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 한 자, 절실한 신앙고백

91세 노구로 성경 필사 18년째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10/28 [11:09]
▲ 18년째 성경 필사를 하고 있는 이필순 권사. 그는 “성경 필사를 하면서 건강이 회복되는 응답을 받았으며, 언어의 능력과 총명을 주셔서 유창하고 정확하게 성경을 암송하게 하셨다”고 간증했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성서침례교회 이필순(91) 권사가 쓴 성경 필사본을 본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18년째 필사한 성경은 두 번째 필사에 들어가 지금 거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심장이 아파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습니다.”

이 권사가 필사에 도전한 이유였다.

시작 단계에 역경이 없을 수 없다. 필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 인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 성경을 옮겨 쓰면 어깨가 무너질 듯 통증이 밀려오고, 눈이 침침해졌다. 모세오경까지 쓰고 나서는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쓴다.”라고 격려해 주셔서 새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 고백을 들으면 성경필사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권사는 성경을 필사하면서 건강이 회복되는 응답을 받았다. 여기에 언어의 능력과 총명도 주셔서 성경을 유창하고 정확하게 암송케 하셨다. 그 수준 또한 깊어서 주제별 관련 성구 중심에서 발전, 이제는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성경을 장 단위로 정확하게 암송할 정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 시대의 ‘영적 사건’인 것이다.

▲ 이필순 권사의 성경 필사 노트. 1996년 4월 10일 창세기부터 쓰기 시작했다.     © 크리스찬리뷰

성경 필사는 간절한 기도

이 권사가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은 마가복음이다. 그는 “성경을 쓸 때 온 마음과 정신을 다 집중하기 때문에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좋아지는 것 같다”며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성경을 써 내려가면서 아픈 몸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제 정성을 보시고 꼭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어요. 지금까지 안 아파요.”

비록 글씨를 쓰느라 힘들었지만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생활태도도 바뀌었다.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졌고 일기도 다시 쓰게 됐다. 신앙생활과 인간관계도 활력을 되찾았다. 말씀으로 무장해 권사의 역할을 해내는데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필사하는 동안 성경을 암송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 2번째 필사노트 지난 7월 마태복음을 쓰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성서침례교회 김진수 목사는 “2003년부터 교회에서 매년 암송대회를 해오고 있는데 항상 1등을 하셨다”며 “지금도 그때 암송하신 성경구절들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모두 암송을 하실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암송했던 말씀을 어느 정도 지나면 잊어버리잖아요. 권사님은 지금도 다 암송하세요. 생각해 보세요. 사랑장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 승리장 로마서 8장, 믿음장 히브리서 11장, 이런 식으로 암송을 장별로 했거든요. 히브리서 11장 같은 경우는 40절까지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암송을 하십니다.

사실 저는 이 권사님을 우리교회 ‘평신도 사역자’로 생각합니다. 교회의 모든 식구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한 명 한 명에 대한 형편과 기도제목을 다 알고 계셔서 아침마다 성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세요. 새로 오시는 분이 있으면 이름 적어달라고 하시면서 기도해주시고요.

이런 분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고 행복이고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어머니를 주셨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제 설교에 대하여 그렇게 감탄을 해주시니까 설교자로서는 큰 기쁨이잖아요. 너무 힘이 납니다. 제가 잊어버리는 것도 권사님은 다 기억하시고 챙겨주세요.”

▲ 이필순 권사의 일기장 중에서(2013.7.28~7.29)     © 크리스찬리뷰

곽옥영 사모는 “권사님은 연세가 저렇게 드셨는데도 영성은 정말 깊으시다”며 “말씀을 사랑하시다 보니까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신다.”고 말한다.

“성도 한 분이, 불신자인 딸이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죽어가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해달라고 해서 목사님하고 병원으로 갔어요. 가보니 정말 혼수상태로 숨넘어가기 직전이었어요. 목사님이 귀에다 대고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어요.
그리고 그 분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권사님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잘 돌봐주셨어요. 음식을 해가지고 버스타고 기차타고 걸어서 집까지 찾아가세요. 지금은 이 분이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어 권사님의 영적인 딸이 되었어요.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계세요.

얼마 전에는 우리 교회 젊은 형제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면서 교회에 안 나와서 기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권사님이 손자와 자식들이 준 용돈을 모아가지고 그 형제에게 주셨어요. 권사님은 이렇듯 물질을 자기를 위해 쓰시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 쓰세요. 자신은 냉장고가 텅 비어있을 정도인데 말예요.”

▲ 시드니성서침례교회 김진수 목사와 곽옥영 사모와 함께 한 이필순 권사.                       © 크리스찬리뷰

영적인 딸 김영옥(55) 자매는 “심장질환으로 일 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할 정도로 심각하고 혼수상태였었는데 어머니의 기도로 살아났다”며 “어머니는 권사라고 교인에게서 대접은커녕 앞질러 고생하시면서 소리 없이 봉사만 하시는 사랑의 어머니시다”며 감격해했다. 이 권사의 이러한 헌신과 노력은 시드니성서침례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1-2시간씩 성경쓰기에 매달린다.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다. 요즘은 교회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쓴다. 그에게 성경 필사는 간절한 기도이다.

“성경을 옮겨 쓰기 전에는 항상 주님께 기도를 드리거든요.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손길을 빌려달라고요. 손이 말을 잘 안 들어서 글씨가 삐뚤어져요.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있도록 그래서 남이 보고 알아볼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달라고요.” 

그래서일까. 그의 성경 필사체는 할머니의 필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려하다.


▲ 본지와의 인터뷰 중 성경을 암송하는 이필순 권사. 성경 한 절 한 절을 읽으며 오른쪽 손가락을 꼽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성경필사 중에 얻은 지혜 ‘성경 암송’

성경 암송을 부탁드렸다. 이 권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이 끝나자마자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줄줄 암송하기 시작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

그는 1절부터 40절까지 나직이 읊조렸다.

“아이고. 정말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로마서 8장이 승리장인데 39절까지 있어요. 이것도 암송해볼까요?

이 권사의 음성에 열기가 더해갔다. 웅숭깊은 신앙의 진실을 열어 보이는 그의 알뜰한 배려가 자못 송구스러웠다. 그의 얼굴에 배어나오는 피로의 기색을 살피며 또 부탁을 드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권사는 퍽이나 흐뭇한 표정이었다.

“더 할까요?”

“아닙니다. 권사님. 이러단 밤새겠어요.”

▲ 양평 개군국민학교 교사 시절 이필순 선생(오른쪽)     © 이필순
▲ 금강산 수학여행(4학년) 기념사진(왼쪽 6번째 이필순 양)     © 이필순

이 권사는 경기도 양평 개군면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의 나이 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0살이 되던 해에는 원인모를 병으로 오빠를 잃었다. 농사를 짓는 가정으로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두 딸을 서울로 유학을 보내 공부시킬 정도로 교육열이 강했다.

“일제 시대였기 때문에 학교도 많지 않았고 학교가기도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어머니가 고생하셨지요. 언니는 숙명학교를 다녔고 난 동덕학교를 다녔어요. 처음에는 하숙도 하고 기숙사 생활도 하다가 기차가 생기는 바람에 통학을 했지요.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했는데 이 무렵 남편을 만났어요.”

이 권사는 1942년 11월, 스무 살에 출가했다. 남편 백남표는 지혜가 출중하여 당시 서울중앙청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역시 불신자였다. 그래도 이 권사는 친구 따라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불신자인 남편이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 칠순 잔치 기념사진  © 이필순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졌다. 서둘러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넷째 딸이 뱃속에 있을 때인데 전쟁이 일어난 거에요. 해산달이었어요. 남편을 남겨두고 아이들 네 명을 데리고 동네에서 급히 마련한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그 많은 짐들과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서 어떻게 내려갔는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가고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겠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전쟁이 끝날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6.25는 그에게도 이렇게 전쟁의 상흔을 안겨주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빵가게 주인으로 변신한다.

“안암동 고대 앞에서 빵가게를 시작했어요. 점심시간에는 우동과 자장면을 팔기도 했는데 순전히 고대학생들을 위한 가게였지요.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있었어요. 그러다가 호주로 오게 된 거에요.”

▲ 팔순 잔치 기념 사진    © 이필순

이 권사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1983년 10월. 넷째 딸의 초청이었다.

“넷째 딸이 먼저 시드니에 와 있었거든요. 그리고 딸애가 디와이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에는 성당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어요. 한참 동안 교회를 못 나갔지요. 워낙 교회들이 멀리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최승호 목사님이 디와이에 지교회를 개척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교회로 나가게 됐어요.

그런 후 김종규 목사님이 오시면서 저희는 시내로 집을 옮겼는데 그래도 한참 교회를 옮기지 않고 디와이 교회를 다녔어요. 교인들이 얼마 없는데 나까지 빠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러다가 거리가 멀고 누가 태워다 줘야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서리힐에 있는 시드니한인침례교회(현 시드니성서침례교회)로 나가게 됐지요.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주신 내 교회라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초창기에 열심히 봉사해야겠다고 다짐도 했고요. 하여튼 주일날만 자꾸 기다려졌으니까요.”

이 권사는 10년 전 남편과 뼈아픈 이별을 했다.

▲ 구순 잔치 기념 사진  © 이필순

기도로 성도들을 돕고 목사를 돕고

그는 요즘도 새벽 다섯 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로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 후 밖으로 나가 바다를 향하여 두 손을 들고 중보기도를 한다. 물론 중보기도는 자녀들뿐만 아니라 교역자와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과 기도 부탁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기도 식구 명단에 얹혀진다.

그의 집은 헌터스 힐(Hunters Hill)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정부 아파트로 바다가 훤희 내려다보이는 분위기가 드라마틱한 지역이다. 눈물을 흘리며 드린 기도의 응답이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기도의 응답을 즉시 받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인정받기가 힘들지 한 번 인정을 받기만 하면 그 후로는 뭐든지 척척이다.

성경필사를 하게 해주세요, 했더니 암송까지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질 않나, 신앙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집을 주십사 했더니 마음껏 기도하고 묵상하라고 이렇게 바다가 훤희 내려다보이는 집을 주시니 우리 하나님은 참 자상하시다.

중보기도 후에 집안으로 돌아와 성경을 암송한 후 운동을 한다.

“10분간 자전거를 타는데 손자가 사줬어요. 그리고 매트를 깔고 허리운동을 해요. 양다리를 머리 위로 반복해서 올리는 운동인데 20분 걸려요. 운동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고 경건의 시간을 가집니다. 찬송 3곡을 부르고 말씀 읽고 기도하죠. 낮에는 성경을 쓰고 화초도 들여다보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주로 ‘인간극장’을 봅니다. 다른 것은 안 봐요.”

평상적인 저녁식사는 6시 반쯤. 식사 후 기도를 하고 9시쯤이면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든다.

▲ 이필순 권사가 젊은 시절 조카와 함께    © 이필순

요즘 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다. 그래서 그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다. 귀한 아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과 교회 성전을 장만하는 것.

“아들이 아직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교회 성전을 장만해 주십사하고 날마다 기도드리고 있어요. 나 떠나기 전에 하나님, 내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요. 구순이 넘었으니까 서서히 하늘나라에 대해 생각해야지요. 세상 뜰 날이 언제인지 손꼽아봐야 될 나이니까.

그런데 절 당장 데려가셔도 괜찮은데 이 기도제목들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목사님 사모님 너무 애쓰시니까 그게 안타깝고 우리 아들네 가정을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가요.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성경을 부지런히 쓰면서 기도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충성하면 하나님이 또 어떤 은혜를 부어주실지 기대할 뿐이지요.”

그의 고백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성경 필사와 암송을 통한 고결한 영성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여종’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과 희망이다. 한국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권사와 같은 신실한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한 세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신앙 유산은 다음 세대에게도 반드시 전달되어야만 한다.

▲ 이필순 권사는 아침에 10분간 자전거를 타고 허리 운동을 한다. 그리고 성경 필사를 하며 가끔씩 집으로 찾아오는 영적인 딸 김영옥 씨를 만나 환담을 나누며 건강을 위해 기도해 준다.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방 벽면에 걸린 액자가 눈에 띄었다. 교회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받은 감사장이었다.

「위의 성도는 본 교회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교회성장에 기여한 바 큼으로 본 교회 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감사장을 드립니다. 2007년 7월 8일 시드니성서침례교회」

기자는 이 앞에서 내 삶의 뒤안길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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