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바라본 호주복음주의의 장점과 문제

호주복음주의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한인교회가 넘어야 할 과제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26 [10:56]

이 글은 지난 9월 ‘호주복음주의 기독교 역사적 유산과 한인교회에 대한 반응’이란 주제로 본지와 예수마을이 

공동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주경식 목사가 발표한 논문을 지면 관계상 3회로 나누어 연재한다.<편집자>
 

필자는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겁을 내고 지나치게 경색되어 교회 연합운동에 울타리를 치고 게토화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1950년대의 호주에서의 교회 연합운동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펼쳐져 사회변혁에 큰 공헌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성공회의 모올과 그의 아내 도로시의 영향력은 대단할 정도였다. 모올이 시드니 대주교를 역임했던 1933년부터 1958년 사이에 호주 복음주의는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사회현실 참여에 있어 모범을 보여 주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스튜어트 교수 자신이 성공회에 속한 교인으로서 모올에 대하여 갖고 있는 그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스튜어트 교수의 모올에 대한 평가의 일부분이다.

“모올 부부의 일생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부분은 현실 참여라는 요소였지만 성령과 말씀의 요소가 조화롭게 녹아들어 성화된 삶의 본이 되었다. 세상을 향한 사역에서 말씀과 성령에 전적으로 의뢰한 모올의 태도는 그의 성경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모올은 성경책 첫 장에 <인생은 사역이다. 그 목적은 예배이며 그 법칙은 자기 희생이다. 그 힘은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나온다>라고 써 놓았다.” 

20세기 초 중반 시드니 성공회가 사회와 복음주의 안에서 발휘한 영향력은 모올의 리더십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올이 죽은 다음 해인 1959년 전도집회를 위해 방문한 빌리 그래함의 설교에서도 알 수 있다. 

“대주교님도 오늘 이 광경을 보면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이 광경은 주교님이 여러 해 동안 신실하게 사역하신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호주의 복음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부흥사나 전도자 등을 배출해 내지는 못했어도 사회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자기 희생과 헌신, 말씀과 성령 그리고 성화된 삶을 통해 행동주의의 모범을 보이며 세상을 변혁시키는 모올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것의 근본적인 동력은 말씀과 신학의 견실성에서 찾고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유주의의 도전은 호주에서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지만 1963년까지 호주에 56개의 신학교가 세워지고 레온 모리스, 프랭크 앤더슨 등 복음주의 학자들과 C.H 내쉬는 평신도였지만 말씀과 기도 중심의 신학적 풍토를 조성하여  건전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특별히 호주의 복음주의 운동의 부흥에 있어 눈에 띄는 점은 학생운동의 활약이다. 이중 기독학생회(IVF)는 호주 지성사회를 비롯하여 중산층에 균형잡힌 신학과 말씀운동을 펼쳐나가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여기에 있어 C.H 내쉬는 멜본을 중심으로 말씀과 성령 중심의 바른 신학운동을 펼쳐 평신도 네트워크를 만드는 등 호주 부흥의 토양역할을 감당해내었다. 이뿐 아니라 SCM(Student Christian Movement),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등 학생운동들의 활약으로 호주 복음주의는 평신도 중심의 사회변화와 세계선교에 크게 공헌한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20세기 초중반 호주에 있었던 크고 작은 부흥운동들 특별히 1959년 빌리그래함의 부흥은 이러한 평신도 네트워크로 다져진 토양 안에서 자연스레 열매를 맺게된 결과라고 평가하고 싶다.
 

4) 균형잡힌 복음주의 

복음주의와 부흥에 대한 스튜어트 교수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는 조지 화이트필드, 조나단 에드워드와 존 웨슬리를 통해 시작되었다. 이들의 1740년대 부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부흥은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스튜어트 교수는 개인적 회심의 체험을 부흥의 시작으로 그리고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개인적 회심과 구원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스튜어트 교수는 1959년 호주에서 있었던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호주의 대부흥으로 평가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를 부흥으로 정의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스튜어트 교수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다. 죄를 깨닫게하고 회심하며 죄인을 소생하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이루어졌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며 공동체가 함께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스튜어트 교수는 역사가로서 부흥의 현상을 일반적으로 6가지 사람들의 행동양태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①사람들은 갈망해 하며(부흥에 대한 기대) ②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되며(전례없는 연합) ③기도의 열기가 불타오르고 (놀라운 성령충만) ④ 교회가 갱신되고 (소생되는 교회들) ⑤ 많은 죄인들이 회심하고 ⑥ 사회적인 죄습관에서 탈피한다 (사회악의 감소)[23] 자신이 정의한 부흥의 현상에 대한 6가지 사람들의 행동 양태를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에 적용해 볼 때 확실히 1959년 이후로 부흥이 일어났다고 스튜어트 교수는 확신한다.

필자는 스튜어트 교수의 1959년 빌리 그래함 부흥운동에 대한 연구가 그가 요약한 6가지 행동 양태에 맞추어 적용된 것들을 볼 때에 확실히 설득력있는 연구로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나타난 6가지 행동양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씀, 성령 그리고 세상”의 구조 안에 이 6가지 행동양태가 녹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빌리 그래함의 부흥이 단순히 전도집회만의 성공이 아닌 것은 특히 사회악의 감소에서 증명되고 있다. 스튜어트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호주 전지역에서 범죄자들의 숫자가 1920년과 1950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50년과 1959년 사이에 인구가 오직 4분의 1 증가했던 반면 범죄 숫자는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 1961년, 그리고 1962년 유죄 판결자들의 숫자가 증가세를 멈췄다.”

이런 보고 외에도 시드니 대회 이후에 “금고털이 강도가 그의 절도 장비를 일대일 전도요원에게 넘겨 주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무장 강도가 무장 해제했으며 그리고 사업자들의 부채상환이 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고 스튜어트 교수는 진술한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확실히 호주에서 있었던 1959년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는 호주 복음주의 역사와 부흥운동에 획을 그었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빌리 그래함이 강조했던 기도에 대한 강조와 성경읽기에 영향을 주었던 것을 살펴볼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균형잡힌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이 동의했듯이 “교회 부흥신학의 최고봉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대로 성령의 역사는 ‘눈물이라던지, 떨림, 신음소리, 울부짖음, 신체적 격동이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사람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당시 빌리 그래함이 가지고 있었던 부흥에 대한 생각이 균형잡힌 복음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5) 말씀이냐 성령이냐? (1960년-1994년) 

1960년부터 1994년까지 호주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국면들을 맞이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동안 증가일로에 있었던 호주의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튜어트 교수는 1960년 중반부터 호주 주류 개신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미국과 비교해 보면 미국은 1949년 기독교 인구가 94%에서 1969년 98%로 증가한 것에 비해 같은 기간 호주는 95%에서 87%로 감소했다.

이것은 스튜어트 교수의 지적대로 호주 또한 유럽에서 나타난 세속화 과정을 따라가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호주에 다양한 기독교 종파가 유입되기 시작한 것도 크나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러시아, 세르비아,시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콥틱교회 등의 정교회가 교세를 확장하여 호주에 정착들을 하기 시작했다. 이민자의 자연스런 증가로 수십만의 다양한 배경의 카톨릭 인구도 호주에 유입됨에 따라 카톨릭도 인종 및 민족별 교구가 생기게 된 것 또한 이 기간의 특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 가장 특이할 만한 일은 호주연합교회가 탄생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77년 호주 감리교, 호주 회중교, 호주 장로교 일부가 연합하여 그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각자 세 종류의 다른 배경의 신학을 가진 교단이 연합하여 한 교단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세계교회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와 비교하여 한국 기독교는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장로교만 하더라도 현재 수십 종류의 장로교로 분리 분립된 것을 볼 때에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스튜어트 교수는 그의 글에서 복음주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 교단이 연합하여 만든 호주연합교회 탄생이 주는 의의 등을 자세히 논의하지 않고 지나가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시대의 다른 특징 하나는 오순절파  교인의 증가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원인들을 살펴볼 수 있겠지만 청장년층을 교회로 흡수하는데 성공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비슷한 시기의 미국 오순절 또한 확장된 것을 볼 때에 성령을 강조하는 은사주의적 유행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스튜어트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말씀, 성령, 세상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심이 서로 분리되고, 한쪽으로만 치우치자 교회는 단기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복음주의 운동 전체가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그의 평가를 옳다고 판단한다.

또한 20세기 후반 호주의 복음주의 운동이 이전 세대가 연합함으로 복음주의 운동의 역동성들을 세상에 보여 주고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에 반해 지나치게 교파 또는 개교회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판단된다. 

이후 스튜어트 교수의 글에서 계속 소개되고 있듯이 보수 개혁주의자들 또는 보수 침례교단안에서도 신학적 선호도를 가지고 나누어 지는 모습들을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이 이전 시기의 복음주의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급기야는 1986년 개혁주의 세력의 압력으로 침례교 신학교가 SCD(Sydney College of Divinity)를 탈퇴하는 것을 볼 때에, 개교단의 신학적 이슈가 연합과 화합보다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로 브로튼 녹스가 시드니 성공회의 무어 신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1959년부터 1985년 사이에 녹스가 보여준 교회관은 큰 논란거리가 되었었다. 녹스는 교회는 복음전도의 도구가 아니라, 교회는 복음 전도의 결과라고 강조함으로 다른 복음주의 자들과  연합하는 것을 스스로 제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기독학생운동 안에서 복음주의가 분열되었던 사실이다. 기독학생운동내에서 분열되었던 양상을 보면 첫째 회개와 전통적 경건을 강조하는 개혁, 또는 청교도적 복음주의가 그것이다.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출판사가 이들을 대변했다. 두 번째는 정통 또는 신복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근본주의적 배타주의에 대항하고 빌리 그래함  연합전도에 양향을 받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복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는 네비게이토, CCC계와 같은 근본주의 그룹이다.

필자는 기독학생운동내에서 분열이 가져온 부정적인 요소도 문제지만, 경건주의와 비타협을 특징으로 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완벽주의 때문에 호주에서 보수기독교인이 정치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은 더 큰 안타까움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문제에 복음주의자들이 관심을 두고 몇몇 의식 있는 지도자들이 보여 주었던 그들의 리더쉽은 다행스러운 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성공회 멜번 대주교인 데이비드 펜맨이나 웨슬리 선교회의 고든 모이스 목사 등은 세상에 대한 복음주의의 바른 정신을 제안했고 복음을 가지고 균형있게 세속주의에 대항하며 사회개혁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외 스튜어트 교수는 제프리 빙햄 목사와 1978년 엘코섬의 연합교회 원주민에게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을 성령의 자연스럽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엘코섬에서 일어난 부흥이 호주에서의 다른 부흥운동과 달리 짧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워버튼을 비롯한 호주  북서부에서 계속해서 일어난 부흥은 원주민들을 영적으로 뿐만 아니 라 모든 부분에서 회복시키는데 공헌하였다고 평가한다. 또한 스튜어트 교수가 1992년 마보 대 퀸즈랜드 주정부 재판에서 토지에 대한 원주민의 공동재산권을 법적으로 인정한 역사적 사건을 성령이 이루신 일이라고 평하는 점에서 필자는 스튜어트 교수의 신앙을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내리는 평이라  확신한다.<계속>
 

주경식|시드니신학대학(SCD)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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