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도 해답이 있습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4/29 [11:26]

▲ 국내 1호 부부 가정 사역 강사로 알려진 가정문화원의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 ⓒ크리스찬리뷰  

부부 강사 1호 

불철주야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부르짖는 그의 이름은 새까만 후배들에게 ‘전설’이었다. 몇 년 후 필자는 그 ‘하늘 같고 전설같던’ 선배를 아주 가까이서 ‘간사’라는 직함을 달고 대할 수 있었다.

그때가 바로 1984년. 그 해 6월, 뚝섬에서 있을 세계교회기도성회와 8월에 여의도광장에서 있을 ‘한국교회선교 100주년기념대회’ 때 최일선에서 보병처럼 뛰는 부대가 바로 CCC 졸업생들로 구성된 ‘나사렛형제들’이었다.

이미 엑스폴로 74, 80년세계복음화대성회 등 초대형집회에 이력이 붙은 이들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인적, 물적 자원이었다. 당시 필자는 일이 막힐 적마다 서소문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때마다 그는 막힌 것은 뚫어주고, 얽힌 것은 풀어주고, 구겨진 것은 펴주었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시드니에서 만남이다. 그동안 그는 본업(칠성산업) 외에 ‘가정 사역자’로 화려하게 ‘진화와 변신’을 이뤄냈다. 여느 가정 사역자는 ‘솔로’로 뛰는 반면에, 그는 ‘부부 듀엣’으로 이 사역에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최근 부부 공동으로 어느 결혼식 주례를 했다는 이색적인 기사를 대하기도 했다. 그만큼 아이디어가 풍성하고, 활동 지평이 확장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내 1호 부부강사’란 진기록을 세운 이들 부부는 (사)가정문화원을 통해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가정행복 전도사이자 부부행복 코치이다.

현재 이들은 기업특강 섭외 0순위의 인기‘국민강사’로 3천 회 이상의 강의 경력을 갖고 있다.

“우리 부부가 가정을 지키는 행복 전도사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89년에 ‘건강한 가정, 건전한 가정문화 확산’을 목표로 가정문화원(www.family culture.net)을 설립하면서부터입니다. 갈등이 없지 않았던 그 당시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던 ‘패밀리 라이프 프로그램’ 강의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그의 말처럼 압축경제를 살아온 기성세대들은 가정의 희생 위에 일 위주의 삶을 살았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나라 경제부흥은 ‘아내들의 고독을 먹고 자랐다’고 할 수 있다. 일만 보이고 가정은 안 보였던 것이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문화가 한국가정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정의 문화가 바뀌었다. 가정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가정은 1차 사업장이고 사역지임을 이들 부부는 각성했다. 그리고 가정 섬김이로 나섰고, 수많은 가정을 일으키고 세우고, 이끌어주게 된 것이다.

“나는 결혼 전 가정과 부부생활에 대해 교육받은 일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잘못 입력된 정보뿐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반 만 년 동안 이 땅의 남성들이 누려온 가부장적 문화의 혜택을 입은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사회도, 가정도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젊은 날에는 고운 정, 미운 정이었으나 나이가 드니 연민의 정에 측은한 마음까지 듭니다. 지겹도록 붙어다녀야 하는 부부, 때로는 볼멘소리에 바가지 긁는 소리가 들려도 그 소리 듣는 때가 행복한 줄 알라는 아내의 소리가 이제는 즐겁게 들립니다.”

요즘 그의 신조는 바뀌었다고 한다. ‘젊어서는 일을 챙겼지만 나이 들어서는 마누라를 챙겨야지’로.

그의 40년 동지이자 동역자인 부인 김영숙 원장 역시 뼛속까지 CCC 훈련으로 무장된 김준곤 목사의 1세대 제자 중 한명이다. 이화여대 약대 출신으로 늦게 합동신학대학원을 거쳐 풀러신학교에서 상담학 박사를 딴 재원이다.

“우리가 만나 결혼할 당시에도 아내는 최고의 인기 신부감이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약사로 있었는데 국가적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약사는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최고의 직업이었으니 말입니다. 신앙이나 성품도 마음에 들었지만 결혼하면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결혼 후 약국을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약 처방전이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의 처방전에 의한 양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방전에 의해 쓰여진 구약과 신약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스갯소리로 ‘광 잡은 게 아니고 멍 잡았다’고 합니다. 하하하!”

 
▲ 두상달, 김영숙 부부는 강연 뿐 아니라 결혼주례도 함께 본다.(시드니순복음교회 강연 장면) ⓒ크리스찬리뷰

‘부부 면허증’

이렇게 만난 부부의 절대적인 신조는 “행복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가정은 삶의 휴식처이며 에너지 충전소이다. 가정은 인간관계의 훈련장이며 교육장이다. 가정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도 성공한다. 행복한 가정이 나의 경쟁력이며 기업의 경쟁력이다” 등등이다.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 큰 사고를 내고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남편될 자격, 아내될 자격이 없는 이들은 결혼 후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니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결혼 면허가 꼭 필요합니다.

최근에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은 결혼 면허증이 없는 무면허 부부가 태반이기 때문입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많은 이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등이 있는 부부는 99% 변하고 문제가 없는 부부에게는 예방효과를 가져다주는 우리의 활동이 결혼 면허증을 주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부 면허증’ 발급사인 이들 부부는 KBS, MBC, SBS 등 지상파 TV·라디오 방송출연을 비롯해 각종 기업, 세미나, 행사 등에 참여, ‘건강한 가정 만들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삼생생명, 현대중공업, 전경련, 금호건설, 기업은행,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 대기업 주요행사에 강연자로 초청받는 것은 물론 국정원, 보건복지가족부, 행정안전부와 지자제 및 관공서에서도 강연을 펼치고 있다.

가정친화기업문화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최근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수상했다. <아침 키스가 연봉을 높인다> <결혼 1000일 안에 다 싸워라> 등을 부부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가정 행복 특강을 하면서 청중들에게 아침 키스하라고 하면 난색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 키스’를 너무 거창하게 해석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침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말합니다. ‘아침 키스’는 우리 부부가 강연할 때 이해를 돕기 위해 하는 말이고, 이 말은 아침에 가벼운 포옹이나 볼에 살짝 뽀뽀 해주기, 하이파이브 하기 등 최대한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키스를 하고 회사로 향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마음속에는 행복감과 활력이 넘칩니다. 아침 출근길이 즐거운 부부는 직장에서 최고의 능률을 발휘합니다. 아침 키스를 받고 출근하는 남편(아내)은 그렇지 않은 남편(아내)보다 연봉이 20퍼센트나 더 높다는 선진국 통계도 있습니다. 부부사이가 좋으면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배우자로부터 지지받고 인정받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200퍼센트 발휘하니 일이 잘 될 수밖에 없지요. 반면에 부부싸움을 하고 출근한 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많이 냅니다. 운전도 함부로 하고, 고객한테도 불친절합니다. 교통보험료도 올라갑니다.”

아침에 결정되는 하루의 기분은 바로 가정에서 발전되고 생산된다고 믿는 그는 ‘아침을 웃으며 시작하면 대박 인생, 찌푸리면 시작하면 쪽박 인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니 ‘성공하고 싶다면 키스로 아침을 시작하라!’고 외치며 세계 각국을 다니고 있다.

펄벅이 “가정은 나의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가정의 소중함과 가치를 전파하고 있는 그는 정작 어렵고 힘든 가정에서 성장했다.

가난한 가정의 늦은 나이에 임신한 그의 어머니는 뱃속 태아를 지우기 위해 천으로 배를 꽁꽁 싸매기도 하고 잘 듣는다는 약을 먹기도 했다. 한 번은 부엌에서 독한 약초즙을 마시고 2시간 동안 기절해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고, 병원이 많지 않았던 게 그가 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된 지독한 역설의 출생이었다. 
 
▲ 부부간의 삶과 갈등을 사례별로 짚어주고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는 두상달 장로외 김영숙 권사 ⓒ두상달

두가 가문의 양가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주’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학교를 거의 한 달 동안 가지 않은 적도 있다. 길 옆에 있는 저수지에서 놀았다. 요즘 말로는 ‘땡땡이’ 그때 말로는 ‘중등치기’를 하다가 형에게 발각돼 실컷 두들겨 맞고 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두가’가 아니라 ‘양가’였다. 석차는 언제나 1등이었다. 5등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다. 물론 거꾸로 헤아려 그렇다는 말이다. 성이 양가로 바뀐 것도 ‘수·우·미·양·가’ 중에서 ‘양’이나 ‘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는 집에서 가까운 죽산중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1학기 초반 무렵 영어시간에 놀라운 전환점이 생겼다.

“형이 알파벳을 미리 알려줘 익힌터라 별로 어렵진 않았습니다. 영어 선생님이 몇 사람을 불러 칠판에다가 알파벳을 쓰게 했습니다. 잠시 후 칠판을 확인한 선생님은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선생님 손이 내 머리에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부르시면 주먹으로 머리를 맞거나 회초리로 맞기 일쑤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꿀밤이나 회초리 대신 손바닥을 펴 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평생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 1학기 때 전체 23등, 영어 1등, 2학기 때 3등을 했습니다. 2학년 1학기 때부턴 전체 1등을 놓쳐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면제받았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칭찬과 격려가 생명력을 가져 내 인생에 또다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국비 장학생을 뽑는 한국해양대에 지원했다. 2천여 명의 지원자 중에 그는 무시험 합격생 7명 안에 들어갔다. 전라북도의 유일한 무시험 합격자였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중이염과 결핵이 있다는 이유였다. 신체검사를 도왔던 3학년 선배의 도움으로 재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그는 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돌파구도 없었다. 집에서 1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지막 순간 호흡도 어려운 순간,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한 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뜨셨다.
 
▲  지난 2월 집회 차 시드니를 방문한 두상달, 김영숙 부부가 과거 함께 활동했던 CCC동료들과 통화하며 옛 정을 나누었다.ⓒ크리스찬리뷰

상달아, 집을 떠나거라 

그는 그 길로 쌀 한 가마니 값만 가지고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섰다. 친구 자취방에서 함께 기거하며 일자리를 구했다. 처음엔 공사판에 나갔다. 녹록하지 않았다. 이틀 정도 나가다가 몸이 너무 아파 그만뒀다. 마침 ‘맞춤 와이셔츠 외판원’이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집이나 사무실을 찾아가 와이셔츠 주문을 받아 치수를 재서 넘기고 완성된 와이셔츠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쉬웠다. 1주일 정도 그 일을 하다가 직접 사무실을 차려 뛰어다녔다. 한편으론 청계천에 좌판을 폈다. 껌과 엿, 담배 등을 팔았다.

동네 건달들이 좌판에서 무조건 음식을 집어먹는 통에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지만, 그들과 친해질 수 있어 장사하기엔 편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라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두려워 벙거지를 구해 푹 눌러썼다.

어느 날 대학생 교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좌판 앞을 지나는 친구를 보게 됐다. 다행이었다. 그 친구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돈을 벌겠다는 일념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학업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책을 들었다. 그리고 1960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어린 생각에 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밤마다 중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마다 성적이 쑥쑥 올랐다. 최소 10등 안에 들었다. 이들은 경기고 서울고 이화여고 등 세칭 일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소문이 나면서 계동이나 재동, 안국동 등 잘 산다는 동네에 과외교사로 불려다녔다.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어떤 친구가 동아리 활동을 제안했다. ‘어떤 목사님이 좋은 말씀도 들려주시고 여자 친구들과도 사귈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그 꾐(?)에 빠져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이 모임에서 그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인생에서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마음을 흔든 인생의 멘토를 만나다 

“어떤 사람이 나를 시궁창에 묻는다 해도 나는 머리를 털고 웃으며 일어나리라”

대학 시절, 그의 일기장에 있는 글이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렵더라도 내게 어떤 역경이 닥친다 해도 이겨내 목표를 이루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를 따라 CCC 예배에 참석했다.

삶 자체가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하나님께 의지한다거나 다른 절대적인 대상에 기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던 터였다. 그런데 그날 강단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그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놓았다. 그 길로 그는 CCC 회원이 되었다. 그렇게 만난 김준곤 목사는 평생에 잊지 못할 스승이요, 멘토요, 동역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반추하니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판단력이 그때 생겼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목표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돈을 버는 것도,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CCC 활동으로 채워졌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그랬듯 신앙생활도 극적이진 않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평범한 어떤 일에서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고 나를 단련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는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미물 같고, 질그릇 같던 그를 변화시키신 주님을 생각할 적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감사와 평안 속에서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때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이번 축구경기에서처럼 환호하기도 한다. 완악한 생각이 들거나 감격을 잃을 때면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한다. 고학하던 시절 차가운 하숙방에서 새벽 미명에 무릎을 꿇고 서투른 언어로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기도를 드리며 눈물짓던 그때의 감격을 생각한다.

“만약 예수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호탕하고 방자한, 다혈질적이기도 한 성격에 엄청난 탕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나는 매일 기쁨에 넘쳐 삽니다.”

▲  최고의 노후 대책은 부부의 행복이라고 강조하는 두상달 장로 부부 ⓒ두상달
 

중동선교 불씨가 되다 

교수가 되고자 대학원까지 마친 후 그는 ‘해외유학과 돈’이란 장벽 앞에 진로를 수정했다. 서소문에 10평 정도의 사무실을 얻어 무역회사를 차렸다. 직원도 2명 뽑았다. 주요 품목은 손수건과 직물, 나무젓가락 등이었다. 당시 합판이나 가발이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그러나 외국 바이어들이 새로 생긴 회사에 주문을 줄 리 만무했다. 무역회보 등 몇몇 매체에 광고를 냈다. 쉽게 주문은 들어오지 않았다.

“엑스폴로 74대회에서 봉사한 후 다시 사무실에 나간 어느 날, 나이지리아의 바이어라며 한 흑인이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손수건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별로 많이 살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높은 가격에 견적을 냈습니다. 바이어는 현찰로 결제를 하겠다며 깎아달라고 하여 10% 낮춘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오면서 커다란 봉투에 달러를 봉투에 담아왔습니다. 이때부터 조금씩 주문이 들어오면서 사업이 정상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하청업체의 결제는 언제나 현금으로 했고, 하청업체는 언제나 우리 주문을 먼저 처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쌓아간 그의 사업이 본궤도 오르자 그는 특히 중동선교에 눈을 돌렸다. 열사의 중동. 사도 바울이 사선을 넘어 전도했던 고린도와 빌립보 갈라디아 등 소아시아 교회가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모슬렘이 지배하는 땅이다. 1970∼80년대 건설붐이 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중동에 노동자로 건너갔다.

당시 노동자로 파견됐던 기독인들은 현지인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모래 위에서, 온통 땀에 절어 돌아온 막사에서 무릎을 꿇고 그 땅을 위해 기도했다. 어느 날 친구 중 한명이 귀국해 그에게 전화했다.

“두 집사, 복음이 전혀 들어갈 수 없는 모슬렘이 지배하는 땅이지만 언젠가는 복음이 들어갈 날이 있을 거야. 중동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복음을 심는 일을 시작했으면 좋겠네”

그는 그 길로 뜻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중동선교회를 조직했다. 10여 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선교사들이 추방되어 귀국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면 혹시 체포되지 않았을까 마음 졸이며 수소문하는데 모든 일정을 잡았다. 그곳 선교사들은 스스로 사망선고서를 쓰고 떠나며 이름도 가명을 써야 한다.

사역자들도 점조직으로 현지 기독인들을 훈련시킨다. 자칫 모든 사역자들이 한꺼번에 추방되는 경우도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은 뜨거운 열정과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떠난다. 뜨거운 모래 폭풍같은 모슬렘의 땅에 오아시스 샘물 같은 예수님의 산들바람이 불게 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중동지역에 서서히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91년 걸프전으로 인한 이슬람권 자체의 분열, 매스컴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서구 문물의 유입, 해외여행에 따른 자각 등으로 변화의 바람을 겪고 있습니다. 쿠웨이트의 경우 남녀가 학교도 따로 다니고 운동경기에 여성이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영장이 여성에게 개방되고 사회 참여 비율이 미미하지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소수 종교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토지의 무상 제공, 수도 및 전기요금 면제 등의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최근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붕괴로 변화의 물꼬가 한층 커진 모양새입니다. 선교사들이 모슬렘을 향해 사랑과 기도와 관심으로, 때로는 자신의 피를 뿌리며 문을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교회와 사람들이 기도로 후원하고,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사역한다면 곧 중동지역에도 복음의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그가 80년대 초에 세운 중동선교회는 한국에서 중동선교의 첫 바람을 일으켰다. 처음 중동선교회에서 뉴스레터지를 만들 때 필자가 봐준 적도 있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평신도 사역의 새 지평을 연 그에게 진부한 대답이 아닌 단답형이란 조건으로 몇 가지를 물어봤다.

-'가정'란 한마디로? '부부'란 한마디로?

“가정은 마사지다. 부부가 마주보고 사랑하며 지지고 볶는 곳이다”

-'치유'란 한마디로?

“고무 지우개로 슬픈 과거를 지우는 것이다.”

-'신앙'이란 한마디로?

“신앙이란 때로는 두 얼굴, 세 얼굴로 살아가는 것”

- 내 생애 최고의 의미와 행복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여우’같은 아내를 만난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다. 인생후반전에 그 아내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의를 펼치며 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평생 쌓아온 결혼 노하우와 삶의 경륜들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가!”

-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꿈을 가진 후배들에게 간단히 멘토링이 될 만한 내용은?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특히 인생 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지금 세대들은 은퇴 후에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돈 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보다 가치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돈 벌어 남 줄 수 있는 일을 찾아라! 장기적 안목에서 과감히 도전하라.”〠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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