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예배당에 담긴 비전

성전 리모델링 새로운 도약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2/01/30 [12:38]

시드니호천장로교회(이하 호천교회)가 변하고 있다. 그간 신사 참배에 반대해 설립된 예장 순장 교단의 독특한 이미지를 내세워 타 교회와 교류조차 꺼려왔던 호천교회가 지난해 9월, 예배당 리모델링 후 열린 교회로 스펙트럼을 확대해가고 있다.

새 목회를 지향하는 서영준 목사(47)의 목회비전과 미래의 비전을 꿈꾸는 호천교회 내부의 소망이 딱 맞아떨어져 활기찬 변화의 발걸음을 걷고 있다.

교단 어른들이 가졌던 신앙의 절개, 전통, 믿음 등을 높이 사는 서 목사는 그러나 호천교회도 새롭게 변화해야 한다는데 교인들과 의견을 같이 하고 함께 노력해나가고 있다.

즉 호천교회의 내실을 꾸준히 채워나가되 내부의 자양분을 사회 각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선교단체모임, 초교파모임 등 기존의 프로그램도 다분히 개방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서 더 동선을 넓혀 명실공히 다문화 교회로 발돋움한다는 것이다.서 목사는 “그동안 순장만 최고인 줄 알았다”며 “개인적으로 다른 목사님들하고 교류를 하면서 깜짝 놀란 것이 ‘우리만 잘 믿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 새 목회를 지향하는 시드니호천장로교회 서영준 목사는 예배당 리모델링 후 동선을 넓혀 다문화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사실 순장 그러면 보수적인 색깔이 있거든요. 일제의 탄압과  공산당의 탄압으로 핍박을 당하신 분들, 핍박을 피해 도망간 분들이 합쳐서 세운 교단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신앙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거나 교류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람이 한 일 같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

 
▲ 리모델링 전 교회당 내부와 예배 전경     ©크리스찬리뷰


호천교회를 찾았을 때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졌다. 리모델링한 교회치고는 겉모양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당 안으로 들어서자 그게 아니었다. 야~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환하고 깔끔한 분위기, 온기와 함께 경건함이 느껴졌다. 14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아늑한 예배실, 그 옆으로 자모실, 회의실, 식당, 부엌, 청년부회의실 그리고 주일학교실 등으로 작지만 아주 유용하게 설계되었다.

사실 1995년 구입한 교회당은 오래된 건물로 좁고 시설도 낙후되어 어둡고 답답한 면이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가 성장하자 공간 활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예배당 외에도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시급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선 강단이 너무 높았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거기에서 어떤 공연을 할 때 잘못하다가 떨어지면 다칠 텐데, 항상 걱정을 했거든요. 또 강단에 올라갈 때 신발을 벗고 올라가고 내려올 때 신발을 다시 신어야 하는데 강단이 높으니까 그런 불편함이 있었고요.

물론 저는 호주에서 공부해서 그런지 그런 부분에서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교단에서는 그렇게 하거든요. 그리고 장애인 사역을 하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접근하려면 강단이 높아서는 안 된다. 강단을 낮추자.

두 번째는 우리는 대형교회를 지향하지 말자. 큰 교회를 하기 위해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잖아요. 그럴 바에는 끊임없이 교회를 개척하고 후원하자. 그래서 우리 교회는 모교회로, 열린 교회가 되자는 것이었고요.

▲  현대적 감각으로 리모델링한 교회당 내부      ©크리스찬리뷰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우리 마음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데 너무 오래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어요.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리모델링을 서둔 것이죠.”

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일종의 결단을 요구했고 성도들은 이 일을 선뜻 결정해줬다.

“은행에 우리가 빌릴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되나 알아보니까 12만 불이었어요. 거기에 맞춰야 하니까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우리는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을 짓지 말고 학개 성전을 짓자, 처음부터 그것이 모토였습니다. 비용에 맞춰  좀 싼 것을 사용하더라도 기동성 있는 교회를 만들자며 기도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 중에 건축가가 계셨어요. 그분이 흔쾌히 디자인을 맡아주셨어요. 그런데 담당했던 빌더가  그 가격에 가능하지 않다면서 무산이 됐어요. 그때 마침 소망교회 황 집사님과 연락이 됐죠. 원래 그분이 굉장히 바쁜 분인데 한 달간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사가 시작이 됐죠. 그런데 한 달 예정인 공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두 달이 되고 추가된 부분도 많았어요.

그래서 처음에 계획했던 자재를 더 싼 걸로 바꾸고, 온 성도들이 달려들어 페인트칠도 하고 그렇게 해서 공사가 끝날 수 있었죠. 황 집사님은 자기 일까지 포기하고 수고해 주셨는데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완공되기까지 또 다른 기적이 있었다고 서 목사가 털어놨다.

“저희 교회가 웨스트팩 은행하고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공사하기 전 담당자와 12만 불을 빌리기로 구두로 약속이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공사 중간대금을 지급하려고 은행에 신청을 했는데 안 된다는 겁니다. 확인서를 받아놨어야 했는데 담당자 말만 믿고 구두로 얘기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큰일이 일어났죠. 급하게 장로님이 거래하는 커먼웰스은행 매니저에게 전화해 사정 얘기를 했더니 서류를 갖고 오라고 해서 3일 만에 돈을 받았어요. 은행 담당자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대요. 자기들도 기적이라고 그래요.”

서 목사는 “건축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이를 잘 극복해준 성도들과 기타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면서 “이런 어려움을 통해 이 일은 너희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이 교회를 산 것도 사람이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  시드니호천장로교회당 외부 전경    ©크리스찬리뷰


순장 교단, 신사참배 거부 함남 5교회가 설립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장은 1938년 조선에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여기에 반대해 설립한 교단이다.

당시 함경남도 함주군 덕천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계실 목사는 일제 신사 참배를 배척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는 5개 교회(덕천교회, 동상리교회, 기곡교회, 장흥교회, 상수리교회)교인들과 함께 순장교단을 세웠다. 이후 이 목사는 1951년 1.4후퇴 당시 5개 교회 1300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유엔군 수송선을 타고 경남 거제도 연초면으로 이주했다. 이곳에 정착한 교인들은 ‘연합 덕천교회’라는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으며, 이후 동천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순장교단은 모교회인 동천교회를 중심으로 62년 서울 신천교회와 67년 서울 대천교회 창대교회를 개척했으며,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등에도 교회를 세웠다. 86년 4월에는 아들레이드에 교회가 개척되면서 시드니, 골드코스트, 뉴질랜드까지 교회가 개척되었다.

서 목사는 “수없이 많은 신앙 선조들이 교회와 교단을 위해 아름다운 헌신을 했기에 순장이 존재한다”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전통은 우리 교단만의 자랑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단은 비록 작지만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큰 긍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덕천교회. 1954년 가을 서울로 교회를 옮긴 후 신길동에 교회를 짓고(1955) 성탄절에 제직일동 기념촬영(1957).      ©크리스찬리뷰


호천교회는 지난 92년 9월 6일 26명의 성도들이 에핑 커뮤니티 홀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교단 출신 한 가정이 시드니에 오셨는데 안상분 집사님이셨어요. 이 집사님이 교회를 가고 싶은데 어느 교회를 갈까 고민하고 있는 중에 마침 한국에 있는 순장교단인 신천교회 전도사님이 시드니를 잠깐 방문하셨어요. 전도사님이 이 사실을  먼저 아들레이드에 와계시는 홍병숙 권사님께 전화를 한 겁니다. 이곳에 교회가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교회가 없으면 당연히 교회를 세워야지. 그런 후 홍병숙 권사님이 시드니로 오셔서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셨어요. 이것이 호천장로교회의 효시입니다.

홍병숙 권사님은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입니다. 서문밖교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할 때 그 자리에 계셨는데 일본 순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자리를 빠져나오신 분들 중 한 분입니다. 공산치하 때는 인민군에게 남편과 함께 끌려갔는데 홍 권사님이 유일한 여자이셨대요.

당시 남편은 죽창으로 찔려죽고 홍 권사님은 재판과정에서 마지막 심문을 받는데 “홍병숙, 어떻게 할 거냐 하나님을 믿을 건가 대답해’ 그때 홍 권사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를 자기 조상으로 믿는 어리석은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이 말씀대로 될 줄을 알지로다.’  죽기 전에 할 말은 하고 죽는다면서 막 쏟아 부으셨대요. 앞에 있던 인민군이 겁을 먹었는지 빨리 나가시라고 해서 나왔대요.”

아들레이드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서 목사가 시드니로 온 것은 93년 1월 2일.

“그동안 아들레이드장로교회 문광식 목사님이 시드니와 아들레이드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계속 인도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하루는 ‘네가 시드니로 가서 목회하면 참 좋겠는데’ 그러시는 겁니다. 그때 ‘쟁기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이 생각이 나면서 일주일을 끙끙 앓았습니다.

밥 먹어도 소화도 안 되고 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고 계속 그 말씀에 사로잡혀 괴로웠습니다. 3개월 후 한국에서 목사님이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 기간 동안 올라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올라왔죠.”

사실 서 목사의 꿈은 일반 목회가 아닌 장애인선교였다.

모태신앙인으로 극히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복음의 열정’이 없었던 그는 ROTC 군대 생활 때 술을 마시며 하나님을 떠났다.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후 89년 아들레이드로 오면서 교회를 다시 찾았다. 아들레이드 근교에 농장을 경영하면서 신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키운 꿈이 장애인선교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있는 이모부 회사를 돕기 위해 호주를 떠났고 이모부 회사에서 배운 경험으로 스페인 선박회사에 취직을 했다. 대기업이었다.

▲  예장 순장 교단 설립자 이계실 목사  ©크리스찬리뷰


부름에 대한 확신과 ‘깨뜨려짐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여기에서였다. “술 한 잔 합시다”는 사장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중심에서 밀어놓았던 주님께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91년 호주로 돌아온 그는 농장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신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때도 목회자가 되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의 꿈은 여전히 장애인선교였다. 그런 후 시드니행을 부름 받았다.

“홍병숙 권사님이 그린에이커 지역에 집을 하나 얻었어요.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죠. 일곱 가정이 모였는데 청년들 합하여 30여 명이 됐습니다. 그 때 청년부 활동했던 분들이 지금 장로님, 안수 집사님, 집사님들이세요. 초창기 멤버들이 기둥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호천교회당은 호주 아랍인들의 첫번째 교회당

그런 후 어느 날 홍병숙 권사가 서 목사를 찾았다.

“권사님이 저를 보더니 대뜸 교회건물을 삽시다. 그러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20만 불 되는 교회건물을 찾습니다. 팔려고 하는 분은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오’ 라는 글을 컴퓨터로 쳐서 인쇄하여 복덕방마다 돌려라‘ 그러셔요. ‘아니, 20만 불되는 교회건물이 어디 있습니까, 권사님‘ 그랬더니 무조건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인쇄하여 20여 군데 돌렸죠.”

그런 후 일주일 만에 연락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건물이라고.

▲ 함흥시 상수리에 있는 5개소 교회 중 하나인 상수리교회(1930년대)    ©크리스찬리뷰


“가격이 35만 불이었어요. 그런데 돈이 있어야죠. 그 당시 홍 권사님은 금식을 하고 계셨는데 우리 순장교회 어른들의 금식은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물 한모금 안마시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정말 하나님께 간절함이 배어있는 금식이었죠.

저도 3일 동안 금식을 하고 나니까 ‘계약하러 갑시다.’ 그러셔요. 그때 은행돈 하고 신천교회, 아들레이드장로교회 그리고 우리교회 성도들이 함께 헌금하여 이 건물을 구입하게 됐는데 우리 홍 권사님이 보통 분이 아니셨어요. 저를 쫓아내어 산에 가서 기도하고 오라 하시고 바닷가로 가서 기도하고 오라 하시고 훈련을 얼마나 시키시는지 참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서 목사는 “그런데 이 교회가 호주지역 아랍인들의 첫 번째 교회라는데 놀랐다”면서 “이 교회를 통하여 호주지역 전체 50개 아랍인교회가 세워지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아랍인 교회는 이 교회를 모교회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교회가 이 건물을 구입할 당시 이집트 내에서는 근본주의 모슬렘들에 의해서 핍박이 일어났어요. 교회당에 불 지르고 사람도 죽이고요.

그래서 이 교회 건물을 팔아 선교헌금으로 이집트로 보내게 된 거지요. 이 돈으로 목사님들 생활비도 드리고 카이로 부근에 땅을 사서 빌딩을 지었습니다. 거기에다 신학교와 교회, 그리고 홀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개방했는데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95년 말, 서 목사는 교단 신학 공부를 위해서 한국으로 떠난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목사안수를 받고 호주로 돌아와 호천교회로 다시 초청을 받은 것은 2005년이었다.

“골드코스트교회를 거쳐 아들레이드장로교회에서 사역을 돕고 있었는데 호천교회에 목회자가 안 오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 돌아왔어요.”

서 목사는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따뜻한 교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복잡한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훈훈한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곳,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나누며 밝게 웃음 짓는 곳. 그는 그런 사랑방 같은 교회를 마음속에 그려왔다. 그때부터 서 목사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제자훈련과 사역자훈련, 새가족반, 목적이 이끄는 삶, 여성중보기도모임, MITI(기도하는 엄마들) 기도모임 등의 이름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다문화 선교 등 제2의 도약을 꿈꾼다

서 목사는 ‘호천’이라는 명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서영준 목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 사무실에서 지낸다.      ©크리스찬리뷰


“호주 천국이라고 많이 알고 있는데요. 사실은 덕천마을에서 피난 나온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면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워야 한다. 덕천으로 돌아가 덕천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런 뜻에서 ‘내천’자의 ‘천’을 교회들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림동은 신천, 대림동은 대천, 구로동은 구천, 그런데 구천교회 그러니까 구천을 맴돈다고 놀려대니까 얼마 전에 창대교회로 바꿨어요.

그런 뜻이라면 아들레이드교회는 ‘아천’이라고 해야 되는데 아들레이드장로교회라고 해놓고 호천교회를 세울 때는 ‘호천’이라고 문광식 목사님이 지으셨어요. 사실 골드코스트에도 우리 교단이 있는데 그렇다면 거기는 ‘골천’이라고 해야 되는데 참 곤란하지요. 그래서 시드니가 아무래도 중심지역이니까 호천교회로 하자. 앞으로 호천교회가 호주에서 우리교단의 대표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뜻이 있어요. 처음에는 촌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요즘에 아름다운 교회이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저는 호주 천국교회라고 자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천국을 맛보며 사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천국의 삶이니까요.”

호천교회는 이제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새 예배당은 예배와 경배 교육의 목적으로 개방하고 나머지 공간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할 방침이다.

서 목사는 “누구든지 기도하고 싶을 때 들어올 수 있도록 언제든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선교에 집중하면서 양로원 선교, 그리고 다문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로 새롭게 발돋움하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아랍인들이 많이 옵니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이 이란 분이 계세요. 지금 점점 한국말이 늘어가고 있는데 동시 통역도 가능합니다. 이란교회가 활성화되도록 돕겠습니다.”

튼튼한 역사를 자산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호천교회. 서 목사는 올해 교회 타이틀을 ‘예배를 통한 치유와 회복’으로 내걸었다. 표어에 걸맞게 기본에 충실한 신자를 양육하기를 원하는 그가 앞으로 펼쳐나갈 선교의 청사진이 궁금하다. 〠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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