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웃기고 나는 울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26 [10:23]

웃음은 예방주사

연초에 자동차 딜러 책상 앞에 눈길 끄는 문구가 있었다.

If you can make them laugh, you can make the buy (웃게 할 수 있다면 팔 수 있다). 바로 그것.

그렇지, 고객을 웃게 하면 물건도 팔 수 있다. 고객을 웃게 하는 곳엔 또 가고 싶은 법이다. 그뿐만 아니다. 웃음은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강장제이고, 안정제이며, 진통제이다. 이쯤 되면 약 중에 최고의 명약인 셈이다.

성경에도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했는데, 즐거움과 웃음은 바늘과 실처럼 같이 다닌다.

아예 지미 버핏은 “웃을 수 없다면 우리는 모두 돌아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웃음 한방이면 ‘돌아버리지 않는’ 강력한 ‘예방주사’로 웃음의 역할을 말했다.

어디 웃음의 역할이 이뿐인가? 우리의 생활에서 웃음을 빼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물감을 아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꿈을 아끼면 성공을 이루지 못하듯이, 웃음을 아끼면 행복할 수도 없고, 삶이 재미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웃음 만들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각종 매스컴에는 ‘유머 코너’가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 심지어 ‘웃음연구소’까지 차려서 웃음을 생산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우리 가까이에 가장 큰 ‘웃음공장’인 TV 개그 프로에서 10여 년 웃음을 생산하여 팔았던(?) 개그우먼이 있다. 그가 바로 2001년 SBS 공채 6기 개그맨으로 데뷔,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에서 인기몰이 한 ‘맨발의 코봉이’ 등으로 인기를 모았던 손명은 씨이다.

하이든 파크에서 만난 그의 낯빛은 생기발랄했다. 목소리도 경쾌하고 말투도 싹싹했다. 어디에서도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맑고 밝은 에너지가 충만한 그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기분이 유쾌해진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호주에 와 신혼집을 차려 일 년 넘게 내조에 전념하다 교회(시티주안교회)를 제외한 공적인 외부 노출은 이번 인터뷰가 거의 유일할 정도이다.

“2001년에 데뷔하여 10년 동안 방송하다가 오빠(남편, 이하 오빠)랑 결혼하고 호주로 온 것입니다. 한국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외국에서 살 생각은 한 번도 없었고, 영어도 한 번도 안하다가 오빠가 호주에서 자리잡아 사업하고 있으니 호주에 올 수밖에 없었지요.” 

▲2001년 SBS 공채 6기 개그맨으로 데뷔, 웃찾사에서 인기몰이하던 손명은. 그녀는 2011년 2월 결혼하여 10여년의 방송생활을 접고 호주로 이주했다.   


중간 중간 코믹한 언행을 섞어가면서 말하는 그의 말을 요약하면 방송도 접고 ‘좋아하는 오빠’ 따라 온 호주가 ‘좋아지지’ 않았다. 적응이 안되었다.
 

웃음 전문가에게도 우울증이
 

▲개그 프로그램에서 인기몰이하던 손명은의 방송 출연 모습(오른쪽 2번째 손명은)
 
 
 
“처음엔 우울증이 굉장히 심하게 왔습니다. 결혼하기 몇 주 전까지 바쁘게 방송하다가 이 넓은 땅 덩어리에 제가 기댈 곳은 오빠 하나밖에 없었어요. 처음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외국 교회도 못가겠고...  교회도 못가고, 3개월 동안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보니 신혼이란 것도 없었습니다.

▲웃찾사에서 배치기하며 열연하는 손명은

신혼도 모르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까지도 생각할 정도, 굉장히 우울했는데, 어느 날 주안교회에서 전도하는데 전도지를 한 장 주더군요. ‘어느 교회로 갈까’하던 저는 무조건 저희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전도지도 받았고, 주안교회가 시티에 있다고 하니 한번 가보자 해서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간지 2주 만에 교회에서 연극을 한다고 해요. 그때까지 우울증에 시달려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극의 연출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교회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처음엔 대본작업부터 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세 번 했는데 기존의 성극들과 차별화하여 대중 친화적으로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일단은 기존의 교회에서 많이 하고 있는 성극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가 보아온 너무 식상하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마리아, 천사... 뭐 이런 정도에서 크게 못벗어나는데, 이제는 우리의 성극도 비록 교회행사지만 안믿는 사람들도 와서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대본작업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교회 청년들이랑 대본도 만들고 연극도 하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제 우울증이 치료되었습니다.”

소위 노회한 ‘웃음장사’를 10여 년 해온 그에게 우울증이 있었다? 잘 믿겨지지 않았다. 가장 기쁘고 즐겁게 보내며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그들에게도?

“개그맨들 가운데 A형이 많습니다. 방송에서는 직업이니 밝게 나오지만 원래 성격하고는 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신동엽 씨는 굉장히 과묵합니다. 개그맨들이 많이 그렇지요. 물론 재미있고, 즐거운 면이 많지만 성격 차이는 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는 안떨지만 대중 앞에서는 굉장히 쑥스러운 사람들도 있구요.”

어쨌든 처음으로 시작한 외국생활, 큰 섬, 호주에서 또 하나의 외딴섬처럼 외롭게 살아가며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던 그에게 교회와 연극은 그의 치유무대였다.

“한국에 있을 땐 사람들이 알아보면 귀찮을 정도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식당에서 밥먹을 때도 찾아와 사인해 달라고 하는 것은 보통이지요. 여기서는 모두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우울하고, 사람이 너무, 미친 듯이 그리웠습니다. 이곳에서 가끔 사람들이 알아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말로 누가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너무 반가왔습니다.

하도 외로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나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콜스 쇼핑센타였습니다. 콜스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우울하게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말 시켜주는, 알아봐주는 사람을 기다렸지요, 이곳에서 영어 못해도 살 수 있는 곳인데도, 한국 사람이 그립고, 한국과 관련된 것은 모두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신혼 초기 이민생활을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렸던 손명은.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종일 시내 쇼핑센타 앞을 서성거렸다. ⓒ크리스찬리뷰

사람들이 그리워 콜스 앞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 말을 할 정도로 지내다 교회 가서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교회 가면 또 세상 사람들(불신자)이 없잖아요, 지금도 제 주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는 치유의 광장
 
불신 세계와 가장 가까이 하기 쉬운 한국의 환경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자였지만, 어디 신자답게 살면서 ‘나는 주님의 사람이오’하고 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주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 만나면 자연히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기도하고, 서로 나누고 섬기면서 영적 치유가 일어나고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무슨 일만 터지면 무조건 서로 중보기도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게 됐습니다. 머리가 잘 말라도 감사, 음식 맛이 좋아도, 이 골목 너무 무서운데 사람 하나 보내주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정도로 제가 바뀌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저를 지독한 우울함과 절실함을 주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뜻으로 느끼면서, 제 삶이 다 하나님 위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호주에 필연적으로 오게 한 원인 제공자인 ‘오빠와의 결혼’에 대하여 알아보자.

“원래 오빠는 호주에서 한국 프로를 안보고, 한국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웃찾사’에 출연하던 2009년도에 맡은 코너를 할 때였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호주에 사는 사촌동생이 오빠 집에 놀러왔습니다. 오빠가 밥을 해줘야 하는데 그 시간에 ‘너는 한국 TV나 봐라’ 하고 틀어주고는 요리를 했답니다.

마침 제가 화면에 떴다고 해요. 감사한 것은 도련님이 제 칭찬을 한 거예요. 제 캐릭터가 꼬마들의 귀여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생 역할들도 하구요, 어쨌든 저의 그 귀여운 역할을 그 도련님이 보고 ‘형, 저 개그맨 너무 귀엽지 않아?’하니 ‘누군데 그렇게 칭찬하나?’하며 부엌에서 요리하다 말고 나와서 저를 보았다고 해요.

제가 그때 ‘남자 꼬시는 법’ 역할을 했는데, ‘어? 저 여자’하며 너무 순간적으로 궁금했답니다. 친척 동생한테는 창피하니, ‘나중에 저 여자 찾아봐야지’했는데, 그날이 ‘으라차차 정감독’ 코너에 제가 마지막 출연한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애청해준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런 멘트를 제가 했습니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이 여자를 알아 봐야지’하는 생각이 들어답니다. 갑자가 안나온다고 하니 인터넷을 찾기 시작하고, 인터넷에서 제 미니홈피를 보고 적극 저에게 대시를 하는 거예요.

오빠도 그때 왜 그랬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요. 저는 팬 관리 차원에서 올라오는 글에 대답하는 정도로 했지요. 한두 달 동안 그렇게 서로 연락했습니다. 뭐 호주에 있는 사람이고, 또 그런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너무 귀여워요 사랑해요’ 하면서 접근해오는 부류 중 한 사람이겠거니 하고 신경 안썼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형식적인 대답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사랑의 불이 붙기 시작한 남자는 좀체 꺼질 줄 몰랐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 미니 홈피를 뒤져서 저랑 연락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1촌 신청하고, 그 동생이랑 저 모르게 연락해요. 가까운 지인을 통해 알아보다가 채팅하는 프로그램을 신청해 왔어요, 늘 거절하다가 한 번은 실수로 ‘수락’을 눌렀는데, 그 실수로 차단하는 순간 들어왔습니다. 바로 저한데 말을 걸어오는 사람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거든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계속 채팅을 하다보니 이 사람이 궁금하고,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엔, 채팅과 전화를 반복하면서 한 달 만에 오빠가 한국에 나왔어요.”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고, 진심이 통해지자 속사포처럼 일이 진행되었다. 국경이 문제가 아니었다. 2009년 9월에 처음 만나고, 2011년 2월 19일에 결혼했으니 1년 6개월 만에 만리장성을 쌓은 셈이다. 양가부모들의 반대는 크게 없었다고 한다. 이때 어릴 적에 그의 교회 반주가 주효했다고 한다.

▲손명은은 호주 교포 황제헌 씨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2009년 9월 처음 만나 1년 6개월 만인 2011년 2월 19일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 시부모님은 개그맨에 대한 인식이 안좋으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저한테 직접적인 반대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명은이 믿 음이 제일 좋다. 교회에서 반주했다. 중·고등학교 때 반주했었다’는 말을 부모님이 들으시고, ‘세상적으로 그런 애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시곤 저를 만나보겠다고 하신 겁니다. 저희 집은 너무너무 환영했구 말입니다.”

그리고 ‘오빠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오빠가 진짜가 바른 생활을 했어요. 호주에서도 선비라고 할 정도로 술 담배 전혀 안하고, 세상적으로 되지 않아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착하고, 저희 집 부모님들에게 잘하고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내 평생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이 사람을 가져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앙 이야기

그의 신앙은 선교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저희 집은 원래 종교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유치원 가기 전, 엄마가 전도를 받아 하나님 믿으면서 저를 일반 유치원이 아닌, 다니는 교회 선교원에 다니게 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교회생활은 그에게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유년부 주일학교 때까지는 교회가 즐겁고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성경학교, 수련회, 행사하는 게 너무 즐거워서 믿음을 가진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믿음은 있었지만 뜨거운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살다가도 주일은 엄격히 준수하는 그런 신앙을 스무 살 초반까지 지속했습니다. 토요일 늦게까지 놀아도 주일은 반드시 성수하는, 왜냐하면 주일엔 반주도 해야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주일만 성수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개그맨 되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서 늘 기도의 소중함은 절실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말씀을 깊이 읽지는 못했지만 항상 기도는 했습니다. 개그 콘서트는 생방송처럼 콘서트로 진행하는데 1천 명, 2천 명이 모인 사람 앞에서 하니 방송 전에는 항상 기도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습니다. 엔지(NG) 안나고,잘하게 해달라고 버릇처럼 습관처럼,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는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 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상대방이 싫다가도 교회 다닌다면 괜히 좋은 그런 삶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 향기를 좋아는 했습니다. 그렇고 그런 신앙으로 10여 년 동안 방송생활하다가 호주로 왔지요, 이곳에 외딴섬처럼 뚝 떨어진 삶을 사니 너무 절실해졌습니다. 잡을 게 하나님밖에 안계시더군요.”

호주의 삶은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이자, 신앙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가 교회 사람들로 형성되고, 어떤 이야기든 결론은 ‘기도해 줄게’가 되었다. 이런 삶은 한국의 후배들의 입을 통해서도 증거된다고 한다.

“작년 9월, 한국에 나갔을 때 ‘자기야’ 부부 프로그램과 ‘개그 투나잇’을 두 달 동안 방송할 때 많은 후배들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후배들이 무서워서 저에게 접근을 못했습니다. 개그맨도 들어온 순서 연차로 하기 때문에 군대보다 서열이 분명합니다.

대기실에 후배들이 무서워 못들어올 때, 무대 올라가기 전에 핸드폰으로 찬양 틀어놓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 표정이 온화해졌나 봐요. 예전 같으면 농담 따먹기를 해도 후배 교육시키려 했을 것인데, 이제는 만나면 제 입으로 하나님을 전하고, 교회 이야기 신앙이야기를 하니, 후배 개그맨들을 만나면 제가 많이 변했다고 해요.

그리고 요즘 주변 사람들이 아침마다 카카오톡으로 말씀 보내주고, 페이스북에서 개그맨들도 하나님 말씀 올리고 합니다. 옛날 같으면 손이 떨려 못 올렸을 것인데 지금은 그런 말씀 올리는데 익숙해지는 단계입니다. 제 마음속에서 계속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지고, 힘든 학생들 친화력있게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입니다. 교회 행사에 제 달란트 사용하여 쓰임받으며,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려고하는 단계에 왔다고나 할까요.” 

▲시드니 시내를 거닐며 본지 편집국장 송기태 목사와 대화를 나누는 손명은 ⓒ크리스찬리뷰

꿈을 포기하지 않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었고, ‘끼’가 있었다. 개그맨의 꿈이 있었고, 학교에서 학예회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MC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교실에서도 급우들이 “선생님이 심심해요”하면 어느덧 그가 나가서 좌중을 휘어잡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땐 항상 오락부장을 했어요, 학교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가면 전교생 앞에서 MC를 보고 말입니다. 이 얼굴로... 호호. 대학교는 안갔습니다. 공부와는 평생 담을 쌓고 살았거든요, 그 당시엔 ‘대학엔 왜가?’했지만, 지금은 대학 안간 게 후회돼요.

그리고 이 몸매로, 이 머리로, 이 얼굴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개그맨이었지요. 그런데 개그맨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길을 몰랐습니다. 막막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문도 평시에 안봤는데, 그날 따라 평소에 안보던 스포츠 신문이었지만 우연히 눈길을 주었던 게 제 인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날 그 신문에, 조그만 코너에 실린 광고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한국 최초 코미디 스쿨’ 이런 광고였지요, 저희 집이 잘 사는 형편도 아니었지만, ‘여기 가면 개그맨 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친구랑 자취할 때인데 엄마한테 이런저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랑 통화하고 한 달 지났을 때인데, 어느 날, 엄마가 갈 데가 있다면서 여의도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코미디 스쿨이었습니다. 엄마가 알아볼 것 알아보고 데리고 간 것이지요.”

그때 만난 사람들이 지금 다 개그 프로그램의 현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학원에서 뭘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랑 학원에 들어간지 한 달만에 방송사마다 일 년에 한 번 치르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MBC에서 봤는데 당연히 뚝 떨어졌지요. 그래도 계속 시험을 보았는데 3년 동안 6번이나 보았습니다. 시험보고 다 된 듯했지만 4차까지 있는 최종 시험에서 떨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계속 도전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1년도에 SBS에 합격하여 개그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공채’라는 어려운 시험을 당당히 합격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캐스팅되지 않으면 그야말로 ‘백수’였다. 거기에다 공채 후 일 년 동안은 다른 다른 방송사에 출연도 못하게 꽁꽁 묶어놓고 있었다.

“신인 때는 항상 엑스트라 재연 연기들만 해요. 이봉원 선배가 일본 유학갔다 와서 복귀작업한 ‘오 해피데이’도 9주 만에 도중 하차하고, 그 후로 몇 번이나 프로그램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거에요. 그렇게 재연 프로 엑스트라로 한 번 출연하면 95,700원이란 아주 싼 출연료를 받고 일 년 동안 버텼습니다. 재연 프로에서 연기를 잘하면 주연 프로를 줍니다.

심심남녀’ 프로에서 주인공으로 재연하다보니 ‘오렌지’ 시트콤을 하게 됐습니다. 장근석, 비, 한인정, 조윤희 등 최고 A급 스타들이 모인 프로였습니다. 그런데 시트콤을 하려면 코디가 있고 매니저가 있어야 해요. 코디비가 회당 10만 원인데 출연보다 비싼 코디를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풀릴 듯했는데 어느 선배의 비리 때문에 그것도 한 달이 안되어 어느 순간 없어졌습니다. 또 백수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일 년이란 시간이 흘러 계약이 풀리고 방송 3사를 다 다닐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일용직이었습니다. 2003~4년 KBS2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 이명은 역을 하면서 인지도 올라갔습니다. 김영애, 이보희 등 스타 군단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분들이 주축되어 하는 역에 주인공의 딸로 일 년 동안하면서 인지도가 더 올라가 이희재 선배의 스폰지 게스터로 2년 했습니다. 제가 맡은 역은 주로 먹는 캐릭터였는데, 그것만 잘 소화하면 되었습니다.

이후 ‘스타 골든벨’ 고정 게스터, KBS에서 황금시간대 쇼 프로 등에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또 일이 될만하고, 탄력을 받으려 하는데, 그만 추석 특집 프로그램 게임에서 송편 먹는 게임에서 한 분이 급히 먹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방송 현장에서 사람이 돌아가셨으니 그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또 백수가 되었습니다. 연예인은 하기 싫은데도 해야 하고, 그것도 목숨 걸고 해야 합니다. 겨울에 얼음 깨고 들어가야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야 하고 말입니다.”

오랜 세월의 인고의 세월을 지나. ‘웃찾사’ 쇼 프로에서 ‘맨발의 코봉이’란 프로에 데이지라는 굉장히 귀여운 유치원생 역할에서 인기가 급상승한다. 그때는 인기있는 개그맨이 찍을 수 있는 CF에도 출연할 수 있었고, 그의 캐릭터 양말이 나올 정도였다. 식당에 가도 다 알아보고 공짜로 먹게 해 줄 정도였다.

“캐릭터가 귀엽고 하니 그 당시는 시골 할머니도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코봉이’ 목소리를 내는 등 다양한 포즈를 취한 손명은 ⓒ크리스찬리뷰

그밖에도 SBS 어린이드라마 ‘고스트 팡팡’에서 음악 교사 역을 했고, SBS 금요드라마 ‘8월에 내리는 눈’ MBC 에브리원 ‘와인따는 악마씨’에서 미스 김 역을 맡았다. MBC 드라마넷 MT왕 돈 텔 파파, 상사부일체와 어린이 뮤지컬 ‘큐빅스 대모험’ 등에 출연했다. 

웃기고, 울고
 

▲시드니 시내에 있는 하이드 파크에서 비둘기와 함께 망중한을 즐기는 손명은 ⓒ크리스찬리뷰

대중의 스타는 그야말로 인기를 먹고 산다. 인기가 떨어지면 자연히 캐스팅도 떨어진다. 인기가 올라가면 시간대비 수입은 급상승한다. SBS의 간판 개그프로였던 웃찾사와 그는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웃찾사 원년멤버로 그 프로의 인기가 사그라지니 저도 사그라졌어요. 방송은 했지만 큰 성과는 없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매번 타사 비슷한 프르그램 시청률과의 싸움입니다. 웃찾사가 이길 때, 제가 첫 회와 마지막 회에 다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 없어질 때, 마지막 멘트를 할 때 오빠를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딱 맞게 오빠를 보내주셔서 호주 가서 하나님 일하라고 말입니다.”

그는 ‘은막의 스타’를 ‘고정 수입이 없는 프리랜서, 일용직’이라고 정의했다.

“A급 스타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회사원보다 수입이 못합니다. 나름의 인지도와 캐릭터 때문에 돈 벌 것이라고 하는데, 한창 방송할 때 일 년에 5백만 원 정도였습니다. 국민연금은 연예인이란 이유로 얼마나 많이 내라고 하는지요, 개그맨은 행사장에 가도, 신인 가수들보다 취급을 안해줍니다. 공채로 합격해도 칼 없는 전쟁입니다. 비록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지만 ‘얘를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다. 얘를 밟아야 들어간다’는 암묵적 사회이기 때문에 ‘총 없는 전쟁터’에서 일 주일 내내 남들 웃기기 위해 우리는 맨날 웁니다.”.

치열한 방송 현장에서 살아온 그는 동일한 꿈을 꾸는 후배들에게 ‘안되면 빨리 접어야 한다’고 짤라 말했다. 그가 들려주는 리얼한 목소리는 이렇다.

“방송의 맛도 못보고 빛도 못보고,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간(?) 아이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각 방송사마다 하나씩 대표 프로그램은 있습니다. 개그 콘서트 KBS 계속 1위, 코빠(코미디에 빠지다), 개그 투나잇 등 시청률이 생명줄이지요. 그 좁은 캐스팅 경쟁률도 피를 말립니다. 개그 프로가 인기 있으려면 초등학생들을 웃겨야 뜨는 프로가 됩니다. 그들이 따라하고 그래야 뜹니다.”

그래도 그는 현재 한국 연예계에는 기독교인이 많다는 것이 고무적이라고 한다.

“이승미, 박미선 그분들이 영적으로 영향력이 있습니다. 연예인 안에서도 많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김원희 씨가 앞장서서 카카오톡 메시지에 말씀을 나서서 올리니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합니다. 연예인으로는 차인표 선배를 비롯한 여러 그룹이 수천 개의 뿌리가 내려서 여러 군데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드니에서의 삶이 새로운 기쁨, 새로운 기적의 날이 이어지길 기대하는 손명은 ⓒ크리스찬리뷰

먼 길을 돌아서 새로운 항구, 시드니에 정박한 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새로운 기쁨, 새로운 기적의 소식을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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