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방문기

소록도(小鹿島), 사슴마을을 찾아서

최승일/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5/27 [16:43]

▲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97주년기념예배에 참석한 상도교회 최승일 목사와 에덴성가대원들. 뒤에 보이는 동상은 ‘구라탑’이며, 소록도에서 봉사활동한 외국인들을 기념한 기념비이다.     ⓒ 최승일


 

 

 
 
 
 
 
 
 
 
 
 
 
 
 
 
 
 
 
남해안의 작은 섬 소록도,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어 육지 같은 섬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 모양이 ‘작은 사슴’ 같아서 ‘소록도(小鹿島)’라 이름 했다는데, 가서 보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바다를 품은 넓은 정원 같다.

얼마 전까지 소록도에는 7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인구 감소로 2개 부락이 없어지고, 지금은 5개만 남았다. 소록도 안에는 환자를 보살피는 병원과 가족들의 삶을 위한 학교와 부대 시설 등이 있고, 조그만 섬에 교회도 5개나 된다.


이렇듯 지금은 아름답고 평화롭고 살기 좋은 괜찮은 곳인데, 하지만 소록도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평화롭고 사슴처럼 아름답기만 한 소록도에 어떤 아픔이 있었을까?
 

소록도 아픔의 역사

흔히 소록도를 한센인들의 보금자리로 알고 있다. 맞다. 한센인들의 보금자리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록도병원(현재는 국립병원)은 일제 치하이던 1916년에 개원되었다. 그런데 이 병원의 개원은 한센인들의 격리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선한 뜻에서가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입원한 것도, 가족들의 합의하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 소록도병원에 입원하고 소록도에 한센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일제의 폭력이었다. 일제는 한센병자들이 더럽고 귀찮아서 그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싶었고, 그곳이 소록도가 된 것이다. 소록도와 한센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행적인 강제 감금에 무슨 돌봄과 보호가 있겠는가? 말이 소록도병원이지, 애당초 소록도에는 제대로 된 치료와 환자를 위한 편의 같은 것은 없었다. 기존의 한센병자와 또 누군가 한센병에 걸리기만 하면 무섭게 옮겨다 감금시킬 곳에 그런 게 어딨겠는가?

치료와 돌봄, 보호와 안식 대신에 고문과 강제 노역이 있었다. 그러다 병으로 사망하면 가차 없이 해부실험을 했고, 그 뒤에 시신을 화장시켜 소록도 내 납골당에 가져다 버렸다.(현장에 가서 그때를 회상할 때 ‘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차마 ‘안치했다’는 말을 쓸 수가 없다.)

1935년에 제정된 ‘조선 나 예방령’은 한센인들의 모든 자유를 박탈했다. 직업의 자유는 물론, 거주 이전의 자유 및 이동의 자유도 없었다. 당국에 걸리면 무조건 소록도 행이었다. 전염병도 아닌데 강제 감금과 강제 노역은 심했다. 가족과 생이별은 물론 한 달에 한 번 철조망 사이로 볼 수 있었다니, 게다가 온갖 노동과 고문으로 도망가려해도 바다에 막혀 잡혀오곤 했다니까 이 아름다운 소록도 바다도 그들에겐 서글픈 바다였겠고, 때론 지옥 같았을 것이다.
 
▲ 소록도교회 성가대의 찬양     ⓒ 최승일


 

 

 
 
 
 
 
 
 
 
 
 
 
 
 
 
 
 
 
소록도를 거닐며

안내소 앞에는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자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수탄장이 있다. 한센인의 자녀를 강제로 격리해 놓고, 병사지대와 직원지대에 있는 이 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만나게 했던 곳이다. 전염을 우려해 서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길가에 마주 서서 눈만 마주치게 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슴이 저몄다. 자기 살붙이를 눈으로만 바라보아야만 하는 그 심정, 눈물에 가려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소록도병원 입구로 향하는 길의 오른쪽에는 ‘회한의 과거비’란 비석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한센인) 원생들이 자치권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1945년 8월 22일의 일이다. 그리고 57여년 만인, 2001년 12월 8일, 화장 매몰된 현장에서 유골을 수습한 후 학살 장소인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병원 왼쪽과 뒤쪽에는 시멘트 옹벽이 있는데, 그 옹벽에 소록도 마을 주민 500여 명의 얼굴과 처음 쓰던 건물 모습, 그리고 사슴마을답게 사슴이 그려져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소록도에는 몇 가지 유적들이 있다. 붉은 벽돌의 마치 작은 교도소를 연상케 하는 곳은 감금실이었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건물 한 동씩을 나란히 짓고 가운데를 회랑으로 연결했다.

1935년도에 건립된 이곳, 바깥은 붉은 벽돌이고 안은 회색 빛, 들어서기가 무섭게 등골이 서늘하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얼어붙는다. 당시에 이곳을 가득 메웠을 신음과 공포가 아직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벽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한센인들은 걸핏하면 이곳에 감금되었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을까? 얼마나 많은 인권유린이 있었을까? 과연 한센인들을 사람으로 여겼을까? 깜깜한 감금실에 창 하나로 햇빛이 들어온다. 이곳에서 그들에게 한줄기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갑자기 숙연해진다.

검시실(해부실)은 사망 원인을 검사하고 해부실험이 진행된 곳이었다. 당시 모든 사망 환자는 유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부된 다음, 화장되었다.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놓고 당시 소록도 원생들 사이에서 “세 번 죽는다”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이고,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 해부이며, 세 번째는 장례 후 화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기보다 싫은 수치심과 절망 두려움을 생각하면 그들의 아픔이 어디 세 번 뿐이었을까? 한센인의 한숨과 한이 서린 이곳은 2004년에 문화재청에 등록되었다.

옛날 소록도의 인권유린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건데, 단종대(정관 절제 수술대) 앞에 서니 그 옛날의 아픔이 소리친다. 강제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고 난 뒤 얼마나 허탈했을까? 이동(李東)이라는 분은 명령 불복종 죄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강제로 단종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5세의 젊은 청년의 슬픔은 시가 되었다.
 

단종대 – 이동(李東)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이런 아픔의 땅에 오늘 나는 서 있다. 맥켄지한센선교회 이사장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민족으로서 내 나라에 서려있는 한과 아픔, 슬픈 사연을 가슴으로 느끼며 소록도를 거닌다. 처음 한센인들에게 소록도는 탈출하고픈 지옥 같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사슴마을공원’(?)이 되어있음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소록도는 이제 옛날의 소록도가 아니다. 이곳은 더 이상 냉대와 괄시, 가혹한 인권유린의 참혹했던 현장이 아니다. 아름다운 공원(중앙공원)이 있고, 그 안을 기이한 나무와 아름다운 돌들, 온갖 화초와 웅장하고 멋진 나무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비록 이 공원마저도 한센인들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졌다지만, 그래서 더 허투루 보이지 않고 더 아름다워 보인다. 여기서 보는 하늘까지 아름답다. 공원을 거닐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말 못하는 이 나무와 돌들, 이 식물들은 다 아는 것 같다는, 그래서 들려온다. “맞아요! 우리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 알고 있어요!” 이들이 오늘, 소록도의 한(恨)을 미(美)로 승화시키고 있다.
 
▲ 말씀전하는 맥켄지한센선교회 이사장 최승일 목사     ⓒ 최승일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 

*이 부분은 지난 5월 15일 소록도병원 개원 97주년 감사예배 때 소록도교회에서 최승일 목사가 전한 메시지 요약이다.<편집자>

야베스는 존귀한 자였다. 성경은 그가 그의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증거한다. 물론 야베스가 처음부터 존귀한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고통스런 존재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했을 때부터였을까? 그를 낳고 그의 이름을 ‘야베스’, ‘고통’이라 붙였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식의 이름을 고통이라 지었을까? 날마다 부를 이름인데, “고통아! 고통아!” 들을 때마다 고통스럽다.

추측건대, 야베스는 사랑받지 못한 인생이었다. 가족들은 그를 귀한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 친척과 사람들도 그를 귀한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야베스는 결코 귀한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출발은 존귀한 자도 아니었고 존귀한 인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되었을까? 어떻게 온 집안 형제들보다도 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야베스가 운명을 극복하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야베스는 고통스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복된 자로 바꿔달라고 기도했다. 야베스는 운명을 극복하고 정말 복된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야베스는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 역대상 4장 10절은 이렇게 증거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이 말씀을 몇 부분으로 잘라서 분석해보면, 야베스는 첫째, 복을 달라고 구했다. 둘째, 지역을 넓혀달라고 구했다. 셋째, 주의 손의 도움을 구했다. 넷째, 근심이 없게 해달라고 구했다.

이것이 야베스가 드린 기도였다. 야베스는 고통스런 자신의 운명과 환경과 처지에 비관하여 주저앉지 않았다. 자신을 고통스런 존재로 취급하고 바라보는 주위 눈길에도 굴하지 않았다. 운명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차례로 간단히 살핀다.

첫째로, 복을 달라고 구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대목 번역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건 개역개정판 번역인데, 어떻게 이렇게 번역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안 든다. 겸손하게 아뢰는 모습에 강조점을 두어서 이렇게 번역했다면 할 말 없겠지만, 그러면 느낌이 죽어버린다.

간절하게 구하는 야베스의 모습이 소극적으로 비쳐버리지 않는가! ‘주시려면 주시고 아니면 말고’, 그게 아닌데! 야베스는 하나님께 꼭 복을 받아야겠다는, 아니 받고야 말겠다는 심정(Oh, that thou wouldest bless me indeed, 킹 제임스 바이블)으로 간구했다. 오히려 더 이전 번역인 개역한글판을 보면,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이렇게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정확히 야베스의 간절한 자세를 살려주고 있다.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이게 더 낮고 더 맞다. 야베스는 이렇게 운명의 극복을 시작했다.

둘째로, 지역을 넓혀달라고 구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단순히 땅을 넓혀달라는 얘긴가? 그보다는 영향력을 넓혀달라는 뜻이다. 야베스는 아무런 영향력 없는 인생이 싫었다. 영향력 없는 인생은 생명력 없는 인생이고, 그것은 죽은 인생과 같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은 인생이라니, 참으로 의미 없다. 야베스는 진정 살기를 원했다. 살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더 넓은 생명 관계로 나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 중에 좁아진 자기 자아를 넓혀달라고 기도했다. 영적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이다. 존귀한 자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존경을 받는데, 야베스는 이 기도와 함께 점점 존귀한 인생으로 나아가고 있다.

셋째로, 주의 손의 도움을 구했다. 야베스는 거친 야망과 세속적 욕망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살라고 주신 자기 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기 위해 기도했다. 나의 당한 형편과 처지와 환경과 이름까지도 고통스러워 스스로 저주하고 포기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악한 행위를 야베스는 생각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그건 결코 야베스가 바라는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었다. 내 뜻대로 시작한 인생이 아님을 아는 야베스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겸손히 주님의 손에 의탁하고 싶었다. 주님의 도움의 손길이 오면 그 손길 따라 살고 싶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존귀한 인생에 빠질 수 없는 믿음의 간구이며, 겸허한 순종의 모습이다.

넷째로, 근심이 없게 해달라고 구했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출발한 인생은 환난의 인생이었다. 출생부터 그랬다. 혹은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아니 실은 이 모든 면에서 그랬다. 그의 날들은 환난으로 시작해서 환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연속되는 환난의 날들, 근심의 날들이 야베스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의 전부였다. 야베스가 과연 살아있는 영혼이라면, 살고자 하는 생명이라면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모든 것이 막혀있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환난과 근심 속에서, 이건 현실인데, 어떻게? 그러나 야베스의 소원도 현실이었다. 어디서 오는 용기였을까? 야베스는 드디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근심 제로(zero)의 인생을 꿈꾼다. 마침내 그는 거룩한 탈출을 시도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로의 새 출발을 감행한다. 그런 다음 야베스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근심을 벗어던져 버렸다.

이것이 야베스의 존귀한 해피엔딩(happy ending) 인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야베스는 행복하고 존귀한 인생을 살았다. 비록 한센병이라는 고통스런 처지에 있을지라도, 그보다 더한 괴로운 딱지가 붙은 인생이라도, 야베스처럼 기도의 자리로 나가 복과 은혜를 구하면, 어떤 슬픈 사연의 탄식 인생도 기쁨과 감사와 존귀한 인생으로 바뀌게 됨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일어서서 복을 받고 승리하는 거룩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 소록도교회에서 특별찬양하는 상도교회 에덴성가대     ⓒ 최승일


 

 

 
 
 
 
 
 
 
 
 
 
 
 
 
 
 
 
 
소록도에서의 생명 나눔

소록도병원 개원 97주년 기념예배 설교를 부탁받고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소록도교회의 거룩한 성도들과 그들을 돕는 손길들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하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우리 모두와 생명의 아름다움을 나누기 원하셨다.

나는 이 소록도의 아름다운 사슴마을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운명을 탓하며 소중한 삶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기를 기도한다. “나는 왜 한센병에 걸렸을까? 내 인생이 이게 뭔가? 도대체 이 꼴이 뭐란 말인가? 누가 내게 이런 삶을 살라는 것인가?” 이런 종류의 끝없는 상념들은 소중한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들 뿐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탄은 이런 식의 근심의 잡념으로 괴롭힘 성공을 매일 거두려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소록도를 거닐면서와 또 예배의 자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읊조리며 기도하고 또 읊조렸다.

“하나님! 악한 영들이 주는 근심의 잡념과 한탄의 연속이 이곳 사슴마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사슴마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다 떠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에게 근심이 없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소록도가 남긴 여운

하나님께서 우리를(필자와 상도교회 에덴찬양대원들) 소록도에 보내시고, 그날 은혜를 주셨다. 부족한 우리에게 은혜 주시려고 부르셨음을 깨닫고 나니,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더없이 감사했다. 소록도를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지만, 그날의 여운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다. 눈부신 하늘 아래 푸른 바다 정원의 사슴마을 소록도가 영적인 소록도가 될 것을 꿈꾸며 기도한다. 그곳 사슴마을을 찾는 이마다 그 영혼이 사슴의 눈처럼 맑고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한다.

고통의 인생에서 존귀함의 인생으로 나아가는 야베스의 아름다운 생명의 믿음을 소록도 사슴마을 사람들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소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승일|맥켄지 한센선교회 이사장, 상도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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