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자의 기쁨, 세상의 갈망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2/01/30 [14:20]

 
▲ 1.5세 목회자의 자녀로 나눔과섬김교회를 개척한 홍성기 전도사     ©크리스찬리뷰


그는 이목구비가 단정하다. 입 매무새가 허튼말을 하지 않을 듯하다. 눈망울도 맑고 선하다. 목소리와 말투가 나긋나긋하고 독기가 없다. 무슨 옷을 입어도 ‘태’가 나고 잘 어울릴 것 같다.

‘대를 이어 (주님께) 충성하는 집안’답게, 주님께 ‘의리’ 하나는 끝내줄 것 같다. 그런데 사역의 타이틀이 좀 늦은 것 같다. ‘목사’란 타이틀을 오래 전에 붙이고도 남을 연륜이었다. 지름길로 가도 될 것을 돌고 돌아오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올해가 시작되는 지난 1월 1일 첫주일, 이스트우드 퍼블릭스쿨에서 ‘나눔과섬김교회’(이하 나섬교회)를 시작한 홍성기 전도사(46세)이다. 그의 부친은 시드니 교계의 상징이랄 수 있는 홍관표 목사(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이다.

교단과 교계에서 부친의 영향력 정도라면, 아니 본인의 그동안 사역경력 등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잘 갖춰진 중형 교회 이상에서 소위 ‘폼나게’ 사역할 수 있을 터인데, 굳이 ‘맨손으로 풀베기’같은 교회 개척의 길로 나선 것이다.

“저는 교회가 이 세상에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확신하기에 저는 교회를 세워가며 섬기기를 원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살아나며,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나아가서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주며 다른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저는 꿈꾸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는 예수님의 명령 ‘가서 제자 삼는 일’에 저의 목회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평신도 한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그는 이미 싱가포르에서 신학생 시절, 제자훈련의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당시 남침례교 소속 50개국에서 온 각 사람들로 구성된 국제교회에서 젊은이 담당 교역자로 2년 동안 섬겼다. 그리고 3학년 때는 싱가폴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중·고등부 150여 명을 섬기면서 제자훈련의 기쁨을 맛보았다. 외적인 열매가 적지 않게 맺히자 싱가폴 그 교회에서는 계속 사역해주기를 원했다.

미국과 뉴질랜드에서도 초청이 들어왔다. 이런저런 요청에 기도를 많이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계속 기도하는데 시드니에서 개척해야지 않겠느냐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개척을 하고 싶지 않고, 갖춰진 곳에서 하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제일 험함 길 같은 이 길을 택하게 하시더군요. 또 많은 교회가 시드니에 있습니다. 나섬교회는 특별히 1.5세 와 2세 그리고 곧 다가올 3세에까지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려 합니다.

▲ 본지 송기태 편집국장과 홍성기 전도사 부부 인터뷰 자리에 홍관표 목사와 김이진 사모(왼쪽)가 자리를 함께 했다.     ©크리스찬리뷰


저는 1.5세로 이곳에서 자랐고 사회 경력도 이미 20년이 되었습니다. 1세대와 2세들을 연결하여 1세대들의 신앙의 뿌리를 이어가며 동시에 2세대가 필요로 하는 사역을 과감히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또 사회 경험은 저에게 더 넓은 폭으로 성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성도들이 얼마나 직장과 사업터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더욱 성도들을 품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삶에서 예배드리는 자의 삶을 살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힘들지만 벽돌 하나하나를 올리며 집을 짓듯이 교회를 세워나가고자 합니다.”

그는 교육과 제자훈련으로 목회의 진검승부를 삼으려는 각오를 보였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과 아버지의 목회철학을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것이 맞다고 신학하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소망을 가지고 사역하고, 훈련시키는데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불과 한 달밖에 안됐지만 훈련을 체계적으로 해서, 나섬교회라면 ‘훈련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평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로만이 아닌, 훈련받고 나가서 직접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야지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가 커져서 교회 짓는 것보다는 정말 나가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고아원, 양로원 등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사역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교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숙성기간

담임목회자로서는 이제 초년병이지만, 이 소명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그는 오랜 숙성의 기간을 거쳤다.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는 정당한 목적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특히 79년, 중2 때인 14세에 이민온 ‘첫세대 1.5세’로서 경험한 소중한 자산들을 한인교계에 풀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제가 시드니를 떠나 10년 만에 돌아와 보니 너무 많은 1.5세 2세들이 신앙에서 떠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어와 영어 다 편하기 때문에 1세와 1.5, 2세대들의 중간 다리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2세, 3, 4, 5세들의 기초를 제가 사역을 통해서 마련해준다면, 후배들이 계속해서 사역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 비전을 그렸습니다.

처음 저희 가족들이 삶의 터전과 뿌리를 시드니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힘들어 하셨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저 역시 새로운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싸워야 했습니다. 이 힘든 상황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은 부모님이 사역하시는 교회가 날마다 부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조그만 희망까지도 없어지는 경험까지도 체험해야 했습니다.

▲ 홍성기 전도사     ©크리스찬리뷰


그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교회의 분열과 새로운 교회 개척은 사춘기를 지나는 저에게는 너무도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스스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목회자는 되지않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힘든 시기를 잘 지날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라고 지금 고백할 수 있습니다.”

1985년 시드니대에 진학한 그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늘 학교와 가정밖에 몰랐던 그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탈출한 것 같은 새로운 문화충격을 경험했다. 세상은 그의 신앙에 도전해 왔고, 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일까? 내가 지금 바로 살고 있나?’ 이 본질적인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때 저에게 귀한 대학 선배를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성경공부로 이어졌고 두 사람의 모임은 시드니대학 한국 학생을 상대로 하는 모임으로 커갔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통하여 말씀의 단맛을 보았고, 믿음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받았던 신앙훈련이 대학시절을 통하여 다시 한번 굳어지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동역자들과 함께 계속하여 젊은이들 사역을 하였고, 청년부 제자화 훈련에 힘썼습니다. 아마도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역의 길로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결혼과 사업

30대는 그에게 즐거움과 힘겨움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무엇보다 31세 때 결혼은 가장 큰 은총이었고, 축복이었다. 장인 이도원 장로(대연교회)는 93년도 부산장로성가단 단장으로 시드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궜다. 은퇴와 함께 태국 난 (Nan) 지역으로 선교사로 파송받아 6년째 사역하고 있다. 그곳 산 속에서 살아가는 몽족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면서 학교를 보낸다고 한다.

“산호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방문했다가 연결되었습니다. 8년 나이 차이가 있더군요. 처음 하루를 만나고 났는데, 아내가 저한테 푹 빠진 것 같았어요. 물론 저도 빠졌구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자매와 평생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모님께 허락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산에 계신 장로님께 연락하여 ‘아이들끼리 교제해도 되느냐?’고 하여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동석한 이안희 사모의 말을 들어보자.

“그전 연말, ‘내년 23세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선물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나고 호주로 떠나보낼 때, ‘엄마 호주로 시집가기 싫어요’하고 울었습니다.

그때 ‘인생의 선물이 배우자였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약혼하고, 세 번째 결혼했습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의심이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도제목대로 다 되었는데, 키에 대해서만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키가 큰데 기도하지 않았는데...”

결혼 이후 그의 경력은 사회일터에서 급속도로 진정했다. 96년에 IBM회사로 들어가, 4년 만에 IBM 고위 임원으로 2000년까지 일했다. 98년에는 일본 동경으로 파견 근무했다. 이때 믿음 좋은 헌신된 부부 동역자를 만났다. 이들 부부의 섬김과 삶의 헌신은 홍 전도사 부부에게 또 하나의 신선한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섬겨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IBM에서 알게된 두 동료와 소프트웨어 벤처 기업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2000년, IBM회사에서 사임하고 벤처 기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회사의 CEO로 벤처 캐피탈 자금을 끌어들였고, 사업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싱가폴에서 펀딩받고 그곳에 본사를 세웠다. 독일, 인도, 영국 등에 지사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지만 기본을 유지하던 사업이 자금부족으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헤어나기엔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으나 나아질 가능성이 안보였다. 구조조정을 하고, 60여 명 되던 직원도 줄여야 했다. 그러면서 차츰 사업을 안정궤도 속으로 들어서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을 향한 달음질

 
▲ 홍관표 목사는 김이진 사모와의 사이에 성기, 희정 등 남매를 두었는데 희정 씨(뒷줄 오른쪽 2번째)는 미국 산호세로 출가했다. 사진은 홍 목사     ©홍성기


“하나님은 이 시간들을 통하여 저를 훈련시키셨고, 저 자신을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들은 오히려 저와 아내에게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고백할 수 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말입니다.

2007년 사업의 안정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쓸데없는 저를 다시 한번 불러 주셨습니다. 거기에 순종하고 기도하면서 조심스레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도 놀랍게도 같이 불러주셨습니다.

사실 10대 청년 때부터 부름이 있었지만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는 안되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거부했는데, 하나님이 다시 붙잡아 주시고, 안내하시는 완벽한 부르심 앞에 저의 결심은 완전히 녹아져 버렸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셨던 그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쓰시겠다고 만나고 불러 주신 것이지요. 이 부르심 앞에 저와 아내는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주고, 대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싱가포르 바이블칼리지(SBC)에서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몇 좋은 교회에서 사역의 기회를 가졌다. 말씀으로 커가는 학생들을 보며 말씀의 능력을 다시 한번 맛보았다. 훈련으로 세워져 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 학생들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 하실 일이 기대되고 가슴이 뛰었다. 

교회란 한마디로 ‘우리 1.5세, 2세 그리고 그 다음 세대들이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며, 목회란 ‘꿈을 꾸는 것’(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임하는 것을 보는 꿈)이며, 신앙이란 ‘삶의 모든 것’(신앙은 삶이고, 삶 그 자체가 우리의 신앙)이라는 소신으로 첫 출발을 한 홍성기 전도사!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말씀을 가장 좋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자’는 좌우명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

또 그는 <하나님이 복음이다> <영적 침체를 극복하라> <예수님의 지상명령> <거듭남> 등의 책으로 유명한 복음주의 거장 존 파이퍼 목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분이 주시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을 홍전도사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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