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동안교회 담임 김형준 목사

글|송기태 ,사진|이관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02 [12:12]
▲ 2012 부활절연합성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김형준 목사     © 크리스찬리뷰

과거와 미래를 상실한 고통

이번 부활절 연합집회 강사로 시드니에 온 김형준 목사! 그는 ‘스마트한 차세대’이다.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온 몸에서 발산되는 듯하다. 부드러운 혀가 딱딱한 이빨보다 오래가고, 찬바람보다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긴다는 말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 부드럽고 따뜻함은 깊은 고통의 질곡 속에서 다져진, 소위 연단의 꽃이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나선처럼 반복된 고난이 오늘의 그를 서게 한 주춧돌이 되었다.

“결혼해서 첫 아이를 임신 8개월째 잃어버렸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아내는 병원에 오랫동안 있어야 했고, 아이를 잃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님께서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젊은 연세에 세상을 갑자기 떠나셨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삶의 상실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고,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부친은 (그의) 과거였고, 아이는 미래’였는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상실한 그의 부부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합력을 하여 선을 이룰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등등 성경말씀을 인용한 위로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금호동 무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제가 한꺼번에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니 교인들 사이에는 소위 ‘저주받은’ 줄 아는 일종의 미신이 팽배했어요. 그러니 초청도 안해요. 자연히 교회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엎드려 ‘왜 이렇게 만드십니까?’라고 절망하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목에 까지 찼습니다. 그때 ‘숨통이 막힌다’ ‘숨통이 튄다’는 말을 경험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이해는 안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함께 서계시던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시면서 이런 어려운 일이 아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생겼다. 더 놀라운 것은 그때부터 사람의 얼굴이 아닌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아픔과 성도들의 아픔이 교통하면서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배 사회 때 첫 기도를 드리려면 성도들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그 마음을 읽어서 표현하면 성도들이 울었습니다. 금호동이 소위 달동네였는데, 굉장히 어려운 최악의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안아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보니 한 분 한 분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심방가서 한마디만 해도 그냥 펑펑 우는 겁니다. 저 역시 어려울 때 친구 하나가 입원실에 찾아와 혼자 한참 울다 갔습니다.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상실의 슬픔을 당했을 땐 말이 필요 없습니다. 각 단계마다 방법이 다르지요.”

어느 누구든지 그 마음 깊은 곳에 흐르는 애수가 있고 슬픔, 상실감, 고독이 있기 마련이다. 온몸으로 체험한 무조건 수용과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 부활절 연합성회 강사로 참석한 김형준 목사(앞줄 오른쪽 2번째)가 마지막 날 시드니지역 한인 목회자들과 어린이들의 찬양과 율동을 지켜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회복과 기적의 은총

“남편과 손녀를 먼저 보낸 어머니,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는 아내, 저 이렇게 상처받은 3인의 역학구조 속에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현실의 타개책이었다.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했다. 아픔을 안고 떠났던 유학생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상실과 고통의 아픔을 겪었던 아내가 유학 중에 우울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속에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우울증에 빠지게 만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인생은 참으로 피곤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때 그는 특이한 체험을 회복의 은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뜻밖의 체험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미국 여성이 제가 살고 있는 지역과는 먼 곳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저의 집사람 이름과 저희집 전화번호를 기도 중에 응답받았다면서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풀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민목회를 시작했다. 이때 역시 하나님 은총의 손길을 경험했다.

“목회하다가 6천 불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95년 당시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당시 교회건물이 70년이나 된 낡은 건물이어서 저의 개인돈으로 리모델링을 하게되었는데, 이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푸념식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3일 뒤에 한국에서 제가 회사의 사목으로 섬겼던 튜울립 수영복을 경영하시는 박의배 장로님께서 전화를 해주셔서 장학금으로 6천 불을 보내셨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아내를 병원에서 퇴원시키는 꿈을 꾸고 아내가 집었던 서류를 제가 보았는데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잘 모르는 단어였습니다. 꿈에서 깨어서 영한사전을 찾아보았는데 그 단어의 뜻이 ‘사명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긴 불신과 무기력에서 깨어나서 다시 신앙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일 주일을 금식하고, 다시 삼 주일을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은 단순하고 간단하였습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이 와서 섬겨도 되지만 제 아내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그때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회복과 기적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사명을 새롭게 한, 그는 그동안 정성껏 섬겼던 교회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3040 호주 코스타에서 말씀을 전하는 김형준 목사          © 크리스찬리뷰


이미 예비된 길

“그래서 대책없이 들어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신대학에 교수로 보내주셨고, 아내는 완치를 받고, 딸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신대학은 원래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창신학교가 그 뿌리이다. 이후 강병도 장로가 이 학교를 맡으면서 중·고등학교뿐 아니라 대학까지 설립하게 되었다. 본지와 강 장로의 협력으로 그동안 묻혀진 역사를 다시 회복하면서 호주선교부와의 연결을 시도하면서 학교의 정체성과 바른 역사를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은 선교사 묘역으로 옮겨갔지만 한때 학교 교정에 순직한 호주 선교사들의 개인별 기념비도 세우기도 했다. 이 유서 깊은 학교에서 그는 교목실장과 유아교육과 교수로, 그리고 대학교회를 담임했다.

“창신대학에 있을 때 태어난 딸은 어느새 중학교 1년이 되어서 예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목회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지구촌교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동원 목사님과 별로 관계도 없었고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초청이 온 것입니다. 당시 이동원 목사님은 안식년을 가셔야 하는데 목사님 대신해서 설교할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에게 저에 대한 소개를 받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침례교 목사님이 장로교 목사를 초청해서 당신의 안식년 동안에 교회를 맡긴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결단과 판단은 용기와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동원 목사님과 관계를 맺고 더 구체적으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고, 저의 목회는 더욱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설교가인 이동원 목사님과의 만남은 저의 목회에 귀한 초석이 되었고 지금도 저의 멘토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내는 동안교회의 부교역자 사모들과 더불어서 중보기도사역을 함께 하면서 사모 그룹을 말씀으로 잘 섬기고 있어서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로 갈 때에 당황하지 않고 잘 감당하도록 훈련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명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지구촌교회 수석부목사로 설교를 담당하면서 글로벌상담소를 책임지고 사역했다. 그러다 다시 김동호 목사 후임으로 동안교회에 부임하여 현재 11년째 섬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교단 섭렵’이었다.

“어릴 적에는 장로교 합동 측에서 자랐습니다. 청소년 때에는 어머니께서 개척한 교회가 성결교여서 대학 때까지 다녔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는 통합측인 장신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미국으로 가서 미국장로교소속(PCUSA)으로 있다가, 그 후에는 침례교인 지구촌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다시 통합측인 동안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많은 교단을 거치면서 각 교단의 특성과 장점을 많이 배우고, 이해하고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동안교회는 그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교회였다. 통합측 평북노회에서 가장 큰 교회였고, 많은 목회자들이 오고싶어 했고, 그러한 시도들이 많았던 교회였다. 전형적인 전통 교회였지만, 또 유명한 김동호 목사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이 짙게 배인 교회이기도 했다.

동안교회에 부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얼마되지 않아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특히 청년들은 모두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회는 꾸준히 성장했고 청년들은 더 많이 늘어났다.

“왜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지요.”

겸손히 말하는 그는 목회에 임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사건을 말해 주었다.

“대학부를 지도할 때 운동권의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학생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중세에는 라틴어로 설교했다면서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라틴어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참 많아요’하는데, 이 말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로, 그리고 이 땅의 삶의 이야기가 아닌 관념적인 내용 때문에 현실 속에서 성경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의미로 들려졌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 있어서 설교는 청중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가라는 것과 성경의 언어를 일반생활언어로 바꾸어서 전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공이 상담이어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설교가 무엇인지 많은 생각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 시드니새순장로교회가 개최한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2010년) 강사로 참석한 김형준 목사            © 크리스찬리뷰


복음의 영향력

그는 교회에 부임하면서 세 가지 비전 즉, 회복과 치유가 있는 교회, 성장이 있는 교회, 아름다운 유산을 남기는 교회로 정하고, 이 비전에 의해서 교회의 사역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자 많은 성도들이 치유를 받게 되고, 신앙 뿐 아니라 신앙인격이 성장하고 생활 속에서 신앙의 유산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제가 동안교회 4대 목사인데 2대 목사인 고 송치헌 목사님께서 목회의 기본을 잘 닦아두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여서 정체될 뻔했지만 김동호 목사님께서 부임하셔서 교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때로는 갈등과 혼란으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우리 교회로서는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앞선 두 목사님께서 하신 일들을 잘 정리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다음세대를 위해 잘 준비하는 사역을 통해서 더 나은 교회로 발전하고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전통교회이면서도 한국교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구성원의 40%가 청년으로 구성되어 젊은 교회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줄기차게 밀고나가는 교회의 사명은 ‘삶의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라고 한다.

“이것은 삶의 현장과 교회의 생활이 서로 이분되어서 복음의 영향력을 잃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현장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분명히 알고, 이것을 위해 교인들이 보냄을 받은 선교사의 영성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내면과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매년 200~300명씩 세례를 주고, 매년 300명씩 10년간 꾸준히 성장하였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남은 기간이 15년 정도인데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가 되어서 성도님들을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서 느헤미야처럼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즉 좋은 설교를 통해 교회와 성도님들을 잘 섬기는 목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현재 건축 중인데도 교인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고 했다. 교회를 확장하는 일이나 건축하는 일에 특별헌금하지 않고 경상비를 아껴서 감당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돈으로 잘못 병들어가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에 복음의 본질이 우선 순위임을 강조하는 것과 교회의 불필요한 재정의 낭비를 줄이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큰 교회로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일과 복음의 영향력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역한다고 하였다.

 
▲대양주 목회자 부부 세미나 강사들. 오른쪽부터 김형준 목사, 송길원 목사, 송태근 목사, 이규현 목사     © 크리스찬리뷰

상처 입은 치유자

어쩌면 그의 삶은 헨리 나우웬이 말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상흔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손길과 발길, 그리고 말길이 닿는 곳마다 눈물과 감동 그리고 아프고 상한 심령들이 치유되고 새로운 사명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치유는 세 가지 면에서의 변화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행의 과거가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둘째는 현재의 삶에 임하는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 의미를 추구하게 됩니다. 잘될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어려울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셋째 삶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살아갑니다. 사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치유는 바로 이러한 현상적인 것을 동반하는 변화를 말합니다.”

그는 신앙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알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자아관, 세계관, 가치관이 바뀌어져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리차드 포스터가 말한 것처럼 돈과 섹스와 권력의 사용에 있어서 말씀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목회관 이런 점에서 방향이 분명했다.

“저는 목사를 평신도와의 관계에서 조력자(helper) 촉발자 (facilitator), 감독자 (instructor)라고 생각합니다. 즉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도록 성도들을 잘 돕고, 영적인 능력을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람들이지요.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훈련하고 섬기는 사람이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자는 바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나가는 평신도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름지기 영성과 전문성 그리고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를 즐겨 부르며, 성경은 느헤미야나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묵상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한 과정과 개인의 영성을 잘 볼 수 있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평생 두고 잊지 못할 책이라고 하였다.

“누가 천국의 열쇠를 가진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형식과 외형보다는 내면과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펴볼 때 너무나 좋은 자극과 도전을 주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코스타 집회로 시드니에 몇 번 온 그는 시드니가 낯선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시드니를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소망과 영적 변화의 기회를 주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또 시드니가 세계 어느 나라의 이민자들보다 교회가 연합해서 하는 사역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시드니 성도들을 항하여 “이제 한국교회에서 영향을 받는 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한국에 끼칠 수 있는 시드니 한인과 교회들이 되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이관희|크리스찬리뷰 객원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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