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지치지 않는 행진

천사장학회 회장 최승호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1/28 [11:32]
시교협 장경순 회장은 신년하례회 때 그를 가리켜 “신성일 같다”고 하였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는 장 회장의 그에 대한 인물평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바로 78년 8월 한인 이민 초창기에 호주로 건너와 15여 년 산전수전 다 겪다가, 92년 훌쩍 중국으로 떠나 잊혀질 듯하면, 다시 나타나 그리움을 삭혀내게 하는 천사장학회 최승호 회장이다. 
 
▲연변에서 떡과 음식을 팔아 천사장학회를 운영하는 최승호 회장 ⓒ크리스찬리뷰

“호주 처음 올 땐 형 회사 건축기술자로 왔지요. 그런데 형이 회사 일 안하고 ‘딴 짓’(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겠다. 이 ‘딴 짓’이 나중에 시드니에서 그의 핵심적인 일이었다. 여기에 집도 한 채 팔아넣어야 했다)한다고 형이 캔버라로 쫓아버렸습니다. 캔버라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형 몰래 브리스번으로 건너가 페인트를 배워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시드니로 건너온 그는 예의 ‘딴 짓’에 손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그와 함께 그 ‘딴 짓’에 의기투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초창기 이민자의 애환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대부분 신분이 불안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신뢰관계가 아니면 마음을 잘 열지 않았습니다. 거주하는 집은 당연히 잘 안 알려주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하면 한두 자리 틀리게 가르쳐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한 많은 이민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의 옆에서 함께 뒹굴면서 동고동락하던 그가 갑자기 손을 훌훌 털었다. 그리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90년도인가 그럴 것입니다. 55세 이전에 진로를 다시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새로운 일로 인생 후반전을 뛰어보겠다는 작정을 한 것입니다.”


성실, 진실, 절실

그렇게 인생후반전을 출발한 그는 조선족들이 많은 연변에 짐을 풀었다. 이미 낯설고 물선 호주에서 이민 생활을 경험한 그였지만 중국은 더 열악했다. 그렇지만 ‘의지의 한국인’ DNA를 가진 그는 넘어섰다 일어서기를 거듭했다.

연변에 도착한 그는 사업 아이템으로 연길 서시장 뒷골목에 ‘낙원떡집’이란 상호를 내걸었다. 떡집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생존의 방편이었고, 이거라면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떡을 처음 만들었는데 안 팔렸습니다.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비쌌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가격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파리 날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에서 호텔을 짓는 거예요. 우리 물건도 보관할 겸 창고 같은 작은 홀을 하나 빌리게 되었습니다. 공사장이라 식사 때가 되면 음식 수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떡국, 떡볶이를 해서 팔았습니다. 이게 대박이 난 거에요.

홀에 탁자 서넛 밖에 없을 정도로 작으니 사람들이 죽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 다음엔 김치찌개, 된장찌개, 자장면, 우동도 만들어 팔았지요. 우리가 음식을 잘 만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인터넷 뒤져가며 좀 맛있게 만드는 법을 연구했을 뿐입니다.”

하나가 잘되면 따라 잘되는 법이었다. 비싸다던 떡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지점을 낼 정도로 비즈니스가 활성화되고, 신바람이 났다. 그럴수록 그는 성실하고 진실하게 접근했다.

“종업원의 친절교육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특히 단체로 오는 손님보다 혼자 오는 손님을 더 정중하게 모시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입소문이 어떤 광고보다 위력적입니다. 꼭 그런 목적이 아니라도 단체로 와서 큰 소리치는 사람보다, 혼자 정기적으로 와서 조용히 식사하고 가는 분들이 진짜 고객이지요. 그런 분에게 일부러 따뜻한 물 한 컵이라도 더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남는 음식이나 떡은 항상 굶주린 배로 살아가는 주변의 구두닦이 소년들에게 주었다. 특히 명절에는 주변 상가들과 이웃들에게 떡을 돌렸다. 어디에서나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차가 우리 가게 문을 들이받고 뺑소니를 쳤어요. 그걸 본 구두닦이 소년이 택시를 타고 따라가 잡았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내노라 하는 떡과 음식전문인이 와서 가게를 오픈해도 그가 있는 곳에서는 안되어 떠나간다고 하였다.

“사실 우리는 떡과 음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떡과 음식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저희 떡과 음식에 입맛이 들여졌기 때문에 저희 것을 진짜로 알고 진짜 명품떡, 음식을 짝퉁으로 안다는 게 아이러니지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가 베푼 사랑의 나눔과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치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아지듯이.
 

천사장학회는 필생의 소명

떡도, 음식도 모르고 시작한 떡집, 음식점이 수십 개의 지점을 낼 정도로 비즈니스를 일군 것이 그의 소명이 아니었다. 조선족 꿈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독립군 후예들인지도 모를 그들이 돈이 없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면 안된다는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중국 이민 초창기, 비즈니스가 넉넉히 잘 돌아가지도 않던 시기부터 ‘천사장학회’를 운영했다,

“97년부턴가 시작하여 16회가 되었군요. 매회 20~30명씩 지급해왔습니다.”

규모와 액수에 대해서 굳이 밝히지 않았지만, 길림신문 등 현지 언론에서는 그의 선행을 적지 않게 보도해 왔다. 특히 교화조중학교 리송춘 교장은 “누구나 한 번 좋은 일을 하기는 쉽지만, 지속적으로 평생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최 회장을 평가했다. 단지 최 회장은 천사장학회는 필생의 숙원사업으로 생각하며, 이 장학회를 운영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했다.

“현지인을 키우면 큰 재목이 됩니다. 그들을 키우는 방법은 장학금을 주는 일입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 자기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격려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원동력이 되지요. 그렇게 도움을 받음으로써 또 남을 도울 수 있는 정신과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됩니다.”

단순히 그는 천사장학회가 재정지원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 연변대, 연변과기대 등지에 견학시키기도 하며, 학생들의 국제 캠프 참가에도 후원하기도 한다. 그는 언제나 가장 큰 베풂은 자기 단순한 재정지원이 아닌 자기 자신과 마음을 먼저 주는 것임을 인식하고,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는 이 꿈이 북한 땅에도 심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 꿈이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그 꿈이 이루어지는 첫 삽은 이미 떼었다.  
 
▲시교협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최승호 회장 부부(앞줄 가운데) ⓒ크리스찬리뷰

칠골민속관(평양락원 합작회사)이란 이름으로 평양의 유서깊은 거리에 대형 음식점이 들어섰다. 그곳을 통해서 이루어질 또 하나의 소명이 어떻게 성취되어갈지 호주에 남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볼거리를 기대하게 되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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