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창립 30주년 맞은 동산교회 황기덕 목사

글|김명동,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7/31 [10:28]
▲ 동산교회 30주년 기념행사를 마무리하며 “지난 30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황기덕 목사  ⓒ크리스찬리뷰    

동산교회가 지난 7월로 교회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동산교회는 30주년 기념행사로 ‘한 영혼 초청 행복콘서트’와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관광’을 개최했다. 또한 기념사업으로 ‘아프리카 우물파기를 위한 바자회와 모금저금통’, ‘캄보디아 단기선교’ 및 8회에 걸친 ‘선교세미나’, ‘30주년 기념책자’ 등을 발간하기도 했다.

황기덕(57) 목사는 “30년을 지나는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로 수많은 인도하심과 풍성함을 경험했다”며 “지난 30년을 돌아보고 또 다시 30년을 바라보는 마음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벅찬 감격이 넘친다.”고 말했다. 

황 목사는 “지난 30년은 오직 그분의 은혜였고 앞으로의 30년도 다음 세대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시드니 서부지역에 사는 한인들을 위한 교회가 없었던 이민 초창기에 1982년 7월 파라마타 지역에 서부동산교회가 세워졌다. 그 이후 블랙타운과 파라마타로 세 번의 교회 이전이 있었다. 왼쪽부터 첫 번째 교회(파라마타), 두 번째 교회(위, 블랙타운)와 창립예배를 마치고(아래), 세 번째 교회(파라마타) ⓒ동산교회 

시드니 서부지역에서 82년 창립

“30주년 기념행사 마무리로 9월 말, 10월 초에 조병호 박사님을 초청하여 성경통독과 아울러 성경전체를 볼 수 있는 강의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조병호 박사님의 저서인 ‘성경과 5대 제국’이 20만 부나 팔렸는데 성경통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교인은 물론 지역주민들을 모셔서 신앙적으로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실 그동안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와 땀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그리고 지나간 30년을 자랑하기보다는 30년이 계기가 되어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새로운 출발이랄까, 그런 의미 말입니다. 서른 살된 교회로서 밀린 숙제들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책임감을 많이 느낍니다.”

 현재 출석교인 4백여 명에 달하는 동산교회는 규모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시드니 서부지역 복음화를 위한 선교적 각도에서 창립된 이후 지난 시절 동안 한 번의 분열도 없이 묵묵히 교포사회의 복음화를 선도해 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동산교회는 지난 1982년 7월 18일 시드니 서부지역에 사는 한인들을 위해 파라마타에서 창립됐다. 서부동산교회라는 이름으로 손동식 목사와 장년 16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린 것이다. 당시 시드니지역에 한인교회는 5여 개에 불과했다. 이후 블랙타운으로 교회를 이전했다가 다시 파라마타로 돌아왔으며 지난 2002년 현재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매입을 하고 2008년 새로운 성전을 건축, 헌당했다.

“사실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분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초창기 한인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저희교회는 첫 시작이 분열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파라마타 지역에 한인교회가 없었을 때 선교할 마음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손동식 목사는 95년 9월 파라과이 선교사로 출국할 때까지 동산교회의 기틀을 닦았다. 손동식 목사에 이어 95년 10월 1일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황기덕 목사는 교회성장과 성숙을 위한 획기적 방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즉, ‘기본’에 충실한 목회, ‘균형’ 잡힌 목회스타일이다. 부산 수안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겨온 그는 이민목회가 매우 부담스러운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목회의 연륜과 성숙함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하나님께서 좋은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는 기본적인 것을 잘하자, 사람도 그렇고 목회도 그렇고 기본적인 것에 충실하자 그리고 균형 잡힌 목회, 균형 잡힌 교인, 이 부분들에 초점을 맞춰 목회를 해왔습니다.

사실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영의 양식을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요. 그래서 설교가 성경 66권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요. 그리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 밖 다른 일에는 곁눈질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제 역량의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죠.”

황 목사는 많은 신앙인들이 가장 기초적인 신앙생활도 지키지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높은 신앙적 이상만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며 주일예배와 기도생활, 성경읽기 등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본분은 그것이 지켜질 때까지 반복해서 강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황 목사의 외침은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전달됐다. 교인들은 선교, 구제, 봉사 등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교회는 성장했다. 목회자 한 사람이 올바로 설 때 교회전체가 얼마나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황 목사는 동산교회가 결코 급성장한 교회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꾸준한 성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의 순수함과 열정의 결정체가 바로 자연스러운 교회성장으로 이어졌다고.

“또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을 저희교회에서 했거든요. 하태식 목사님과 함께 교인들을 훈련시키면서 자연히 중보기도학교가 생기고 이런 부분이 우리교회에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동산교회가 새 성전 건축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1999년. 이후 9년여 만인 2008년 3월 9일 헌당예배를 드리는 감격을 맞이했다. 당시 호주 한인교회들 중 이미 지어진 교회당이나 다른 건물을 구입해 사용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부지 매입부터 건축까지 모든 단계를 전부 한국인의 손으로 일군 것은 동산교회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대다수의 이민교회들은 그나마도 여건이 되지 못해 다른 건물을 대여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형편이다.

▲ 동산교회가 걸어온 역사의 현장들 ⓒ크리스찬리뷰 & 동산교회

450만 불 들여 성전건축, 이민교회 역사에 우뚝

동산교회가 새 성전 건축이라는 큰 역사에 나선 것은 미래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기존 예배당은 교통은 편리했지만 주차 공간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136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재였기에 관리 및 사용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게다가 교회에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전을 지으려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어요. 당시 저희 교회가 건축을 할만한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한 번은 각 부서에 앞으로 우리교회가 어떻게 해 나가면 좋겠는가, 이상적인 교회상을 백지에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어요. 그런 후 오후예배 때 각 부서별로 발표를 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여기에서 공통적인 문제가 공간의 부족이더라고요. 그래서 예배당을 바꾸기로 하고 이를 위해서 파라마타에서 10여 분 이내의 교회들은 다 문을 두드려봤어요. 혹시 이 교회당 팔 생각이 없느냐, 한 50군데 이상을 다녔나 봐요. 그래도 구하질 못했어요.”

동산교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던 2002년 새 성전 건축을 결의하고, 그해 10월 마라마타 지역에 건축 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오랜 기도와 준비기간을 거쳐 카운슬 허가를 받아 2007년 3월 공사를 시작했다.

“450만 불 들여 완공을 했는데요. 사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없었어요. 우리 교인들이 너무 수고하셨어요. 아픈 헌금들도 많았어요. 방금 결혼한 청년들인데 집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을 건축헌금으로 내놨고요. 권사님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운데도 만 불 정도를 선뜻 헌금하신 분들도 있어요.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해요.”

그러나 이때에 목회의 위기가 찾아왔다. 교회 건축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몸져누울 지경에 이르렀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 450만 불 들여 성전을 건축, 지난 2008년 3월 9일 입당한 현재의 동산교회 전경  ©크리스찬리뷰

“건축을 시작하면서 장로님들이 목사님 원하시는 대로 다 하세요, 하면서 맡기셔서 편안하고 좋았는데 한 주 이자만 3천 불, 한 달에 만이천 불입니다. 큰 돈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자를 2년 동안 냈어요. 겁이 났습니다. 사실 전 지나칠 정도로 평화주의, 안정주의 목회 스타일을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 건축이라는 모험을 시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믿음이 없었죠. 자신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했던 교인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죠. 이때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면서 황 목사가 깨달은 것은 교회당 건축 역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는 것이므로 기도 없는 교회당 건축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2년 만에 전 교회당 건물 가격이 올랐어요. 총회에서도 도움받고요. 사실 그동안 총회를 찾아가 못하는 영어로 도움을 수없이 구했습니다. 참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교회당은 동산교회의 사명과 황기덕 목사의 목회 철학을 고스란히 담았다. 예배실과 교육관, 식당, 그리고 큐티실 목양실 등으로 꾸며져 있는데 예배실은 다목적 센터로 이용되고 있다. 사실 교회당을 건축하고 난 뒤 발표회나 연주회 그리고 결혼식 등 시드니에서 많은 문화행사를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다.

“한번은 길 건너편 성당에 불이 나서 새로 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건축하는 동안 우리 교회를 예배장소로 빌려주었습니다. 베풀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호주 교회와 함께 호주인 노숙자들을 위한 점심을 매일 제공하면서도 불편하거나 번거로움보다는 기쁨과 보람이 더 컸거든요. 한인교회가 호주교회와 사회로부터 늘 도움만 받는 입장에서 도리어 베풀고 도와주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황 목사는 “건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며 “저희 교회 성도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이 되는 역사적인 성전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글학교, 노인대학 그리고 선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동산교회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피지, 카자흐스탄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특히 장애인 사역, 원주민 사역 등을 위해서도 힘을 쏟고 있다.

▲ 창립 30주년 기념예배 장면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와 깊은 인연 황 목사 가족

부산이 고향인 황 목사는 불신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의 꽃을 피워갔다. 교회생활에 열심있는 그를 목사와 교인들은 “넌 나중에 커서 꼭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부추김과 환경으로 인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장신대를 졸업한 그는 부산 수안교회에서 전도사로, 부목사로 목회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기도 동지요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 권화숙(53) 사모를 만났다.

그런 후 1989년, 그해는 호주 선교사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지 꼭 10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였다.

“호주선교 1 백주년을 맞이하여 총회는 한·호 선교 1백주년 기념대회를 갖기로 결의했어요. 그래서 호주 선교지역인 부산·경남 지역의 5개 노회가 부산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선교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지요. 생존해 있는 호주 선교사들과 가족 40여 명도 한국으로 초청되었고요. 그때 간사로 그 대회를 섬긴 것이 계기가 되어 2주 뒤에 있었던 호주대회를 위해서 시드니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사실 황 목사 가족은 호주 선교사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황 목사의 딸은 헬렌 맥켄지(한국명 매혜란), 캐서린 매켄지(매혜영) 자매 선교사들이 설립한 일신기독병원에서 태어났고 병원의 아기는 호주 여선교회가 보내준 선물로 자랐다. 아내는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금성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황 목사가 섬겼던 수안교회 역시 호주 선교사 왕길지 목사가 설립한 교회다.

“한호선교 1백주년을 맞아 간사로 섬긴 것이 벌써 23년 전입니다. 그런 후 2009년 120주년 기념대회 때에도 우연히 시드니교역자협의회 회장을 겸하고 있었기에 호주연합교단 총회장과 함께 호주 공동대회장으로 섬기는 영광스러운 은혜를 입게 되었어요. 그리고 역사적인 한·호 선교 120주년 기념대회를 동산교회에서 가졌는데 호주 정부에서도 장관과 시장이 참석하고 전 현직 총회장 등이 참석해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을 노고를 기렸습니다.”

황 목사는 “이번 30주년 기념행사에 각 선교지에서 섬기고 있는 선교사들을 초청해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며 “이제 한국교회는 반짝 선교, 요란한 선교, 드러나는 선교 등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장신대학교대학원 목회학박사 과정에 있는 황 목사는 선교를 전공하고 있다.

황 목사가 선 굵고 강한 목회를 지향하는 이면에는 권화숙 사모의 세밀하고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목회가 가능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방송통신대학을 졸업, 공무원으로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시드니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권 사모는 부지런함과 친절, 다양한 교육경험을 토대로 오늘까지 든든한 목회조력자가 되어주고 있다. 권 사모는 현재 호주 가정상담학교(AIFC)를 섬기고 있다.

권 사모와의 사이에 예지(24)와 예인(23) 두 딸을 두고 있는 황 목사는 판소리를 완창할 만큼 풍부한 감성을 가진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대학시절 명창 박동진 선생님께 배웠어요. 한·호선교 100주년 기념대회 때 판소리 완창을 했는데 이후 가끔 이곳저곳에서 요청을 해왔어요. 그러면 기꺼이 가서 판소리 완창을 해주곤 했는데 시드니에 와서도 몇 번 완창을 했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판소리에도 끼가 좀 있는 것 같아요.”

황 목사는 입을 조그만 벌리고 웃었다.

 
한인사회 버팀목서 열방으로

동산교회 성도들에게서는 철저한 순종과 봉사, 순수한 믿음이 공통적으로 엿보인다. 황 목사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교회의 모든 사역과 봉사에 먼저 나서는 모습들이 쉽게 발견된다.

선입관일까. 황 목사는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의 목회자다. 그러나 한 번 이야기를 하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교회란 뭘까. 목회 성공이란 뭘까. 이상적인 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고 있고요. 욕심 없이 파라마타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됐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교회 참 좋다. 그런소릴 듣고 싶어요. 이번 30주년 행사를 마친 후 들어 온 꽃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줬는데 어찌 좋아들 하는지요.”

황 목사는 이 말 끝에 한마디를 보탰다.

“이웃들과 정말 잘 살면 좋겠어요.”

그는 교회의 존립과 목적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 또 교회의 모든 계획과 비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 그는 기본에 충실한 신자를 양육하기를 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려는데 동네 한 호주 여인이 큰 접시를 들고 교회를 찾았다.

  “목사님, 제가 직접 만든 과자입니다. 맛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이웃들과 잘 지내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교회 현관을 나서는 순간 이웃의 한 호주 여인이 직접 만든 과자를 들고 황기덕 목사를 찾아와 30주년을 축하했다. ⓒ크리스찬리뷰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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