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나환자들의 친구’ 매견시 목사 자서전-3

부산,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

제임스 노블 맥켄지,번역 지응엽 | 입력 : 2012/07/31 [11:02]

▲ 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    

한국 교회, 높은 수준의 세례규정

한국의 선교사업은 이때까지 다른 어떤 곳보다 가장 많은 열매를 맺어왔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출발부터 한국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였다. 상당히 많은 교회가 목사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임명된 7명 중에서 한 명은 아직도 미선교 지역 남아 있는 외딴 섬으로 파송되었다.

그리고 매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임명되는 새 목사들 중에서 3명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한국 교회는 처음 시작부터 완전히 재정적으로 자립하였고 자기통치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세례를 받을 사람에 대해서 선교사와 지방 출신 목사와 합의 하에 엄격한 규정을 두기로 했다.

즉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심어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어야 했다. 이와같이 세례에 대한 엄격한 규정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영국 본국에서도 이러한 높은 수준의 세례규정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예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앞서 설명한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의 그 자리에 ‘토마스 기념교회’가 설립되어 있다. 한국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이 세계 2차 대전의 시작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추방되었을 무렵(1938년경) 1천여 명의 교인이 이 ‘토마스 기념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모이는 교회는 평양에서만 그 당시 17개나 되었다. 그 중에서 몇 교회는 2천 명 이상이 예배에 참석하고, 일반 평일의 기도예배에 1천 명 이상의 교인이 참석하는 교회도 있었다.

나는 고향인 글라스고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의학훈련도 어느 정도 받은 경험이 있으므로 나는 한국에 도착한 첫 해에 ‘호주장로교선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부분적으로 책임지고 일을 맡고 있다가 얼마 안되어 나병 선교사업의 총책임자인 일을 맡게 되었다.

나병 선교사업이 독립 사업체로 서게 된 것은 그 사업 자체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인정되어 수용소 건물 건설비와 운영비를 선교회에서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선교회는 총감독원을 포기하고 「나병 환자 수용소」자체의 책임 하에 운영토록 하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그 당시 나병은 한국에서 상당히 위험수위에까지 되어 있었으며 주로 남부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공포감에 휩싸여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애를 쓰고 수 많은 환자들이 한 집에서 한 방에서 건강한 가족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또한 같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나환자라는 사실이 발견되어 알려지면 환자는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게 되고 모두에게 버림을 받는다.

 
나병 선교 사업의 총책임자

부산의 「나환자의 집」은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산의 도심에서 바로 바다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도심에서 한 시간 정도의 도보거리였다. 이곳에 입소를 원하는 사람은 매일 있었는데 정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입소할 방이 준비되는 대로 입소허가증을 발급하여 입소시켰다. 그들 중에는 걸을 수 없는 사람뿐 아니라 기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의 집」으로 오는 길은 해변을 따라 항구를 돌아 3마일이나 되었다. 이런 환자들의 수송을 위하여 병원선을 운영하여 그들의 하늘 가는 마지막 길을 도와 주었다. 나는 어느 날 병원선의 상륙지점에서 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서 일어난 일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병을 잃고 있는 한 어린 소녀를 내 발 앞에 내려놓았는데 그 어린 것이 나뭇잎사귀 떨듯 떨면서 얼굴을 들고 나에게 물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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