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2/26 [11:31]

하버드 대학교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자신의 저서 <Leading Mind>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목마름이다. 시대를 이끌어가던 리더들의 공통점 역시 시대변화를 애타게 추구하던 목마름이었다.”

누가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다. 누가 자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자유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다. 또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말씀을 사모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한 굶주림이 있는 사람이다.

배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 의해 변화된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배부른 사람들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복을 받게 된다. 그런데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하는가? 의로움이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의에 목말라 해야 한다.


인간의 의

의는 의로운 것이고 바른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권력의 두 기둥은 집정관과 원로원이다. 집정관과 원로원의 권력은 곧 법이었으며, 모두가 승복해야만 하는 정의였다. 그런데 로마제국을 떠받치던 두 기둥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절대권력을 한 손에 쥔 자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시이저 곧 카이사르다. 이제 로마의 모든 권력은 카이사르 한 사람으로부터 나왔고, 카이사르의 말이 곧 로마제국의 법이 되었고, 카이사르가 곧 로마 제국의 정의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카이사르의 권력이 심복이었던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그의 절대권력은 사라졌고, 또 그 권력으로부터 나온 ‘정의’도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물러갔다.

유대인의 정치와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은 성전과 율법이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는 성전 역시 율법에 의해 세워지고 운영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곧 율법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그 무엇보다도 열과 성을 다했다.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다. 언약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도덕성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주권으로 맺어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였던 유대인들이 율법의 관계에 매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요 신앙인의 의로움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외적인 행위가 강조되었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정의,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러한 율법을 수호하는 최고의 기관이었고, 의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주후 70년에 의로움의 위용을 자랑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제국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율법을 수호하는 최고의 기관이었던 예루살렘 성전, 인간 스스로의 의로움을 상징했던 그곳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란 주님의 예언대로 폐허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이 그토록 자랑했던 스스로의 의로움도 사라졌다.

로마 권력에서 나오는 정의도, 이스라엘의 율법이 담보했던 의로움도 인류의 역사 속으로 바람과 같이 소멸해 버렸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당시 권력을 통해 나오는 의, 율법을 통한 자기 의에 굶주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권력과 행위로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느라 배부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들의 자기 의는 영원하지 못했다. ‘우리의 의’라고 하는 것, ‘인간의 의’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권력이 소멸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가 된 것처럼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에덴을 떠날 때부터 우리에게 ‘의’라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64장 6절을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부정하기만 한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의를 드러낸다 해도 다 더러운 옷 같을 뿐이다. 그래서 언제가는 시들어 없어지는 잎사귀와 같을 뿐이다.


하나님의 의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다.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하나님의 의로움의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에 먼저 주리고 목마른 사람, 그들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 하나님의가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떼를 썼다. 예수님 당시에 유산은 오직 부모님 사후에만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탕자는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다. 이것은 불효 중의 불효요,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불의함이었다.

그렇게 유산을 받아든 탕자는 세상으로 나가 허랑 방탕한 생활을 했다 . 결국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굶어죽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탕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종이 되기 위해서 돌아온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선 아들에게 맨발로 달려나갔다. 그를 끌어안고 입맞추며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며 큰 잔치를 열었다. 아들은 집을 나갈 때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겼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의 아버지로 존재했고, 끝까지 탕자를 아들로 인정해 주었다.

이 신실하신 아버지의 자비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베풀어지는 자비로움,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무례할 때가 많은지 모른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 앞에 감히 자기 의를 자랑하며 교만하고, 종의 신분인 인간이 주인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시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으로 계신다. 우리가 세상의 물질과 쾌락에 빠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으로 긍정해주신다. 이 신실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영원하고도 무궁한 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죄 많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이고, 그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유명한 로마서 1:17에서 이같이 외쳤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실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부와 명예, 권력도 아니요, 우리의 선행이나 자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할 뿐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이웃과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우리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권세와 자랑을 내려놓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으셨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보혈을 타고 하나님의 의가 온세상으로 퍼져갔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자.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자.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의 영혼이 배부를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