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인생 50년, 그 이후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5/27 [12:39]

▲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준 석은옥 권사가 본지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 고 강영우 박사 추모음악회 및 간증집회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50년 전 서울맹학교 학생이었던 저는 자원봉사자 여대생인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40년 전 저는 그 예쁜 여대생 누나에게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비전이 담긴 이름 석자, ‘석,은,옥’을 선물하며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유학생의 신분으로 미국에 온지도 30년을 훌쩍 넘어 40년이 다 되어 가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창립한 사회복지법인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은 2012년 20주년을 맞이합니다.(중략)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당시 중학생이라면 꿈도 못 꿨을 예쁜 누나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었고, 실명으로 인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하략)

- 2011년 12월 16일 강영우 드림

이상은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고 강영우 박사의 마지막 편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소년 강영우를 강영우 박사’되게 한 데에는 ‘예쁜 여대생’누나가 50여 년 동안 ‘지팡이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지팡이 역할을 한 소년의 인생을 변화시킨 정도가 아니다. 한국 장애자의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그리고 장애자에게도 무한도전과 가능성, 성취를 보여준 모범사례이기도 손꼽힌다.

지금은 중3 영어 교과서(교학사)에 현대의 영웅으로 소개되어 있는 강영우 박사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언론은 ‘우리나라 최초 장님 박사 탄생’, ‘한국 최초 맹인 박사 금의환향’ 등의 제목으로 남편의 귀국을 대서특필했다. 당시 그 기사를 본 연세대 윤형섭 교수가 조선일보에 ‘평균점수’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앞 못 보는 장님이 박사가 되었다기에 기사를 읽어보니 그 뒤에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며 석사학위 교사까지 된 부인의 희생적인 사랑과 내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 여성의 평균 점수를 올려주었다는 내용이었다.

▲ 열린문교회 간증집회에서 몸찬양하는 석은옥 권사     ⓒ 크리스찬리뷰
 

 
 
 
 
 
 
 
 
 
 
 
 
 
 
 
 
석은옥주, 주님의 시대

이번 달 리뷰초대석에는 바로 ‘한국 여성의 평균점수를 올려준’ 석은옥 권사이다. 본명은 석경숙이었으나, 50년 전, 청년 강영우가 ‘예쁜 누나’에게 프로포즈하면서 선물한 이름이다.

“제가 성은 돌 석(石)씨예요 그러니까 7년 동안 자기하고 어려운 돌밭을 걸어가는 7년을 했는데 3년을 기다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는, 이 돌밭을 지나가는 10년이지요. 그 다음 72년에 졸업하고 결혼하여 부부가 되어 지내는 10년은 하나님 은혜의 시대라는 겁니다. 그 10년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옥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비전을 저에게 제시해주는 거예요.

저는 그때 너무나도 탄복하고 하나님 이렇게 훌륭한 비전을 가진 사람을 저의 남편으로 주시고 제가 또 그 사람을 위해서 아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 감사했고 너무나도 기뻤어요.

그 다음, 그러니까 제가 석은옥으로의 삶은 92년에 끝났어요. 72년부터 82년까지 82년에서 92년까지 옥의 시대가 끝났거든요. 92년 이후에 저희 책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옥의 시대가 끝났는데 그럼 이제 다이아몬드의 시대에 사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저한테 주신 지혜는 ‘주님의 시대’였어요.

이제까지 인간적인 마음으로 10년 10년을 살았는데,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더 많이 더 좋게 해주셔서 이제 주님의 시대를 삽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이 석은옥주로 씁니다.”

그렇게 ‘석은옥주’의 시대를 달려오던 그는(이들 부부의 결혼과정, 삶의 여정은 본지 2009년 9월 호 소개. 이번 호에는 그 이후의 삶을 소개함), 어느 날 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남편의 건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때(2011년 10월) 남편과 함께 한국 행사로 같이 갔습니다. 작은 아들의 첫 아이 출생일이 10월이라 저는 일주일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만난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문학동네에서 ‘해피 라이프’라는 책을 내어 출판기념회도 하고, 두란노 아버지학교 특집 등 다른 여러 행사도 했습니다.

같이 있을 때도 특별한 이상이 없었습니다. 일 주일 후에 남편이 도착했는데, 얼굴 표정이 그냥 피곤한 게 아니고 약간 누르스름하게 변해 있었어요. 소화가 안되어 활명수 하나 먹고 왔다고 해요. 우리가 보기엔 피부가 변하니 심각하잖아요? 그래서 아들에게 전화해 응급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처음엔 소화가 안됐다길래 그쪽으로 갔습니다.

담석 제거수술을 하고, 11월 초에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일 주일 후 다시 소화가 안됐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사했습니다. 여러 검사를 한 달 동안 하니 결국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존스홉킨스 병원과 여러 병원에서 다시 검사하니 10% 생존율이라고 하더군요. 일하느라 그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 해피 라이프 책자 표지     ⓒ 석은옥
 
웰 다잉, 죽음을 받아들이다

 
이때 강 박사는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렸다. 이 땅에서의 삶도 아름다웠지만, 마지막도 아름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생존율 5~10%밖에 안된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결정하더군요, 수술 받지 않고, 준비하겠다고 말입니다. 암치료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단절되고, 대화도 안되잖아요? 그때부터 가족들도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11월부터 마음을 차분히 하고, 아침에 항상 30분씩 집앞을 산책했습니다. 1시간씩 운동도 하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 듣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쓴 책,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두란노 발행)를 한자 한자 타이핑을 했습니다. 12월이 되니 자꾸만 약해졌습니다.

집으로 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치료하는데 식사도 죽같은 것만 드리라고 해요. 의사가 3,4개월 남았다고 하니, 이메일로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더군요. 아들에게도 아내인 저에게도 편지를 쓰고, 12월에 신문사에 알리더군요. 이런 진단을 받아 살 날이 얼마 안남았다고 말입니다. 1월에 아이들 가족이 와서 예배드리고, 그러면서 교회도 가서 모든 것을 하나씩 정리하더군요.”

그의 이 소문이 LA를 비롯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사방에서 연락이 빗발쳤다. ‘왜 진료를 안받으시느냐?는 애정어린 염려부터, 하나님 뜻으로 약을 보내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 주었다고 전했다. 이때 강 박사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정리를 한다. 받은 은혜를 후하게 갚아서 더 좋은 사회를 이루는 놀라운 전범을 보여주었다.

“변호사인 작은 아들에게 재정관리를 다 하라고 하면서, ‘내가 받았던 로터리 장학재단에 후원하고 싶다고 해요. 25만 불을 내면, 세계 평화를 위한 연구 석사과정 한 학생을 후원할 수 있는 한 프로젝트가 된다. 20만 불은 내게 있다’하니 두 아들이 2만 5천불씩 보태어 듀크대학 냈더니 로터리 총재가 와서 전달식을 했습니다. 1월 말이 되자 너무 약해져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석 권사는 강 박사가 마지막 준비를 잘 해준 것을 가족들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마지막 3주는 병원에서 보냈는데, 점점 약해지고 마르는 모습 보았을 때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인생 60을 지나면 마지막이 온다고 하지만 70도 못넘겼지요. 68세에 말입니다. 아들들도 잘 받아들였습니다. 교통사고 등으로 갑자기 이별하는 것보다 4개월 동안에 조금씩, 그리고 여러 가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간 것이 다행이었지요.

그동안에 저희들도 준비했고, 매일매일 같이 편지 쓰고 준비하고 언젠가는 인생을 떠나는 준비, 장례하는 것까지 다 준비했으니 말입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그래도 편안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으니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가까운 버지니아교회 가족묘지에 모셨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여기로 올 건데,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때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신앙 안에서 소망 안에서 부활을 믿고 편안하게 간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많이들 칭송했습니다.”

그렇게 2012년 2월 23일 소천하고, 3월 4일 고별예배를 드렸다. 고별예배 때는 오바마 대통령의 조사를 비롯하여 민주당 상원의원, 국제 로터리 총재, 부시 전 대통령이 참여하여 애도했다. 한국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영결예배를 드려주었다. 이명박 대통령 등 사회 각계에서 조화를 보내왔다.

작은 출발, 큰 열매

그렇게 남편을 보낸 석 권사는 ‘주님의 시대’로 새로운 소명 앞에 섰다. 한국인 최초로 맹인 박사 학위 받을 때 남편이 박사복을 입고 학위증을 받으러 나갈 때 그는 ‘지팡이’로 학사복을 입고 남편 안내하면서 그에겐 ‘은의 시대’가 끝났다. 옥의 시대를 거치면서, ‘주님이 인도하는 시대’를 살자하니 미국에서의 활동이 넓어지고, 부시 대통령 백악관 차관보로 임명 받아 백악관을 안내하던 지팡이가 되었다고 소회했다.

‘나는 그대의 지팡이, 맹인들의 심벌이 되는 사이트였지만, 남편이 시각과 지혜는 나의 등대’로 살아온 그는 남편 덕분에 백악관도 여러 번 가보고 했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다.

“시각 장애인을 만나 51년간 함께 살며, 또 인디애나주 퍼브릭스쿨에서 시각장애인 교사로 28년을 생활해온 저의 인생은 시각 장애인들과는 피와 살같은 관계입니다. 우리 남편도 장학금 받았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오늘의 강영우가 된 것 아닙니까?

한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제2, 제3의 강영우처럼 되기를 소망합니다. 개인적으로 2004년에 <나는 그대의 지팡이 그대는 나의 등대>인세를 받아서 18명에게 2천 불씩 시작했습니다. 2백 만원씩 대학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준 것입니다. 남편이 소천하고, 남편을 기리면서 강영우 재단을 만들어서 장애인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한국의 은평천사원 회장께서 은평천사원 사회복지법인 내 지정장학금 구좌를 열어주면서 그분이 300만 원을 내겠다고 하여 시작했습니다. 우선 대학원 진학자를 후원하려고 합니다. 5월부터 친지들에게 알려서 1만 불 가까이 모아졌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열심히 모금하고 있습니다. 비영리 법인으로 6월에 정식 등록되면 100불부터 세금공제가 됩니다. 내년 9월에는 한국에 자격있는 사람, 전국적으로 보내드려고 합니다. 우선 한 사람을 미국유학(석사과정) 후원하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지 않고, 우선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진행해가는 그의 모습에 신뢰가 갔다.

강영우 장학재단은 현재 석 권사가 이사장을 맡고, 회장은 강 박사와 연대 교육학과 동기인 김종랑 한양대 이사장이 맡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강 박사의 추모물결은 계속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정동감리교회, 상도교회 등에서 그를 추모하는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작년 10월 세계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날, 대통령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강 박사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양평의 훌륭한 인물’ 2인에 선정되어 양평군 박물관에 강 박사의 유물을 전시하고 싶다고 하여 강 박사의 금메달, 훈장, 미국 부시 정권의 정책차관보 임명장 등의 전달식을 위해 7월에 한국에 잠깐 들릴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9월 30일에는 전국 맹인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단 전문 음악인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강영우 박사 추모음악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 시드니의 상징인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한 석은옥 권사     ⓒ 크리스찬리뷰


 

 
 
 
 
 
 
 
 
 
 
 
 
편견을 넘어선 사랑

남편을 떠나보낸 1년 몇 개월 동안 그의 삶에도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남편과 살고 있던 콘도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남편이 쓰던 방을 게스트룸으로 만들고, 남편과 찍은 사진은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대신 손자 1명 손녀 3명 사진을 걸어놓고, 남편이 마지막에 쓴 편지,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쓴 편지 너무 아름다운 러브레터를 아침 저녁으로 식사할 때마다 보면서 위로받고 있습니다.

그는 늘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인도함 받고, 힘을 얻는다고 하였다. 처음 남편과의 결혼을 결정했을 때,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2년 자원봉사, 6년 동안 오누이로 지내다가 ‘맹인청년’인 그와 3년 후에 결혼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나의 삶을 이렇게 인도해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언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말씀에서 확신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7년 동안 준비하면서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생각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최근에 그는 간증하면서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말씀으로 ‘나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 참 그리스천의 삶, 십자가의 보혈로 내가 새로 태어났으니 나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살아보자’는 신앙고백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의 시를 생각하면서, ‘내가 내 삶속에서 실천해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슬픔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절망 미움이 있는 의혹이 있는 사람에게 신앙을...’ 이 4가지를 소리 내어 그 찬송을 하기 시작하면 영성이 맑아진다고 하였다.

“오늘은 일반적인 스케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도구로 써주시겠는가? 소망과 희망을 주신 예수님의 발자취, 성령의 열매 받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도록, 구체적인 교훈 지혜를 주십니다.”
▲ 본지와 단독 인터뷰 한 석은옥 권사     ⓒ 크리스찬리뷰


 

 

 

 

 

 

 

 

 

 

 

 

 

 

석은옥 권사는 “이번 호주 방문도 ‘강영우 추모 음악회’를 통해 프레드 할로우 재단 후원했던 것도 좋은 일이고, 남편이 강연한 그 강단에서 설 수 있었던 것도 의미있는 여행이었다”라고 밝혔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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