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교육 갱신의 키는 담임목회자에 달렸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2/26 [11:32]
지난 호에 이민교회의 교육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1) 구하기 힘든 전문사역자가 아닌 기존 평신도교사중심 주일학교 체제를 세우고,

2) 윤리나 교회 관습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커리큘럼을 만들고,

3) 사전계획을 통한 집행, 피드백과 다음계획 반영이라는 교육행정의 기본을 회복시키고,

4) 세대와 문화를 넘어 복음으로 하나됨을 경험케 하는 다문화 대화능력을 향상시키고,

5) 학생 이상으로 교사, 부모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말씀과 훈련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만들어진 주일학교는 담임목회자의 비전이 교육에까지 깊이 침투되고, 평생 동안 성경을 가지고 신앙성장을 일궈내는 능력을 키워주고, 시간이 가면서 발전이 있는, 호주와 한국의 장점을 접목시키는, 그리고 교사·학생·부모가 같이 자라는 주일학교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시설과 돈이 생각보다 문제가 되지 않고, 교회의 크기에 따라 수준이 결정되지 않는 주일학교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러한 비전은 부분적으로 이미 평신도운동, 가정회복, 기독교세계관운동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조용하지만 꾸준히 추구되어 왔다. 우리가 어색하게 느낀다면, 한국교회가 질보다는 양, 과정보다는 결과를 추구하는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런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지도자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 안될까? 무엇부터 해야 하나? 교육 전문 단체 도움? 스타 교역자 고용? 교육 재정 확대? 정작 시작은 다른 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담임교역자의 신학적 확신과 결단이다. 당연하게 들리는 이것은, 실제로 수많은 주일학교 진정한 갱신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숙제다. 교육은 결국 최종적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무엇을 하기 위한 지가 분명하지 않고서는 뭘, 어떻게 할 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더욱이 신앙교육은 아이, 부모, 공동체가 모두 연결된 분야이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추구할 방향이 제대로 설정해만 답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교회 전체의 사역과 노력을 통해 어떤 신앙 인격을 만들기 원하는 지, 어떤 인격을 만들어가고 있는 지부터 점검하지 않고서는 다른 노력은 다 헛 것이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키워내길 추구하는 ‘인격’ 모델, 성화의 내용, 다시 말해 ‘신학적 인간론’이 뚜렷한 교회나 목회자는 많지 않다. 어떤 은퇴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를 돌아보며 가장 후회하는 것은 신학교 다닐 때보다 분명한 신학적 토대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가 이런 고백과 멀지 않다. 정상적인 목회자라면 짧게는 4년, 길게는 7년 이상 신학만 공부한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냐하면 최신 신학 이론을 아는 것과 자신이 평생동안 추구해야 할 신학을 정립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현재 한국신학교육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더 많이 양산한다. 그렇다 해도 졸업 후 목회자는 모호한 종교적 표현이나 전통, 혹은 프로그램이나 유행을 따라 목회자로 사역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결국 그런 ‘척’은 성도와 오랫동안 관계하면, 특히 핵심과 질에 의해 결정되는 장기 양육관계를 가지다 보면 진짜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한참 뭘 배우고 가르쳤지만 성도들의 변화도 없고 뭘 배웠는지도 분명치도 않다. 교회 생활이나 사역에는 점점 더 익숙해져 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능력, 체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이런 저런 강사를 대보지만, 가고나면 여전히 공허하다. 다른 교회에서 성공했다는 프로그램인데도 우리교회에서는 겉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변하지 않는 내용으로 가장 새로운 도전을 던지는 능력이다. 말씀은 듣는 이가 모두 알아 들을 수 있는 간단하고도 오래된 내용이면서도, 전혀 다른 문화와 성격,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변화시킨 힘이다. 신학은 복음의 기본 속에 담긴 이 무서운 능력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내용과 그 속에 담긴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되는 내용을 서로 연결해 주어, 교회 안팎에 더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인간의 논리가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법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서는, 지도자는 수 천 년 묵은 이 복음을 가지고 사람의 변화를 이끌 수 없다. 다시 말해 신학을 갖춰야 한다.

건강한 주일학교는 건강한 장년사역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열매다. 건강한 장년사역은 건강한 신학으로 꾸준한 씨름의 열매다. 이점에서 주일학교 갱신은 단순히 교회 한부서 갱신의 문제가 아니라, 필자를 포함한 모든 교역자들에게 사역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신학을 재검토하게 만들고, 우리가 왜 이런 헌신과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주일학교 갱신을 원하는 교회가 먼저 필요한 것은, 담임교역자부터 신학을 재정리하는 일, 이미 있다면 보다 구체화, 명료화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담임교역자의 신학과 자세가 주일학교 갱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서도 발견된다. 이 글이 주장대로 주일학교의 초점이 학생뿐 아니라 부모, 교사가 되면, 주일학교는 부모 교육과 교사훈련에도 집중해야 한다. 작은 교회에서는 특히 담임교역자가 이끄는 성인양육과정과 조율하고, 통합해서 다뤄야 할 문제다.

또한 이런 주일학교 갱신운동은 단기적으로 부모들의 반발을 각오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주일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 중에는, 임시아동보호소정도로 생각하며 무관심하거나, 신앙교육은 주로 주일학교 책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에게 부모 참여를 강조하고, 가정신앙교육의 책임을 언급하면 당연히 반발하고 불평한다. 여기서도 교회 전체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반발에 맞추기 위해 ‘다수를 잡아놓는 탁아소’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회심과 변화를 위해 ‘소수정예 훈련소’로 갈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불평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최악의 경우 떠나는 이들까지도 각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중간에서 답을 찾기 원하는 분도 있겠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기 쉽상이다. 도리어 소수정예를 향해 가면서도 더 많은 이들이 여기에 포함되도록 가능한 배려하는 정도가 더 현실적이다.

어쨌든 주일학교 갱신의 기초는 담임목회자가 먼저 교회 전체가 추구하는 영적 인격의 모델을 분명히 하고, 이를 위해 장기적이고 꾸준한 싸움을 할 각오부터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지도자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주일학교 갱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지도자도 손이 열 개가 아닌 이상, 대신 이를 추진해 줄 인력이나 치밀한 연구가 필요할 수 있고, 이 경우 부교역자나 전문기관은 효과적인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들 역시 교회전체의 방향과 의지와 따로 놀면 시간낭비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노력은 많은 고민과 저항을 만날 수 있지만, 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한국교회는 교육과 자녀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우선순위를 두는 교회다. 실천이 못 따라갈 때가 많지만, 적어도 정서적으로 자녀교육이 중요하고 뭘 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기가 비교적 쉽다. 이점에서 교육 갱신을 위한 노력은 다른 행정적 개혁, 강단에서의 직접적인 도전에 비해 보다 넓은 공감대를 만들며 교회 전체의 갱신으로 이끌 수 있는 도구다. 이것이 필자와 ‘로뎀나무아래’ 선교회가 주일학교 갱신을 통한 한국교회 전체의 갱신을 기대하는 이유다.〠 <계속>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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