도저히 힘들었던 어머니! 그 부모님의 평생의 한을 풀어 드리려고 둘째 아들 이상득이 마련했던 주택! 온 가족 다 모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했던 그 소망이 실현되었을 때 어머니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어머니가 떠나간 후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가족들은 기쁨의 감격은 없고 어머니 생각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가족들은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퇴계원 공동묘지에 어머니를 묻고 오던 날 그 흔한 십자가 하나 구할 수 없어 자식들은 소나무를 꺾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았다..

 
기도의 열매

어머니가 소천한지 40여 년 후, 큰아들 이상은은 기업가로 둘째아들 이상득은 국회의원으로 셋째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다. 특히 두 아들은 같은 날 같이 장로가 되었다. 만일 지금 그 어머니가 생존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의 어머니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답변은 역시 행상 시절의 답변 그대로일 것 같다. “나는 돈도 없고 무식해서 자식 교육시킬 형편이 못되었는데 다 하나님의 덕분이죠...”  좋은 일은 항상 하나님께 돌렸다.

큰딸 이기선은 구룡포읍 제일교회에서 권사가 되었고 막내딸 이윤진은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잠실에 있는 성현교회를 다니며 20여 년간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여전도회장까지 했으나 세상이 주는 명예직(모 여성단체 회장)에 유혹되면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선교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막내니 친인척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 안믿는 남편과 했어요. 제가 예수 믿는다니까 군대서 세례증 받아왔더라구요. 저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례받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군대서 무더기로 주는 세례를 받았던 거예요. 그 이후 남편은 사업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지기 시작했다.

“30대부터 두 번의 자궁암 수술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누으면 앉지도 못하고 밥도 못먹고 옷도 입혀주어야 했습니다. 43세 때는 치아가 몽땅 빠졌습니다. 이때부터 산송장 취급을 당했습니다. 10년간의 진통제 복용으로 기억력 상실 증세가 나타나는 등 갖가지 부작용이 뒤따라 그야말로 죽을 날만 기다렸지요.”

의학적으로는 단 1%의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마지막 소망의 기회가 왔다.

“예배시간에 류마티스를 치유받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온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저도 예수님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이 사업 실패하고 제일 어려울 때 결단하고 총신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3년 동안 어렵게 다녔습니다.

2년 전도사 생활하다가 중국 가서 중국에 빠졌습니다. 중국에 들어가니 탈북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탈북자 사역을 7~8년 했습니다. 돈 주는 사람도 없고, 남편 장로가 주는 생활비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무서운 병마의 고통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평생을 자식을 위한 일편단심 어머니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사역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중국 선교를 위해 옆에서 돕는 사역만 한다고 하였다.

“작은 오빠가 서울시장, 대통령 되고나서는 선교사는 할 수 있지만 탈북자 사역을 못했습니다.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만 했습니다. 탈북자 사역 4년 하고나니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담낭이 왔습니다. 화장실도 없는 아파트에서 30여 명이 생활했습니다. 남자들은 못합니다. 모든 신고가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저같은 경우도 3번 들어간 적이 있는데, 현지인들이 세 번 다 저를 빼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5억 중국과 55개의 소수민족을 포용하기 위해 생명길신학교를 세워 16년째 교장으로 헌신하고 있는 그는, ‘복음의 서진’이라는 꿈을 안고 생생한 선교지의 상황을 전하며,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을 주고,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피고 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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