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생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9/25 [10:34]
당신은 매일매일의 삶이 더없이 아름다운 요소들로 둘러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가? 문제는 그것을 당신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을 인식하고 음미하는 삶을 살아 가느냐….  아니면 그런 것을 마음에 담고 누리기에는 너무 분요하고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 아름다움의 모습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저물어 가는 노을로, 어린 아이의 웃음소리로, 새들의 재잘거림으로, 은은한 커피의 향기로, 여름을 알리는 연 초록의 새싹으로, 때로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의 싱그러운 미소로 당신의 삶과 주변을 감싸고 있다. 아름다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어떤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아름다움을 느끼고 인식하는 게 첫 걸음이 아닐까? 주변을 찬찬히 살펴 보라. 당신의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의 요소를 전혀 갖지 못한 인생이란 없다. 다만 자신이 인생의 아름다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아름다움과 행복은 이미 내 삶 가운데 주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생각할 때 이국적인 해변이나 아름다운 예술품, 또는 예쁘고 특별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꼭 그런 것만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들이 진정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들인가? 아름다운 인생이란 이미 주어진 작은 아름다움의 꽃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드는 행복의 부케와 같은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이미 수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그대를 감싸고 있지 아니한가!  

두 번째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도 말고 그렇게 행동하지도 말라. 클로버라는 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명 토끼풀로 알려져 있는 식물로 실제로 토끼들이 좋아하는 풀이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클로버를 보고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낯이 설은 타향에서 마치 친구를 만난 듯 친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서 그런지 우리 집 마당에는 유난히 클로버가 많이 자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집 마당뿐 아니라 어디에서고 쉽게 발견되는 게 바로 클로버인 것이다. 잔디에는 별로 유익하지 못한 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구태여 나는 그들이 밉지는 않다. 오히려 사랑스럽고 은근히 좋다.

마당의 클로버를 관찰해 보면 날마다 면적이 넓어지고 세력의 판도가 확장된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번식력과 생존능력이 대단하다. 정원을 정성 드려 가꾸는 분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천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매우 친하게 느껴진다. 다소곳한 잎도 좋고, 조그만 꽃도 신비하고 예쁘기만 하다.

어느 날인가 교회 어른들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시드니 교외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야유회를 갔었다. 그곳 잔디에도 클로버는 예외 없이 자리를 틀고 예쁜 잎들이 소복이 모여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가지고도 가슴이 설레던 학창 시절이 생각이 났다. 계집아이처럼 네 잎 클로버를 찾아 시집 갈피에 소중하게 말렸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가슴에 젖어왔다.

그날도 혹시나 해서 클로버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늘은 네 잎 클로버를 찾을 수 있을까? 잠시 잎들을 헤치고 살펴보았지만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때 마음속에 깊이 다가오는 한 가지 생각! 아! 그렇구나. 클로버는 세 잎이어야 정상이구나. 실제로 네 잎 클로버는 기형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네 잎 클로버를 찾고 그 네 잎 클로버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제 클로버는 세 잎일 때 가장 무난한 것이다. 꺾이고 잘리는 비운의 운명이 안 되는 것이다. 세 잎 클로버로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절대 다수의 클로버는 세 잎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 잎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늘 네 잎 클로버를 찾아 다니는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가 네 잎 클로버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아마 그런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 세태 풍자적 용어가 바로 ‘공주병, 왕자병’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열등감의 또 다른 은폐 방법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모두가 무엇인가 달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모두가 무엇인가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표현법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는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소망하고, 세상은 또한 특이한 것을 찾아 헤맨다. 그게 아름다움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자칫 그런 세태에 휩쓸리고 생각 없이 따라 살아가다 보면 보통 또는 평균의 사람이 되는 것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잊고 살아갈 위험이 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풍속도에 휩쓸려서는 안 되겠다. 무엇인가 보통을 뛰어넘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기형을 만들려 해서도 안 되고 기형을 찾아 나서는 인위적 삶의 모습이 있어서도 안 되겠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낼 줄 아는 자연스러움과 진솔한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하겠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보기 좋고 더욱 향기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정직과 진실에서 오는 강함과 자유를 구가하는 아름다운 세 잎 클로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인에게 주어진 재주와 현실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바르게 사용하는 인생이 아름답다.

여러 해 전에 읽었던 <오체 불만족(五體 不滿足)>이란 책이 생각난다. 저자인 오토다케 히로타다군은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다. 성장하면서 10cm 남짓 자라난 팔다리로 그는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초, 중,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명문 대학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많은 장애인들에게 소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런 신체적 ‘특징’을 ‘특장’이라고 말하며 ‘초개성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별한 장점이라는 말이다. 손과 발이 없는 것이 장점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용감하고 대범한 논리요 자기 긍정인가?
그뿐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팔다리가 없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이런 자신감과 확신 속에서 그는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자세인가? 이런 인생이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신체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영적 장애 성도들을 흔히 만나게 된다. 환경이나 달란트가 다르다고 해서 결코 열등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가 내게 없다고 내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이미 허락하셨다. 내가 그것을 발견치 못하거나 남과 비교함으로 사장시키기 것이 문제이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장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똑같이 잘할 수가 없다면 각자 개성에 맞게 잘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달란트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개성이 주어졌고 그것을 통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다.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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