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함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 움직이는 생물의 한 생애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8/28 [18:24]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영결식이 사상 최대 규모로 지난 8월 23일 국회에서 엄수됐다. 정부 수립 이후로는 두 번째,     ©국민일보

"보람있게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듯이 값지게 쓰여진 인생은 편안한 죽음을 가져다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지난 8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필자의 소감이다. 1990년 6월 5일 필자는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과 여의도 어느 횟집에서 오찬을 겸한 만남을 가졌다. 당시 평민당 수석 부총재였던 문동환 목사가 평화교육과 민중교육이란 고희기념 논문집을 발행하여, 문 박사를 인터뷰하는 도중에 당시 박석무 의원(현 단국대 이사장, 한국 고전 번역원 원장)과 김 총재가 동석한 것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산낙지회를 젓가락에 돌돌 말아 먹던 그의 모습이 이색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는 95년 5월로 기억된다. 그날 오전 정대철 의원과 만남을 가진 뒤, 정 의원이 이끈 곳이 바로 명동 상업은행 본점 앞이었다. 그날은 처음 맞는 지자제 선거에 조순 박사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고, 김 전 대통령이 그 장소에 찬조연설하러 나오는 날이었다. 노타이 콤비차림의 그가 너무 친근하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아는 체를 했다(5년 전에 만난 필자를 실제로 알고 기억했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있던 필자의 친구 J기자는 그에 대해 퍽 호의적이지 않아 그가 내민 손을 머뭇거리며 마지못해 잡아주었다. 그날 그곳의 청중은 불과 50여 명, 명동 한복판에서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눅 들지 않고, 마치 수만 명 군중집회라도 하듯 사자후를 토하며, 당시 김영삼 정부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몇 시간 되지 않는 두 번의 짧은 만남 속에서, 가진 인상은 굉장히 논리적이라는 것과 강약이 분명하고, 당시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결코 과격하지 않은, 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그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80년 서울의 봄 시절 대학생들을 열광시켰던 그가 어느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열변을 토한 대목에서 과격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이후 군사정권에서 끊임없이 조작한 빨갱이좌익 용공분자 등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편견이 아닌가 한다. 물론 빨갱이와 좌익 용공분자는 여운형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일시 몸담은 인연으로 평생의 꼬리표가 된 면도 있지만. 어쨌든 치명적으로 조작된 이미지가 주홍글씨처럼 그를 감고 있었다. 

미국 타임지 창간발행인 헨리 루스 부인으로, 이태리 대사를 역임한 클레?여사는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대로 김 전 대통령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을 만큼 그는 큰 인물이다. 그렇지만 몇마디로 요약한다면 인동초(忍冬草) 토머스 모어동교동 행동하는 양심아시아의 만델라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햇볕정책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부드러운 단어가 더 많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참고 견디며, 부단히 투쟁해온 그의 삶을 요약한 듯한 인동초와 1957년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으며, 얻는 세례명 토머스 모어(15세기말 영국의 대법관과 하원의장, 유토피아 저자로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데 불응, 반역죄로 처형된 인물)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성이미지를 받쳐줄 뿐 나머지는 다 부드러운 이미지들이다. 

평소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다쓸모없는 사람은 찾아오지만 좋은 벗은 내가 찾아가서 사귀어야 한다용서와 사랑은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할 수 있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자 등의 신조로 한평생 살아온 인물이다.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오뚜기처럼 일어나고, 도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분명 현대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서는 해방 후 한국정치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남긴 커다란 족적만큼이나 그의 정치인생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30년을 군사정권과 맞서 싸웠다. 그만큼 혹독한 대가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무수한 상흔을 입으며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6년간의 감옥살이, 10년간의 가택연금,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그였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1950년 9월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직전에 목포형무소에서 탈출했고,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민당 후보 지원 유세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세 번째 죽을 고비는 유신 때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하자,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는 귀국하지 못한 채 곧바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내 세력을 규합, 반정부 반체제 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자 1973년 중앙정보부가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그를 납치하여 동해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려는 순간 불사조처럼 살아났다. 중정은 김 전 대통령을 서울로 데려와 동교동 자택에 연금했다. 

이후 국내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들어간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2년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은 그에게 대통령학과 인내학을 가르쳐준 대학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비서출신인 한화갑 전 의원은 인내와 지구력을 말할 때 세계 일등도 몇 번 하셨을 분이라고 우리들이 말하곤 했다고 밝혔다. 감옥에서 분초도 쪼개쓴 그는 엄청난 양의 독서로 지적 양식을 축적한 기간이다. 다독가로 잘 알려진 그가 대통령이 된 뒤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하며 감옥에 한 번 더 가야 할 모양이라고 할 정도였다. 

1978년 석방됐지만 다시 가택연금 됐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잠시 정치적 봄을 맞는다. 그러나 1980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에게김대중 내란음모사건혐의를 씌웠고, 1981년 1월 대법원의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른바 네 번째 죽을 고비였다. 그러나 국제적 구명 여론에 힘입어 '무기→20년 징역'으로 감형된 뒤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핍박과 고초, 그리고 수치를 다 겪었지만 결코 비굴하게 무릎 꿇지 아니한 그였다. 오히려 밟아도 밟아도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들풀처럼 그는 민주주의의 신념을 필치며 기어코 목표를 성취했다. 

그의 목표의 성취랄 수 있는 1997년 대선에서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누가 뭐래도 그를 죽이려 한 이후락과 전두환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뇌리에 사무친, 아니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정적(政敵)의 이름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오히려 당선자 신분으로 뇌물 수수와 반란죄로 1996년에 수감된 두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바로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해서. 여기서 우리는 용서와 사랑은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할 수 있다라고 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리더십을 모토로 흑백분리에 몸으로 항거하고, 27년이나 투옥됐다가 나와 남아공 대통령이 되어 국가 갈등 봉합의 화해자역할을 하며 공존의 정치를 실현했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알고 있다. 이에 견주어, 옥고를 치른 뒤 70대의 나이로 대통령에 오른 그를 두고, 영국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은 아시아의 만델라로 만델라처럼 승리를 아량으로의 태도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1년 방한한 만델라 전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인권신장과 빈곤퇴치를 위한 평화메시지를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


▲ 김대중 선생 동경 납치 사건 1973. 08.08    

용서와 화해

87년 민주화투쟁과 대통령 직선제 쟁취 후 야권분열로 22년간 숙명적으로 애증관계를 지속해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DJ와)나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였고 협력관계였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라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화해의 물꼬를 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서거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빈소를 찾았으며, 침통한 표정으로아쉽고도 안타깝다. 나라의 거목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표현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우리 시대의 큰 나무가 쓰러졌다. 단순한 풀잎의 쓰러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숲에 영양과 영향을 준 큰 나무의 쓰러짐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충격과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생전의 숱한 상처는 이미 우리 사회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희생이 되었다. 그의 행적에 더 이상 상처를 내지 말고 그의 죽음으로 남겨진 유산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것이 남은 자의 몫이다. 

죽은 나무는 그대로 사용하면 장작이요, 손질하면 책상이다. 그런가 하면 죽은 나무는 죽은 채로 오랜 세월 숲에 서서 숱한 미생물과 다양한 곤충이 산란을 하게한다. 부화한 애벌레들이 줄기 속으로 갱도를 내고, 그 갱도를 따라 물기가 스며든다. 줄기에 다시 버섯이 꽃처럼 피어나면 버섯벌레와 달팽이가 버섯의 육질을 음미한다. 딱정벌레와 곰팡이와 바람의 협공으로 땅으로 쓰러진 나무는 본격적인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노래기나 전갈, 지네는 이 자연의 식탁에서 연일 만찬을 즐긴다. 전체 숲 생물 30%가 죽은 나무에 꼬여 든다. 그 속에 개미 알로, 애벌레로, 버섯으로 탈바꿈하면서 양질의 단백질로 변한다. 상처가 클수록 나무가 이웃 생물에게 베푼 혜택도 클 것이다. 수십 년이 그렇게 지난 어느 8월, 더위가 한창인 숲에서 죽은 나무는 그야말로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는다. 나무는 죽었지만 죽어서도 두고두고 생명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김대중이란 거목이 쓰러진 숲(대한민국)의 자연순환 작용으로, 이제 그가 남기고 간 교훈이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수출되어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산자의 몫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다른 생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다운 실천이다. 그의 몸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가 남긴 영혼과 정신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산자의 몫은 동서화합과 남북의 평화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민족의 하나됨이다. 그래서 무수한 오해를 들으면서 햇볕정책이란 이름 아래 대북지원도 과감히 한 그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당시 그의 영향을 받은 한 정치인(이름이 기억나지 않음)과의 극동방송 인터뷰에서 대북 지원은 국토개발비용으로 생각해야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DJ가 김정일을 포옹했을 때 우리 국민은 감격했다.


▲ 선거유세하는김대중 후보    

촌철살인의 어록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선구적이고 해박한 사상가이자 달변가답게 반 세기의 정치역정 동안 숱한 어록을 남겼다. 군사독재 시절 저항적 메시지와 시대를 관통했던 한마디는 민중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대선 4수 과정에서 비롯된 때로 일관되지 않은 정치적 발언은 불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앞서 밝힌 생활신조와 같은 어록 외에도, 문인은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낀다라는 말로 감옥에서부터 생활화된 독서벽을 대변하기도 했다. 

일찍이 소통�의 중요함을 강조한 그는 1969년 7월19일 3선개헌 반대 시국강연회에서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하는 심리학에 있다고 했으며, 저서옥중서신에서는 최고의 대화는 경청이라고 역설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 도전 때마다 선거전을 관통하는 화두를 제시해 대중에게 선명한 인식을 남겼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이제 40대가 야당의 기수가 돼야 한다는 40대 기수론을 주창, 한국 정치의 새 모토를 만들었다. 

92년 14대 대선 때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97년 대선 때는 40년간 감옥에서나 이국땅에서나 집권 준비를 해왔다면서 이른바 준비된 대통령으로 자신을 향한 거센 색깔론과 불안론을 잠재웠다. 

98년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고 했다. 

14대 대선에서 패배해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 전 대통령은 95년한 줌도 안 되는 특권층들이 국민 대다수를 지배하고 수탈하는 지역패권주의로부터 각 지역이 동등한 대우를 받자라는지역등권론을 앞세워 국민회의를 창당, 오뚝이처럼 재기에 성공했다. 같은 무렵 정치의 유연성을 강조한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란 말도 유행시켰다. 

반면 86년에 (전두환 대통령이) 직선제를 수용할 경우 불출마하겠다거나 92년 정계은퇴 당시 모든 평가는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들어가겠다라던 말은 결과적으로 식언이 됐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용서론을 제기했다. 

경제분야 히트작은 대중경제론이다. 80년대 미국 망명생활 중 하버드대에서 경제의 실질적 주체인 대중이 참여하는 경제야말로 참다운 민주적 시장경제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 85년에는 이를 노조가 하는 일도 모두 옳지는 않다라는 등의 바뀐 생각을 담은 대중참여경제론으로 발전시켰다.

▲ 김대중 선생 석방시위하는 전 윤보선 대통령(왼쪽)과 이희호 여사(가운데)    

생사고비 넘긴 건 10할이 기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일미사를 빠뜨리지 않고 늘 기도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은 1957년 세례를 받은 이후 50년 넘게 의지한 신앙의 대상이었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거나 옥고를 치를 때 그를 지탱케 한 버팀목이었다.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살았던 그의 일생은 가톨릭적 사회관에 기반한 것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에서 세례명을 주신 김 신부님은 토머스 모어는 가톨릭교회에서 분리 독립해 나온 헨리 8세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그와 같은 정치인으로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사회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실천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눌린 자와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하느님이 주신 세상의 행복을 평등하게 누리는 나라를 만들자-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인류의 공통 염원은 자유․정의․평화이며, 인종․종교․지역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교리의 진수81년 5월

22일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에서. 인권은 하느님이 주신 초국가적 권리-76년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 이유 보충서 등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여러 죽음의 고비를 순교의 과정으로 여겼다. 87년 출간한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에서 참 종교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고등종교들은 민중 구원의 차원에서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악과 싸워야 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많은 순교자를 낳게 했다며 각오를 다지곤 했다. 

정계복귀 직후에 주부들이 주로 보는 TV프로그램에서 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데 하루는 집사람이 면회와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나는 집사람이 하나님께 남편 살려 주세요하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집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서운했습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이희호 여사는 개신교 장로이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과 편지, 병원에서 대통령의 배 위를 덮었던 뜨개질 담요, 자신의 손수건, 즐겨읽던 성서 등 네 가지 선물을 관 속에 함께 넣었다. 한평생을 함께 한 남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인 만큼 애틋한 정과 함께 신앙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난다.


 
▲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반갑게 영접하는 감동의 장면 . 200.6.13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참으로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의 아내 이희호. 
  2009년 8월 20일


 

▲ 북측 조문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통일선전부장이 8월 21일 오후 국회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조화를 전달하고 있다.     ©국민일보


참으로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내며,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 나오는 한구절인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  장례식   © 국민일보



글/송기태  
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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