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자장’도 하나님이 쓰신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01 [12:21]
영적전쟁의 핵무기

우주 만물에 하나님이 쓰시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기상천외한 것들을 사용하여 엄청난 일을 이룬 기록들이 쏟아져 나온다. 모세의 마른 막대기, 삼손의 당나귀 턱뼈,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 어린 아이의 보리떡,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 여리고 전투에서는 총칼이 아니라 양각나팔과 외침만으로 가뿐히 승리케 하는 등 기적과 기적의 연속들이다. 하나님이 쓰시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핵무기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자원 재활용의 전문가이시기도 하다.

 한국판 전도에도 이런 버전들이 많다. 고구마 전도, 호박 전도, 콩나물 전도, 두부 전도, 부침개 전도, 스마트 전도, 브릿지 전도, 가죽세트 전도, 백지 전도 등등 영적 전투에 갖가지 무기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번 달에 우리는 이 무기들 가운데 등장한 ‘자장면’에 주목한다.

흔히 사람들은 ‘웃기는 자장’이란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웃기는 자장’도 하나님이 쓰시니 정말 웃기지 않게 훌륭한 전도의 핵폭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무기를 다루는 전사는 박권용 집사(대구 동해반점 대표)이다. 그는 자장면 하나로 이 땅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려보는 ‘국보급 인간문화재감’이었다. 
 
▲자장면 전도왕으로 알려진 박권용 집사. 그는 60평생 처음으로 해외에서의 간증집회를 시드니에서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그가 자장면으로 종횡무진하게 된 것은 깊은 홍역을 치르고 난 이후였다. 상처가 약이 된 케이스였다. 안수집사 17년으로 봉사했지만 장로 피택에는 두 번이나 떨어졌다. ‘장로’가 교회에서 계급은 아니지만, 성도들에게 ‘거절당한 느낌’은 당연히 뼈저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대개 이 정도면 ‘수 틀어져’ 교회를 옮기는 게 다반사인 게 한국교회 현실이다.

그러나 ‘의리의 박권용’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다. 호렙산에서 부름받은 모세에게 마른 막대기 하나가 민족의 지휘봉이 되듯이, 그의 인생과 함께 해온 ‘자장면’을 통해 ‘순회전도자’로 새롭게 쓰임받기 시작했다. 한 교회의 장로를 뛰어넘어 ‘한국의 장로급’으로 거듭난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혁명

학력 : 초등학교 3학년 중퇴
병력 : 방위병 6개월 소집해제
경력 : 자장면집 주인

유달리 가방끈 길이와 명품가방 여부를 따지는 한국 사회, 군대문제엔 냉철하리 만큼 무섭게 따지고, 직업의 귀천을 유달리 재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소개로는 당연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만큼 한국의 ‘사회적 담장’은 높고 거칠다. 그러나 이 학력과 병력과 경력을 뛰어넘어 종횡무진하는 활약상은 눈부시다.

대충 눈에 뛰는 것만 추려보자.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고, 그가 살고 있는 대구의 명문대학인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 경영자과정 강연을 필두로, 서울까지 진출하여 한양대, 명지대, 경원대, 부산으로는 동아대, 다시 한동대, 창신대 등 대학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고 강의를 척척 해낸다.

6개월 방위병 출신이 국방부 안보강사를 비롯하여 미8군, 사단급, 연대급 군부대에 초청받아 강연하고, 교도소, 대한민국 최고급 공무원 훈련기관인 중앙공무원 연수원은 불려가서 그의 삶과 경험을 나눈다. 장로 피택에 두 번이나 떨어진 그가 전국의 유명 교회와 CBS, CTS에 단골 간증자로 불려간다.

KBS의 아침마당. 이것이 인생이다.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신인간 시대를 비롯하여, MBC 임성훈의 특별한 아침, 황인용 토크쇼, 칭찬합시다. 길거리 특강을 비롯하여 CNN 방송에까지도 소개되었다. 여기에다 그의 고향인 합천군 명예군수 1호,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들의 재임시절 청와대 특별초청까지 받았다면 분명 그의 삶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40년 철가방 인생을 살아온 자장박사 박권용 집사. 그는 부인과 함께 대구에서 동해반점을 운영하며 주방일과 함께 손님에게 직접 서빙도 한다. <사진제공=국민일보>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첫째, 그의 유명세 치고는 너무 작은 집이라는 것이다. 그의 정도라면 대구에서 제일 큰 중국집에 최고급 인테리어로 잘 갖춰졌을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고작 보증금 1천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내는 소박한 중국집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의 유명세 정도라면 주방장과 세련된 웨이터들의 감독이나 하고 고급 손님들 안내나 하면서 폼이나 잡을 줄 알았는데, 직접 주방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고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집 거실 4면에 가득 채운 진열된 상장과 감사패 등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5척 단구의 아담한 외모에 털털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다가온다. 마치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며 혁명을 일으킨 혁명군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식인의 허위의식에 불을 지른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과 자장면이 어우러진 드라마 같은 삶을 추적해 보자.
 
▲40년 철가방 인생을 살아온 자장박사 박권용 집사. 그는 부인과 함께 대구에서 동해반점을 운영하며 주방일과 함께 손님에게 직접 서빙도 한다. <사진제공=국민일보>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첫출발

 합천군 봉산면 깡촌에서 태어난 그는 3살 때 집 나간 어머니, 그리고 새어머니를 얻어 돈벌이 나간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니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할머니 손에서 그는 굶기를 밥먹듯 하며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친 그는 열한 살 때, 가난과 굶주림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소년의 꿈을 싣고 대구로 나갔다.

“할머니, 대구 가서 돈 마이 벌어와 잘 모실께요. 그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해잉.”

데리고 있어봐야 속수무책인 손자의 손을 잡으며 할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부디 야물게 살아레이. 절대로 나뿐 짓일랑 하지말고 착한 사람되거레이.”

동네 어른들은 “부엌 쥐는 굶어죽는다는 법이 없다”면서 객지에 나가면 음식을 배우라고 했다. 그 말을 명심한 그는 화교가 주인인 중화요리집에 들어갔다. 그곳에 가니 군대계급 이상의 위계가 있었다.

“물잡이-배달부(철가방)-싸완(접시닦이)-칼판(재료다듬이)-부주방장-주방장 순인데 첫 보직이 펌프질해서 물을 가득히 채우는 물잡이였습니다.”

그곳에서 이를 악물고 13년을 버텼다. 그곳에서 서비스업종의 기본인 90도 자세에 10단계 인사말을 배웠다. 혼자서 펌프질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연습했다.

“어서 오십시오-앉으십시오-뭘 드시렵니까?-잠시만 기다립시오-맛있게 만들어 올리겠습니다-맛있게 드십시오-맛있게 드셨습니까?-또 오십시오-기다리겠습니다.”

공손하게 하는 이 인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자장면 한 그릇 먹고 10번이나 인사받으니 미안하니 이제 그만하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친절을 처음 일 배울 때부터 뼛속 깊이 스며들도록 배웠다. 그 다음은 중국인 주인의 테스트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데 돈뭉치가 몇 개 떨어져 있는 거예요. 분명 들어갈 때는 없었는데 나올 땐 있었습니다. 월급을 몇 달이나 모아도 안될 큰 돈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할머니에게 큰 도움도 될 것 같고, 깊이 숨겨놓고 조금씩 조금씩 써도 될 것같고...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일단 그것을 주웠습니다. 밤새도록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웠습니다. 그 다음날 주인 앞에 주은 돈이라며 내놓았습니다. 주인 아저씨가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넌 참 착한 아이구나’하며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거예요.”

사실 그 돈은 주인이 종업원들의 됨됨이를 알아보려고 일부러 떨어뜨리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주인의 신망을 얻었으며, 그는 당시 대구의 유지들이 드나들던 그곳에서 13년 동안 충성스럽게 일하면서 장차 독립할 꿈을 가지며 요리 기술을 배웠다.
 

새로운 인생길

고향을 떠나온 그는 술,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오직 근면과 성실로 무장한 채 13년 만인 24세 되던 해 ‘천사같은’ 구영숙 양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식 하객이라야 10여 명에 불과한 단촐한 예식이었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길이 열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먼저 13년 ‘남의 집 종업원’서 ‘어엿한 사장님’으로 탈바꿈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그에게 부인은 대구동부교회 사찰집사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골수 예수쟁이’였다. 바로 ‘예수쟁이’로 들어서는 입문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었다. 먼저 남의 집 살이에서 독립을 하려해도 자본금이 없었다. 허름한 중국집이 나와도 독립 자금을 빌리려 해도 친척들은 슬슬 피하고 딴전을 피웠다. 가게의 보증금을 떼일 위험에 처해있을 때 마침 새댁의 장모가 곗돈을 선불로 받은 100만 원이 있어 그걸 종잣돈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수한 평리동 비산초등학교 앞 ‘명월반점’ 사장으로 거듭나는 날, 그는 삭발을 했다. ‘이 머리가 자라 빗으로 빗을 때까지 명월반점을 기반을 잡겠다’는 일사각오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자장면 한 그릇, 우동 한 그릇 내 가족의 밥상을 차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당시로서는 고급 간식이었던 요쿠르트를 홍보용으로 돌렸다. 시장보고 가는 사람들의 푸성귀를 자전거에 실어다 주면서 동네사람들과 안면도 텄다.

고만고만한 중국집이 몰려있는 거리에서 정성을 다했다. 초창기 배웠던 열 단계 인사도 애 어른 가리지 않고 꼬박꼬박했다. 중국집의 주문용으로는 전화가 필수품인데, 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쌀집이나 세탁소 정도 동네에 한두 대 있던 시절, 바로 옆집 세탁소 전화비까지 대주는 조건으로 같이 쓰기로 했다.

세탁소 주인이 수가 틀어져 스위치를 옆으로 돌려주지 않을 때가 많아 틈틈이 만두로 그를 달래야 했다. 그리고 동장에게 의뢰하여 무의탁 노인들의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단순히 고향에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고생하는 어르신들을 대접한다는 것이 점점 좋은 소문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시절 기성회비도 못내어 두들겨 맞고 쫓겨난 고향학교가 생각났다. 자기처럼 돈이 없어 고생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 아이들을 돕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학교에 100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당시 방 두칸 전세금이 90만 원이었으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졸업생도 아닌 3학년 중퇴자가 그런 거액의 장학금을 기탁하다니 단연 뉴스감이었다.

지방신문에 미담기사로 나갔다. 그러자 경남 교육감이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감사패를 준다고 했다. 그러자 이에 보답하기 위해 자장면 재료를 가득 싣고가 자장면을 만들어 고향 후배들에게 대접했다. 그렇게 전달된 장학금은 당시 중학교 등록금이 4만 5천 원이었는데, 7명에게 1차로 지급되었고, 그 장학금 수혜자 중에는 나중에 고신 의대로 진학하여 의사가 된 이도 있었다. 이런 소소한 봉사가 모여서 큰 봉사로 이어졌다.
 

부인의 신앙을 핍박하다

중국집의 특징은 주일에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골수신앙인었던 부인은 주일엔 만사를 다 제껴두고 교회로 갔다. 늘 못마땅했지만 꾹꾹 참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비산초등학교 축구부가 예고도 없이 들어닥쳤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숫자였다. 급한 김에 교회로 달려갔다.

“여보! 여보!”

소리쳐 부인을 부르면서 안내자에게 물었다. “여기 명월반점 아주머니 안왔습니까?”

“지금은 예배 중입니다. 나가주세요!”

그 말이 들어올리 없었다. 부인의 뒷머리가 보였다. 빨리 데려가서 장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여보! 빨리 가서 장사해야 돼. 축구부가 왔어!”

얼굴이 빨개진 부인은 끌려나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축구부가 간 다음 교회가라고 했더니 예배가 끝났다고 하였다. 이런 식의 종교갈등은 주일이면 계속 반복되었다. 마침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성경책도 몇 번 찢었다.

하루는 담임목사가 심방을 왔다. 부인은 “목사님 오셨으니 우동 두 그릇만 해달라고”특별히 부탁했다. 홧김에 그는 “절대로 못해준다. 스님에겐 해줘도 목사에겐 못해준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부인은 할 수 없이 시장에 가서 떡을 사와서 대접하는 것이었다. 주방에서 심방 설교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꼭 자신을 욕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밥상을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당시 두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였는데 우리 부부의 종교 갈등에 참 많이 상처를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도 그의 자장면 봉사는 계속 이어졌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고아원, 양로원 같은데 무료로 봉사했다. 소문은 금방 났다. 가는 곳마다 대환영이었다. 수해당한 지역에 가서도 온 마을 사람들에게 자장면을 대접하니 KBS에서 방송해주기도 했다.

자장면 봉사만 아니었다. 신문에 어려운 사람들의 기사가 나면 수술비, 입원비도 대주었다. 특히 연변 조선족으로 심장중격결손증으로 죽어가던 한 청년을 애타는 심정으로 성금을 보냈더니 그게 계기가 되어 세브란스 병원에서 1천만 원 넘는 수술비를 전액 무료로 수술해주는 등 비비슷한 케이스가 이어졌다.

그러자 각종 매스컴에서는 그에 대한 기사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버는 것은 억척이, 돕는 것은 백만장자” “개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는 산 증인” 등등의 기사엔 ‘철가방 출신’으로 결혼 17년 동안 부부가 번듯한 옷 한 벌 안해입고 남을 돕는 그의 선행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구시에서는 ‘자랑스런 시민상’ ‘자랑스런 선행 시민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청와대에도 영빈관에도 불려가“이런 분들이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 세상이 썩지 않고 밝게 빛납니다”하며 치하했다.
 

신앙입문과 의리

여전히 종교갈등은 집안을 냉기류로 몰아넣었다. 그날도 부인과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됐다.

“아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안에서 해야 복이 있다고 저에게 꼭 교회 나가자고 권유하는 거예요. 그래서 늘 하던 말로 대꾸했습니다. ‘아니 착하게만 살면되는 거지 꼭 교회를 가야 되는 거야? 교회 다닌다는 사람치고 사회에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 사람 못봤다. 믿는 사람들이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했더니 ‘당신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자장면 만들어주고 하는 것 당신 기분 좋으라고 하는 거지 주님 앞에는 아무 영광이 되지 않아요!’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자 그만 ‘꼭지가 돋았다.’ 부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부인을 기절할 정도로 흠뻑 패주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옆에 있던 두 아들에게도 주먹을 날렸다. 부인은 방안에서 울다가 기도하다 울다가 기도하다 쓰러졌다.

“때린 제 마음도 편할리 없지요. 전혀 마시지 않던 배갈을 냉면 그릇에 부어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술이 들어가니 붕붕 떠다니는 것 같고 방바닥이 출렁출렁 움직이는 거예요.”

그렇게 인사불성이 된 그도 쓰러져서 자는데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세 천사가 나에게 걸어오는 거예요. 한 천사가 다가오더니 ‘박 선생님,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선물인데요?’ ‘하나님의 나팔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나팔을 못부는데요’ ‘교회만 나오시면 하나님이 다 불게 해주십니다’하며 나팔을 건네주고는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거에요.”

새벽에 술에서 깨어보니 부인의 얼굴은 호박덩이처럼 부어올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자고 있었다. 가슴이 쏴-하며 찬 기운이 서렸다.

‘그래, 아내와 아이들을 교회 못나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들을 따라가면 만사 평안할 것아닌가’하는 생각에 미치자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자고 있던 부인을 깨웠다.

“여보, 여보! 일어나 봐! 내 교회 갈게. 지금 당장 갈게”

“자다가 왜 이럽니까? 그냥 잡시다. 마!”

“내 결심했다. 내가 교회 나가면 될 거 아냐? 지금 당장 교회 나갈게. 지금 바로 가자!”

그 날 새벽, 부인은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로 남편과 함께 새벽기도회를 나갔다. 중앙로교회의 전설같은 일이 생겼다. 교회에서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다른 사람들 몰라도 구 집사 남편은 절대 교회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날 맞아서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부인과 함께 나가니 교인들이 당황하며 수군거리는 것같았다. 또 무슨 행패를 부리려 교회 나온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역력히 느껴졌다.

엎드려 기도하는 흉내를 내니, 불현듯 심방 대접상을 발로 차 엎은 일과 아내를 핍박하던 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마치는 줄도 몰랐지만 그저 눈물이 나오는 대로 막 울었다. 속옷이 젖고 가슴이 온통 젖을 정도로 울고 나니 그동안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부인을 미워했던 나쁜 마음들이 싹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날 중으로 아내에게 부탁하여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초청하여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전과 달리 목사님의 말씀이 고깝게 들리지 않고 격려하는 말씀으로 들린 것도 큰 변화지요.” 
 
▲시드니한인장로교회 창립 22주년 부흥집회 강사로 참석한 박권용 집사가 집회 전 찬양하고있다. ⓒ크리스찬리뷰

신앙과 시련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내린 첫 번째 지령(?)이 주일에 장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이 장사가 제일 잘되는 날인데 그걸 어떻게 그만 둔단 말입니까? 그래도 목사님은 하나님께 맡기고 주일에 믿음으로 신앙생활 해보자고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이야 장사를 안해보셔서 현실감각이 없어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지만 주일에 장사가 더 잘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저에게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그는 마침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왕 믿기로 작정한 이상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에 몸을 담은 이상 ‘보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스인 목사님 말씀에 따라 주일에 가게문을 닫는 제 손이 떨렸지만 목사님 말씀처럼 믿음으로 닫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주일성수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주일에 올 손님이 평일날 채워질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일 년 동안 손님은 다 떨어지고, 주변 중국집들과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타종교를 믿는 집주인은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초짜 신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교회도 어려움이 생겨났다. 교회건축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내분이 생겨 중직들이 다 떠났다. 학생들과 몇몇 어른들이 남아있을 때 젊은 목회자가 부임해왔다. 교인들이 모일 장소가 없어 교인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교회 장소가 될 만한 홀이 나왔다는 거예요. 가슴이 뛰는 거예요. 그 말씀을 안들었으면 모르겠지만 들은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새로 가게 자리 얻으려고 모아놓은 돈 1천700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교회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목사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돈을 싸갖고 목사님께 가져갔습니다. 아, 그랬더니 목사님의 어린 아들까지 덩달아 기뻐하는 거예요.”

그렇게 교회의 종잣돈이 되어 홀을 얻은 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중직자 투표도 하여 그는 안수집사로, 부인은 권사로 피택되었다. 두 아들도 잘 성장하여 총신 100회, 101회 졸업생이 되어 지금은 목사안수를 받아 교회 사역을 하고 있다.
 

사역의 지평

그의 선행이 알려지고 매스컴에도 보도되면서 점점 교회에서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시골 교회에서 그를 불렀다. 그러면 불원천리하고 갔다. 갈 때마다 자장면 재료를 챙겨가 동네잔치를 하고, 그가 살아온 이야기와 간증을 들려주었다. 경북 대구 지역은 철가방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어느 시골에 간증가니 그곳을 다녀간 어느 강사가 돈 적다고, 땡깡 부렸다고도 하더군요, 30명 모이는 그 가난한 교회에서 말입니다. 그날 자장면 먹으러 교회에 마을 사람들이 왔습니다. 너무 안되어서 100만 원 작정하여 매달 10만 원씩 갚아갔습니다. 목사님이 44년 목회 중에 외부강사가 와서 헌금해주고 가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사례라고 뭘 싸서 주었어요. 산삼인 줄 알고 가져와 풀어보니 무 2개였습니다. 감사로 준 것입니다. 무농사하던 교인이 큰 것을 목사님께 가져온 것인데 그걸 다시 저에게 준 것입니다. 그게 백만 원짜리 무입니다. 하하”.

▲시드니한인장로교회에서 사역 중인 박권용 집사의 둘째 아들 박성훈 목사(가운데)가 아버지의 간증집회에 앞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이렇게 어려운 시골 교회를 위한 자장면 전도가 시작되었다. 몇해 동안 계속 가는 교회도 있다.

“제가 4년 동안 해마다 가는 영동의 어느 교회는 옛날 선교사님들이 세운 교회였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4년 동안 그 마을에 자장면으로 봉사하고, 또 목사님도 열심히 하셔서 이제는 성도들이 200명 넘게 불어났습니다. 경산 육동교회는 골짜기 6동네라서 육동인데, 6동네가 자장면으로 전도가 다 되었습니다. 5년 동안 매년 갔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교회를 다니니 시찰회나 노회에서 부탁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52주 동안 한 주도 비는 때가 없이 다 가게 돼요, 교회가 재정이 있으면 밀가루 값 정도는 줍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그는 경찰서, 군부대, 교도소 등지에도 ‘이들에게 자장면 먹이고 예수님 믿게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평일에 자장 잔치를 계속 해나갔다.

“그러면 경찰서에서는 의경, 전경들을 인근 교회로 보내줍니다. 특히 지금은 달성군 국회의원 윤재욱 당시 경북경찰청이 합천 사람인데, ‘선배님 경찰청에 오셔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는가를 말해 주십시오’해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가방끈으로 어떻게 합니까 하니 ‘이 땅에 잠시 잠깐 살면서 학문 지식이 뛰어나도 석박사라도 그게 전부 아닙니다’ 하여 각 경찰서로 공문을 보내 제 강연을 듣게 해요.

그리고 김혁규 경남 지사 시절, 시장 10, 군수 10명이 공무원이 바로 살아야 한다면서 저를 강사로 불러주셨어요, 이런 식으로 수원에서는 4급 이상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저에게 강연을 부탁하는 겁니다. 연수원에서는 ‘연수원 역사상 가장 학력 낮은 사람이 건국 이래 가장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가진 돈 더 가지려고 하는 세상에, 1천500만 원 보증금에 월 50만 원, 중국집도 종업원 없이 부인과 두 사람이 장사하고 있다. 많이 팔아 돈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하면서 저를 소개하는 거에요.

매주 문 닫고 하니 장사는 헛방일지 모르지만 군부대, 교도소 들어갔습니다. 군부대나 교도소 같은 데는 당연히 자장면 재료를 가지고 갑니다. 먹기 전에 강연을 합니다. 먹고나면 안들으니까 말입니다. 하하”

수백 명의 자장면 재료값도 엄청나다. 그의 가게 규모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돈이다. 소록도에 천 그릇 자장면 대접하려면 밀가루 10부대가 들어가는데 사례는 감사장 한 장이었다. 천 명분이면 9시부터 2시까지 국수를 뽑아야 하는 양이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기도하던 중 이상하게 일이 터졌습니다. 산업은행에서, 한국 사람들은 낮고 천한 일을 안하려고 하는데, 몸소 고생하면서 사는 정직한 사람 뽑는데 10명 뽑을 때 저를 뽑아 강사로 쓰면서 강사료를 많이 주는데 그걸로 충당합니다. 100만 원씩 주는데, 한 달에 7-8회 합니다. 그리고 고훈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안산제일교회에서 간증했더니, 어느 집사님이 눈물 흘리면서, ‘나는 돈 모으고 잘 살고 내 관리하는 데만 돈 썼는데...집사님 밀가루 값하세요’ 하면서 천만 원을 주더군요, 그리고 대구제일교회 집사로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지낸 이정무 한국체대 총장께서 밀가루 값으로 천만 원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박권용 집사는 두 아들을 목회자로 키워냈다. 사진은 큰 아들 성관 씨(왼쪽, 분당지구촌교회 부목사)의 총신대 졸업식에 참석한 아들 내외 가족들과 함께 한 박 집사 부부.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성훈 씨도 총신대를 졸업했다. ⓒ크리스찬리뷰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초등학교 출신인 그는 어디를 가나 그는 인기만점 명강사였다.

“교수들이나 지식인들이 와서 강의해봤자 다 졸고 있지만 제 이야기는 듣고 다들 재미있어 합니다.”

그 비결이 바로 삶으로 녹여진 신앙, 그리고 사심 없는 선행으로 이웃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어우러진 것 같다.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을 누리는 듯했다. 그가 신앙에 입문하기 전 비몽사몽간에 받은 ‘하나님의 나팔’의 의미가 새겨지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불국사에서도 초청받아 기독교 신앙 간증을 했다.

“맨 처음 불국사에서 스님 세 명이 선물도 사갖고 찾아왔습니다. ‘주지 스님께서 박 선생님 책을 사다 읽으셨습니다. 주지 스님의 특명인데 불국사에서 집회 한 번 해주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2천 명 모이는데, 천 명밖에 못들어갑니다’ ‘아니, 저는 기독교인데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2006년이지요,

저는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옵니다’하고 막상 가려니 가슴이 짜르르 해요. 앞서 행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목사님 전화를 받아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당신도 같이 가겠다고 해요.

버스 정거장에 가니 스님들이 도포 입고 염주 목탁 들고 마중을 나왔어요. 목사님이 슬쩍 말씀하세요, ‘분위기가 안좋다. 나보고 목사라고 하지말라’고요. 절에 가니 대나무에 각 사찰의 이름을 꽂은 깃발이 펄럭여요. 그래도 마음을 잡고 첫 시간은 참봉사의 길과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니 웃고 즐거워하며 박수도 쳐주었어요.

둘째 시간이 시작되자, ‘불자 여러분, 저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입니다”하니 청중들이 놀라더군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부족하고, 조그만 중국집 주인인 주제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강연할 수 있는 것은 종교의 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어둠의 굴레에서 살아가야 하는 팔자를 타고났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이 시대에 자장면 박사 박권용이 되었습니다‘하고 강연을 마쳤습니다.“

의외의 발언에 모두가 멍한 표정이었다. 불국사 큰 스님이 나와서 통크게 화답해 주었다.

“오늘 박권용 집사의 강의를 들으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고찰 천 년 역사에 와서도 자기 믿는 종교를 전하는 담대함을 보십시오, 불자인 우리도 포교할 때 이 분의 담대함을 배워서 포교합시다”

그리고 사례비 100만 원과 그의 책 120만 원어치를 사주었다.

이렇게 그는 종교의 벽을 넘나들어 복음을 전했다. 불국사에서 강연한 다음에는 성당에서도 그를 초청했다.

그를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은 준비된 만큼 쓰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과 도구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쓰실 때는 지평의 넓이가 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방 끈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장면이 문제가 되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가?  

▲시드니한인장로교회에서 사역 중인 둘째 아들 박성훈 목사 부부와 세 명의 손녀들과 함께한 박권용 집사 부부. ⓒ크리스찬리뷰

▲박권용 집사 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콩코드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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