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불러온 믿음의 힘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30 [10:48]
우연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 가난과 장애를 딛고 기독교 문화 창출에 앞장서는 진흥 문화(주) 회장 박경진 장로는 연간 600만 부 달력을 공급한다 .  © 크리스찬리뷰
“우연은 항상 강력하다 항상 낚싯바늘을 던져두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오비디우스는 말했다. 이달에 만난 박경진 장로(진흥문화 주식회사 회장)의 삶의 굽이굽이에 이 ‘강력한 우연’이 세차게 요동했음을 알 수 있다.

“83년 3월 5일부터 23일까지 유럽 여행하면서 관광이란 생각보다 견학이란 생각으로 독일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는 독일에 광부로 취업이민을 가서 간호사와 결혼하여 지금은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고 있지요.

그때 운수업을 하는 친구와 3천 불을 빚 얻어 갖고 갔는데, 그 돈으로 독일 친구의 도움을 받아 유럽 10개국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그 여행에서 굉장한 영감을 얻어왔습니다. 그 이후 회사가 급성장했습니다. 그때 여행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 여행에서 막 달력사업을 시작한 그는 달력에 올릴 그림을 사 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필름, 책, 그림, 슬라이드, 성화 등 기독교 문화와 관련된 물건이면 이유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구입하고 사진을 찍었다. 한마디로 기독교 1번지인 유럽의 기독교문화 체험을 마음껏 하고 온 의미 깊은 견학이었다.

“그때 유럽에서 사온 그림을 화가에게 주고 그 그림을 다시 그리도록 했습니다. 6장의 성화를 그려 성화 달력을 완성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성화달력이 없었습니다. 교회들도 일반 달력에 교회 이름을 인쇄하는 정도였지요.”

대박이었다. 당시 달력 하나를 제작하여 2만 부만 팔면 성공이라고 할 때였는데, 자그만치 이 달력이 53만 부나 팔린 것이다. ‘위대한 생애’라 이름 붙인 이 달력은 인쇄소, 제본소, 배달업체 등에서 매일 철야작업을 해도 감당이 안될 정도로 물량이 밀려들었다. 인쇄소에서 2~3일에 한 번씩 몇만 부씩 찍어야 하니 기계가 쉴 틈은커녕, 직원들도 숨막힐 정도로 바삐 움직여야 했다. 달력사업에 뛰어든지 불과 몇 년만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를 통해 ‘진흥’이라는 브랜드가 생겨났고, 그것을 발판으로 신설동에 빌딩을 건축하고, 몇 년 후에는 성수동에 공장을 설립했으며, 현재 6개의 자회사가 세워질 정도로 번창해 나갔다.

“정말 맨주먹으로 서울에 올라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했습니다. 호구지책으로 언젠가부터 달력 외무 사원을 했지요. 그러다가 처음엔 남의 사무실에서 여직원 한 사람, 책상 하나 두고 제 사업으로 출발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교회를 위해 성화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한국 성화 달력의 시조가 되었지요,

 ‘위대한 생애’ 달력이 대박을 치고, 공장을 시작하고, 나중에 발전하니 인쇄 제본 공장을 시작하고, 기획 디자인부터 제본 납품까지 한 장소에서 원 시스템으로 순조롭게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까지 10년 동안은 어려운 가운데 했지만, 15년은 자리 잡고 안정된 규모 갖춘 제작회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저마다 다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니 그분의 손길 아래서, 직원들이 100여 명, 한 장소에서 일하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간증집회에서 말씀 전하는 박경진 장로     © 크리스찬리뷰

그야말로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는 말이 체험되는 기간들이었다. 빚을 얻어간 여행에서 이토록 대박의 아이디어와 자료를 얻어와 담을 넘을 정도였으니, 최소한의 투자와 최대한의 이윤을 남긴 경제효과 만점이었다. 이를 보면 혹 우연이 ‘안겨준 대박’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연’에 대해 헤르만 헤세가 한 말을 들어보면 결코 우연은 우연히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본래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망과 필연이 그것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이때의 우연을 ‘섭리’ 혹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도 표현한다. 아무리 우연처럼 보여도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생길 조건이 갖춰져 있음을 그의 생애를 추적해 보면 드러난다. 그리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연이란 하나님이 남몰래 일하는 방식이다!'라고 할 수 있다.
 
 
눈물겨운 어린 시절
 
▲ : 시드니순복음교회 간증집회 에 앞서 고향사람들이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왼쪽부터 박경진 장로, 박무신 목사, 서완석 목사     © 크리스찬리뷰

사업이 안정되면서 교계에 그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CBS 재단이사,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회장, 한국기독교구라회 그리고 전국감리교장로연합회 회장 등 교계나 감리교단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다. 맡은 직책마다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면서 물의나 뒷말 없이 깔끔하게 임기를 마치고 후임들에게 물려준 것도 그의 특징이었다.

그의 삶은 망원경으로 조망해 보면 세상 말로 흔히 ‘자수성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 현미경을 비춰보면 ‘신수성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수성가한 그의 삶을 주마간산으로 훑어보자.

그는 충남 서산에서 ‘가난을 대물림’하기 딱 좋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가족을 출산하던 그 당시 그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중에 전염병으로 넷은 먼저 세상을 떠나지만 10남매 가정에서 아홉째로 태어났다. 산모는 옆에서 돌봐줄 산파도 없이 출산
때마다 혼자서 입으로 탯줄을 잘라야 했다. 출산한 날도 산모는 집에 보리 한톨 먹을 것이 없어 출산한 몸을 추스르며 남의 집 보리밭에 가서 한줌 이삭을 따와 비비고, 찧고 쪄서 먹거리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건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놀랍게도 한 눈이 감겨진 장애아였다.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시다 새로 세운 전봇대 밑에 떨어져 죽은 꿩 한 마리를 발견하여 그것을 갖다 주며 볶아먹으라고 하셨대요. 어머니는 꿩을 잘 손질하여 아이들과 함께 맛있게 드셨습니다. 죽은 꿩을 보았을 때 눈이 감겨져 있는 것이 꺼림칙했는데, 복중에 있던 아들의 눈도 그렇게 눈이 감긴 채로 태어났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쪽 눈이 감긴 채로 태어난 그는 장애로 성장하였다. 집에서나 밖에서 언제 어디서라도 그는 놀림감이었다. 늘 따돌림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호적에도 누락된 채 관심 밖의 아이로 성장했다. 그 내력은 이러했다. 당시는 이장이나 구장이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마을 구장에게 여느 때처럼 출생신고 대행을 의뢰했다.

“한 구장, 나 이번에 막내를 또 낳았네. 호적에 좀 올려주게나”
“아이구, 경사 났네요. 그러지요. 그럼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그래, 올해가 무슨 해지?”
“예, 경진년이지요.”
“그럼 경진이라고 해주게나.”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은 ‘경진’이 된다. 그런데 그 한명석 구장이 출생신고를 깜빡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43년에 태어난 뒤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은 호적에 올려지지 않았다.

“55년도 3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학교에서 일제히 호적등본을 내라고 해 면사무소에 호적등본을 떼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37년생 형과 43년생 동생만 올라가 있을 뿐 40년생인 저는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동생 다음 해인 44년 6월 3일자로 본래보다 무려 4살이나 줄여진 채로 제가 직접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아마 본인의 출생신고를 본인이 직접 한 경우는 세상에 저밖에 없을 겁니다.”

초등학교도 한참 늦은 나이에 입학한 그는 가난에 찌들리며, 한쪽 눈의 장애로 눈물겨운 따돌림을 당하며 외톨이로 성장했다. 시골에서 성장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그는 농사에 관한 각종 서적을 탐독하면서 원예재배법과 비닐하우스 조숙재배로 제철보다 때이른 과일과 야채를 시장에다 내다 팔면서 서울로 도망갈 여비를 마련했고, 비록 며칠만에 귀향했지만 실제로 그런 모험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이즈음 그 시골에선 교회가 세워졌고, 성령충만한 젊고 패기 찬 전도사가 부임해 왔었다. 그 전도사의 열성으로 그도 교회에 출석하며 59년 10월 하순, 부흥회 강사로 온 돈 라이스 목사와 하가 선교사로부터 동네 앞 개울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큰 사건‘이었다.

“저는 물 속에 들어가 잠겨지면서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고자 다짐했습니다. 놀랍게도 물에서 올라오면서 거듭나는 새 사람이 되는 믿음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 봉사를 충성스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재무부 회계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불붙기 시작한 그의 신앙은 주일학교 교사, 속회 인도자 등으로 봉사하면서 마음에 그늘진 것들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저의 콤플렉스들이 신앙으로 조금씩 극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눈을 감은 상태로 태어났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안과병원에 한번 가보지도 못한 것이 늘 마음에 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쪽 눈만 가지고 반쪽 자리 인생을 살면서도 더 이상 원망이나 불평, 신세한탄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요, 교회에서는 충성스런 믿음의 일꾼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당시 시골 교회가 건축할 때인데, 그는 경제력이 없어 건축헌금은 제대로 못했지만 건강한 몸으로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저녁에는 교회 건축현장으로 달려갔다. 돌과 모래를 지고 날랐으며, 건축자재를 정리하는 등 밤에도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아서 했다. 물론 낮에도 틈틈이 청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내손으로 성전건축을 한다’는 벅찬 감격으로 신나게 봉사했다.

“제 생애를 놓고보면 아마 그때가 신앙의 절정기가 아닌가 합니다. 낮에 아무리 고되게 일해도 주일예배, 수요예배, 속회예배는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속회날은 반드시 저녁을 금식하고, 주일은 아침을 금식했습니다. 금식에 대한 하나님과의 약속은 무서울 정도로 지켰습니다. 농사 일을 하다보면 품앗이로 일을 해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저녁이 아주 진수성찬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금요일이면 침을 삼키며 돌아섰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굶주리던 시절,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고 나면 얼마나 배가 고픈데 말입니다.”
 
천사 동생
 
▲ 시드니영락교회에서 간증하는 박경진 장로     © 크리스찬리뷰

1960년, 평생 멍에처럼 드리운 긴 그림자요, 얼굴의 혹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던 한쪽 눈거풀이 올려지고, 그 눈이 마침내 빛을 보게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 막내동생 영례가 주선한 겁니다. 참 예쁘고 얌전하고, 심성이 착한 동생이었어요. 그 동생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상경하여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 고사리같은 손으로 일을 해 부모님게 용돈을 드리고, 선물도 해드리던 동생이었지요. 그 마음 씀씀이가 오빠인 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하루는 성루로 급히 올라오라는 기별이 왔어요. 성인이 될 때까지 병원 한번 못가보고 늘 한쪽 눈이 감긴 채 살아오는 오빠가 못내 안쓰러웠던 겁니다. 공장에서 눈칫밥 먹어가며, 먹을 것 안사먹고, 입을 것 안 사입고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오빠의 눈을 고쳐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의 후원을 받고, 서울에 도착한 그는 여러 안과병원을 전전했다. 공통적인 진단결과는 비슷했다. 눈동자는 깨끗한데 20년 동안 사용하지 않아 시신경이 매우 약해졌다는 것이다. 눈꺼풀 신경이 매우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그 신경을 살리는 기술은 아직 없지만, 이마 근육에 연결하여 그 근육의 활종으로 눈꺼풀을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당시 한국의 안과기술 전부라고 하였다.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 그 수술을 받고, 수술 부위의 실밥을 뺐다.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약간 색상이 들어간 안경을 맞춰 쓰니 정상인과 똑같았다. 이제는 ‘반쪽 인생’이 아닌 온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보너스로 눈을 얻은 것과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50% 인생’이란 놀림감에서 벗어난 해방이 얼마 컸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제 평생의 숙원을 풀어준 동생은, 저에게 그 사랑의 빚을 갚을 기회도 주지 않은 채, 68년 어느 날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 우체통에 넣어진 주민등록증만 고향으로 배달되었을 뿐 찾을 길이 없어 허망하게 실종처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군대에 있던 저는 동생이 실종됐다는 소식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습니다.”

오빠에게 눈을 찾아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동생은 그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준 천사였다.
 
신급자족
 
▲ 시드니영락교회 집회를 마친 후 당회원과 기념촬영(왼쪽부터 현정오 장로, 진흥문화(주) 이사 임성철 장로, 이명구 목사, 박경진 장로, 정청훈 장로, 김태익 장로, 노인숙 권사(임성철 장로 부인)     © 크리스찬리뷰

이후 결혼한 그는, 69년 11월 1일, 쌀쌀 겨울바람이 막 몰아치기 시작하던 때 출애굽과 같은, ‘출고향’을 감행함으로써 인생의 BC와 AD가 갈라졌다. 이불 보따리와 냄비, 깨지지 않을 그릇 몇 개를 챙겨 두 남매를 데리고 오후 5시경 서울에 도착하여 난곡동 철거민촌에 집을 풀었다.

“유인상 전도사님 댁 마루였지요, 그 산동네는 포장도 안돼있어 비가 오는 날에는 온통 진흙수렁으로 발이 빠져 걸음을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저의 삶도 진흙 속에 빠진 것처럼 질퍽했고, 어디로 발을 떼야 덜 빠질 것인가를 가늠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일단 그렇게 도착한 다음 날, 재래시장이 세워진다는 예정지에 3평짜리 가게터를 1만 2천 원에 구입했다. 목재 몇 개와 베니어판 몇 장을 사다가 사방을 막고, 지붕엔 슬레이트 한 장으로 거처를 만들었다. 네 식구가 억지로 누울만한 연탄 온돌방을 마련한 것이다. 당장 다음 날부터 생계가 걱정이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청량리에 쌀가게를 하는 고향 형이 생각난 거에요. 그 형의 배려로 그곳에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새벽 3시경 시골에서 쌀을 싣고 올라온 8톤짜리 트럭에서 90킬로짜리 70가마니를 메어나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워낙 체구가 작은 데다 힘도 모자랐습니다. 이런 일이 한 주간에 서너 번씩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리도 모르고, 무거운 자전거를 타본 적도 없었지만 쌀가마를 싣고 배달했습니다. 그저 부딪히며 배우고 익혀나갔습니다. 그 가난했던 시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쌀집에서 일한 덕분에 밥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봉급은 한 달에 쌀 다섯 말, 그러나 주일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마음의 짐이었다. 눈치껏 청량리감리교회에 출석하여 한 시간 예배만 드리고 다시 쌀집으로 달려야 했다.

그 이후 생계를 위해 시작한 것은 보따리 장사였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양말, 메리야스 등을 놓고 팔았다. 물건은 좀 팔렸지만 이익이 워낙 박했다.

그리하여 이번엔 노동일을 찾았다. 그 당시 난곡동은 식수가 가장 시급한 문제여서 우물 파는 일거리는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장비로 시골에서 많이 다뤄본 곡괭이, 징, 망치, 삽 등 간단한 도구만 몇 가지 있으면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장사도 병행했다. 보따리 대신 리어커를 구입하여 주방기구를 팔았다. 시골에서 맨주먹으로 올라와 자치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던지, 퇴근 길에 수저, 젓가락, 주걱, 식칼, 냄비 등 기초생활도구를 구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밤에는 철거민촌 산중턱 공사장에 트럭이 못올라가니 건축용 모래를 운반하는 일도 했고, 연탄배달도 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날들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입에 단내가 났다.

“저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져본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막노동, 건축잡부, 우물파기, 리어카 행상, 페인트 칠... 닥치는 대로 하다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문패주문 받는 일이었습니다. 문패 없는 집에서 주문을 받아 공장에 제작을 의뢰하고, 완성되면 갖고 가서 달아주고 수금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부부는 한 가지 약속을 한 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더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뭐냐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가게에 외상거래를 하지말자고 말입니다. 철거민촌은 매일 아침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싸우는 소리가 요란한데 그 이유가 십중팔구는 외상값 문제였습니다. 외상값 두고 그냥 이사가려고 짐 싸다가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돈 없으면 차라리 깨끗이 굶자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좋은 길을 예비해주실 것이다.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아닌 신급자족을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때 쯤, 그는 권사 시절, 유인상 목사가 감리교 총회신학교에 진학하기를 강권했다.

“유 목사님은 저에게 은인과도 같은 소중한 분입니다. 제가 상경하던 날, 당시 전도사님이던 목사님 댁에 짐을 풀고 서울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목사님은 사택을 교인들의 생활터전으로 개방하시고, 가진 것을 늘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베푸셨습니다. 그날도 목사님이 저의 신학교 입학을 위해 등록금과 함께 구비서류 일체를 신학교에 이미 제출한 뒤여서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저는 갑자기 신학생이 된 것입니다. 생업에 얽매인 가난한 장사꾼이었던 제 처지에서 신학생이 된 사실은 얼마나 감동했는지요. 벅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신학을 한 것은 나중에 교회 봉사와 사업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뚜렷한 기술이 없던 그에게 생계를 위한 그의 업종은 주변 환경에 따라 자꾸 바꾸어주어야 했다. 문패판촉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삶이 참으로 막막했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보였다.

“그날도 문래동에서 난곡동 집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우연히 인쇄소 유리창에 붙어있는 ‘영업사원 모집’이란 글씨가 제 눈에 크게 확 들어왔습니다. 이건 또 뭔가 하여 유리문을 밀고 들었갔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저는 민병선입니다. 문패장사보다는 훨씬 수입이 좋을 테니 달력 영업을 한 번 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자본금이 드는 것도,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인쇄소에서 챙겨주는 견본을 갖고 고객을 찾아다니며 영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날의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크고 비밀한 것을 예비해 놓으신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다.

그날 황혼이 깃들 무렵 달력 샘플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그만 약국이 눈에 띄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저 약국에 가서 영업을 시도해보아라’
 
어설프기 짝이 없는 말투로 샘플을 보여주며 소개했는데, 주인은 의외로 큰 반응을 보여왔다. 한꺼번에 한 장짜리 연력으로 된 캘린더 200매를 주문했다. 영업시작 한 시간 만에 큰 성과였다. 자신감과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시장에 들러 건어물 상회, 생필품 가게, 한복집, 정육점, 쌀집 등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들어가 ‘지금은 홍보시대 달력만한 PR 수단이 없다고 역설하니 반응이 나타났다. 그렇게 뛰어든 첫해 3개월 만에 영업성과를 결산하니 쌀 20가마에 해당하는 큰 수확이었다. 아무런 자본도, 시설도 없이 시작한 영업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결과였다.

이렇게 그는 달력 영업에 뛰어들어 직접 제작회사를 차리고, 유럽 여행을 통해 대박을 터드린 것이다. 회사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여러 방계회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도서출판 진흥을 통해 양질의 기독교 서적을 보급했고, 진흥 달력을 통해 무명의 기독교 작가들에게 전시기회를 주기도 했다. 홀리투어를 통해 외국 성지순례는 물론 특히 한국 내 유서깊은 기독교 유적지를 탐방하며 역사를 일깨우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한국 교회의 환호를 받고 있다.
 
성년에 국가의 빚을 갚다
 

▲ 시드니의 아름다운 명소들을 카메라에 담는 박경진 장로     © 크리스찬리뷰

민족적으로 큰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그는, 누구보다 없는 자의 서러움을 잘 이해하고 감싸주려 했다. 제일 먼저 대내적으로는 직원들의 해외연수와 대외적으로는 해외입양아 초청이었다. 외국에 ‘팔려간 내 민족’이 눈에 밟혔다.

“96년 창사 20주년 되던 해였습니다. 20년이면 성년인데, 우리 회사도 성년이 된 거지요. 제가 살기 위해서 시작한 기업이 이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남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자고 했습니다. 저 자신이 외국 여행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었으니 사원들에게 해외견학의 기회를 많이 주고자 했습니다.

10년 이상은 미국, 5년 이상은 일본이나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견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관광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해외관광이 흔치 않았던 때라 직원들의 사기가 진작되었습니다.

해외 입양아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중문화 자녀들이 적응을 못하고, 갈등을 갖고 산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이중문화 즉, 아버지 문화와 어머니 문화의 사이에서 갈등, 열등감으로 사는 아이들이 비뚤어진 시각으로 사회를 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 초청하여 ‘한국에 와봐라 너희 어머니도 후진국 별볼일 없는 사람이 아니다. 5천 년 역사와 문화가 있는 선진국 대열의 문화의 나라가 가슴에 흐르고 있다. 별볼일없는 신분의 여성이 아니다 와봐라’하여 제일 먼저 독일에서 18명이 왔습니다.”

그들이 어머니의 나라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설악산에서 제주도로, 고궁에서 청와대로, 산업체 현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직원들의 가정에 민박하면서 한국을 체험하다 보니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전언이 날아들었다. 그 다음 해에는 미국에 의뢰하여 18세~28세 남녀 청소년으로 한국에 와보지 않은, 대도시가 아닌 한국문화를 접해보지 못한 소
도시, 지방 농촌으로 입양아들을 초청한다고 했더니 23명이 왔다고 한다.

정체성을 회복하니 대한민국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하고요. 이런 것을 보고 한두 번 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하여 한 것이 올해로 17년째네요. 올해는 골고루 미국 캐나다 호주 노르웨이에서 25명이 옵니다. 40대인데도 한국을 한 번도 못봤다.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 한번 갈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하여 올해는 40세와 42세 두 사람이 끼어있습니다.”

이 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 일년 내내 이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직원을 따로 뽑았다고 한다. 그 직원이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나자 이제는 미국유학을 다녀온 아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일은 언제까지든지 해야겠다고 하는데, 감사한 것은 우리 아들이 이 일을 잘 이어받아서 일년 내내 인터넷에 올려놓고 준비를 합니다. 계속 그들과 교류하면서 즉각 한 해 마치면 다음 해 것을 준비합니다.”

가난으로 배움에 굶주렸던 그는 돈 때문에 배움을 포기하는 학생들을 돕고자 진흥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조그만 빌딩을 장학 사업 위해 내놓아 그곳에서 나오는 임대료, 간증집회 사례비나 제가 낸 책 수입료 등으로 진흥장학재단을 설립해 4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합니다. 고등학교 전학년 장학금입니다. 1학년 때 장학생 선발되면 1년에 4번 줍니다. 2, 3학년까지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 한 계속 지급합니다. 1년에 6, 7천만원 지급하는데, 장학생수가 더 늘어가는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가며, 하나님께 늘 빚진 마음으로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였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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