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오히려 일본이 우리 땅임을 증명한다

독도 지킴이 이승진 독도 박물관장, 김철환 사진작가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11/25 [14:25]
▲ 독도박물관이 시드니한인회관에서 개최한 독도 사진 및 고지도 전시회가 지난 10월 25일부터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려 관계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오른쪽 3번째가 이승진 독도박물관장,     © 김철환
 
당연한, 너무도 당연한

누구나 귀에 익은 말 한 마디, 바로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 당연한 말을 왜 그토록 지루하게 반복해야 할까? 만일 ‘서울은 우리 땅’ ‘광주는 우리 땅’이라고 하면 뜨악한 표정을 지을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어나서 이불 개고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 가는... 등등의 너무 당연한 것을 너절하게 적어놓은 초등학생 일기장”을 누가 신나게 읽고 열독할 것인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이 말에 그동안 돌보지도 거두지도 못한 ‘국토의 막내’에 대한 애틋한 연민까지 느끼게 한다.

사실 ‘국토의 막내’ 하면 청마 유치환 선생의 시 <울릉도>가 떠오른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애달픈 국토의 막내 /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교과서에까지 실린 이 한 편의 시는. 시 자체로서는 출중했을지 몰라도, 과학과 지리, 해상학적으로 많은 오해와 곡해를 낳을 수도 있다. 어찌 ‘동쪽 먼 심해선 밖의/한 점 섬’이 울릉도뿐인가? 독도도 있다. 물론 여러 섬 중에 한 점 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 ‘애달픈 국토의 막내’라고 한 것은 시인의 치명적인 실수이다. ‘국토의 막내’는 울릉도가 아닌, 최남단 섬 마라도나 독도가 되어야 당연하다.

▲ 독도 지킴이 삼총사. 경북 도청 울릉도 주재원 김철환 사진작가, 이승진 독도박물관장, 김경도 학예연구사(오른쪽부터)     © 크리스찬리뷰
 
이처럼 독도는 가장 감수성이 여린 시인에게는 홀대를 받은 서러움의 섬이지만, 가수에게선 “미안해 막내야, 그동안 지켜주지 못했어. 이제 국토의 막내로 받아들일게”하는 고백과 사랑을 받은 것 같다. 이렇게 ‘국토의 막내, 독도’는 험난한 세월을 헤쳐 왔다.
 
 “독도가 몸살을 앓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사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는 섬이기에 일본과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도는 일본보다 우리나라와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삼봉도, 우산도, 가지도, 요도 등으로 우리나라가 지배했던 땅이었습니다. 독도는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영토입니다. 독도는 우리나라 땅 구석구석이 그렇듯 역사가 존재한다. 독도박물관은 이러한 역사를 수집, 정리, 전시, 교류하고 있습니다.”
 
▲ 독도박물관 로고     © 독도박물관

2002년부터 개방제 직위 공모하여 최근 연임이 결정된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의 일성이었다. 그는 독도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의 핵심은 한국 자료가 아니라고 하였다. 대부분 일본 자료로 한국에 불리한 자료도 전시할 뿐 아니라 일본에서 나온 독도 자료를 더 중요하게 전시한다고 했다.

▲ 독도박물관 전경     © 독도박물관
▲ 독도박물관 전시장 내부     © 독도박물관
 
“독도박물관에는 1천400여 점의 자료가 있고, 상설전시용으로는 300여 점 됩니다. 우리나라 자료가 많이 없는 것은 당연히 우리나라 땅으로 알고 있었으니 옛날부터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소리칠 필요는 없었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땅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대구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진부한 소리지요.

독도가 대한민국 역사로 편입된 15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 국토로 인식되고, 실제 지배와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당연히 우리 땅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 많은 고지도들이 그것을 증명하지요. 또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수습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의 송도(독도)를 떼어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 사실이 일본 자유신문 1882년 8월 2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그때부터 독도를 떼어가려는 헛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사가 역설적으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요.”

▲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김경도 학예연구사     © 독도박물관

독도수호의 선봉대

이 관장의 표현에 따르면, 주인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웃 나라 땅을 ‘우리 껍네’ 하고 가져가려는 일본은 ‘양심불량 국제도둑’이라고 비꼬았다, ‘독도 사태’는 섬나라의 영토 침탈 근성과 독도의 무한한 경제성, 군사적 중요성을 탐낸 일본의 끈질기고 못된 버릇의 발동이라고도 했다.

“400년 전의 임란이나 100년 전의 식민지배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노리는 일본 정치집단에 의한 고도의 기획이죠. 끝까지 지켜보고 독도를 수호해야죠. 그런 점에서 독도 박물관은 독도수호의 선봉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도가 전 세계 누구도 감히 부인하지 못할 ‘대한민국의 땅’임을 입증할 수많은 자료를 발굴, 전시, 홍보하면서 독도 수호의 선봉대에 서있다는 말이다. 독도박물관은 평생을 바쳐 독도 관련 지도, 관보, 문헌, 잡지, 신문 등 총 532점을 기증하고 몇 년 전 타계한 ‘영원한 독도인’ 이종학 초대 관장의 뒤를 이은 그 역시 ‘독도선봉’에 나선 것이 “팔자이지요”하면서 껄껄 웃었다.

▲ 독도박물관 앞에서 박물관 안내를 듣고 있는 독도 아카데미 학생들     © 독도박물관

그는 영남대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영남대 조선대 등지에서 강의를 하다 독도박물관장으로 말을 갈아탄 후, 독도지킴이로 때로는 공격을, 때로는 방어전을 펼쳐가고 있다. 그는 “믿을 수도 없고, 터무니도 없는 시마네현 고시 1백 주년을 기념해서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원천무효를 주장했다.

“100년 전에 독도가 자기네 땅이 되었다면 그 뒤 출판물이나 지도에 표기가 돼야하는데, 현재 일본 해상보안청의 전신인 수로국에서 발간한 자료에도 독도는 ‘1952년 전까지 우리 땅으로 돼있습니다.”

그러나 영토 수호는 단순히 ‘독도는 우리 땅’하며 감정적인 야단법석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제압한 사학자 김석형과 같은 걸출한 독도 연구진의 배출, 철저한 연구와 자료 확보, 막강한 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일본의 진실을 알리는 치열한 국민적 노력이 병행돼야 합니다. 그동안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리는데 너무 소홀했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일본의 허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군멍군식으로 홍보하면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져간 우리 책자로 한민족을 분석, 일제 식민 지배를 준비했고, 일제식민지배 때 수탈해간 자료로 한국의 오늘을 옭아매려는 일본의 야욕을 국제 외교루트를 통해서도 알려야 합니다. 아무리 일본이 100년, 200년 전부터 침탈을 준비한다지만 우리 문화가 더 앞서고, 머리도 더 좋은데 단결만 하면, 정신만 차리면 또다시 땅을 빼앗길 이유가 없죠. 빼앗겨서는 안 되죠. 그동안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너무 역할을 적게 했습니다. 일본은 지금 국제사법재판소, 국제해양법연구소 등에 자금 줄이지 않습니까.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역할을 키우고, 우리를 홍보해야 합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나 외교라인을 통해서 일본이 자국에 유리하게 세뇌작전을 이미 상당히 진척시켜 놓은 만큼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추월작전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울릉도 토박이 김철환 사진작가     © 크리스찬리뷰

 울릉도 사나이, 독도지킴이

여기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독도지킴이 김철환 사진작가를 만난다. 각종 교과서, 지리부도를 비롯해 한국의 유명한 독도사진 중 상당수는 그의 작품이다.

그는 ‘토종 울릉도 사나이’였다. 울릉도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다녔다. 상주대학 원예과를 졸업한 후 농업기술센터에서 일하다 공무원 공채로 1991년부터 울릉군청에서 봉직해 왔으며 2008년부터 현재까지 경북도청 울릉군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또 ‘사진에 미친 사나이’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께서 수동카메라를 우연한 기회에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갖고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육지에 사는 학생들은 먼 데로 갔겠지만, 울릉도는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2박 3일 동안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게 수학여행입니다. 그때 저녁노을을 찍었는데 아주 잘 나왔어요. 사진관에서 현상을 했더니, 그걸 보고 ‘이 사진 현상해서 쓰면 안되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며칠 후에 보니 온 동네 집집마다 그 사진이 걸려있는 거예요. 제가 찍은 사진이 그렇게 걸려있다는 것이 왠지 기분이 좋았어요.”

▲ 김철환 작 독도 괭이갈매기의 비행 연습.     © 김철환

그걸 계기로 ‘사진에 미친’ 그는 독도를 200여 회 이상 방문하며 독도 전문사진가로 우뚝 서게 됐다.

그리고 울릉도에서 독도를 촬영한 첫 작가이며, 울릉도에서 육지를 촬영한 첫 작가이기도 하다. 이 사진들은 날씨 탓으로 시계(視界) 제한을 많이 받아 몇 번 실패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과히 머지않고, 맑은 날씨엔 서로 보인다’고 했거든요. 우리 조상들은 깊은 혜안이 있었지만 이를 증빙해줄 만한 자료가 없었거든요. 제가 울릉도 석포마을에서 촬영한 그 사진으로 세종실록지리지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 주었지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사진으로 남겼다는 것이 얼마나 뜻깊은지요. 1999년 10월 대구매일신문에 실려있습니다.

울릉도에서 강원도 삼척시 두타산 산등성을 최초로 찍을 수 있었습니다. 120km 거리이지요. 삼국시대 이사부가 울릉도 정벌을 위해 나침반도 없이 목측, 즉 눈으로 관찰하여 왔다는 말을 알 수 있었습니다.” 

▲ 독도의 날을 맞아 시드니 중심가인 록스에서 오페라하우스까지 독도행진이 이어졌다.     © 크리스찬리뷰

그 다음 그는 육지에서 울릉도를 담기 위해 삼척시 소동대에서 6번 정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사진으로 하나님이 한민족에게 내려주신 자연을 담아왔다. 그렇게 담은 사진이 외교통상부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울릉군청 관광길라잡이 등등 독도와 울릉도 사진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사진을 갖다 쓴다고 하였다. 최근에야 많이 나아졌지만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없어 ‘거의 무료로 가져다 쓴다’면서 웃었다.

“중앙일간지 1면에 실릴 때는 한 컷에 50만 원 받습니다. 학생들 교재나 순수한 목적일 때는 무료로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의 독도ㆍ울릉도 사진은 2년전 시드니에서도 본지 권순형 발행인, 국민일보 강민석 사진부장과 함께 공동사진전으로 NSW주회의 의사당에서 시드니 교민들의 눈을 시원하게 적셔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는 ‘사진만 찍어댄’ 것도 아니다. 특히 그가 원예과 출신답게 ‘푸른독도가꾸기’ 모임 회원으로 나무심기에도 조언하고, 400~500그루의 심은 고향 울릉도의 ‘이웃동네 독도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이었다.


▲ 호주 어린이가 독도기를 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독도의 날

독도(獨島)는 한자로 해석 하면 ‘외로운 섬’이다. 처음에는 우산도로 부르다가 삼봉도, 가지도, 석도를 거쳐 1906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독도라 부르게 되었다. 독도는 삼국시대 신라 때부터 역사에 기록된다. 신라 22대 지증왕 때 우산국(독도)을 정복하여 신라에 귀속시켰고,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쟁이 나면 피난민을 이주시키기도 했고, 1242년(고종 29년)에는 울릉도 이민 사업을 실시했으나 풍랑 등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이처럼 우산국을 정벌했던 이사부 이야기, 농기구를 보내 거란족으로부터 황폐화된 울릉도를 재건하도록 했던 고려, 태조 때부터 계속 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지배 형태들. 우리 역사 속에 독도는 역사와 함께 늘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공도 정책을 폈다. 하지만 다양한 사유로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살았고 그때마다 수색 당하여 육지로 끌려와 교수형을 당하거나 노비가 되었다. 1699년(숙종 25년)에 안용복 장군은 어민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 근처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나 항의했으며, 도쿠가와 막부와 만나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는 불과 하루거리인데 일본 땅에서는 닷새나 걸리는, 독도는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여,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기도 했다.

지도 속의 독도는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도인 <동람도>에 수록된 ‘팔도총도’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울릉도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표현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방법은 18세기 전반까지 지속된다.   <조선국지리도>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제작한 지도인데 우산도(독도)와 울릉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인이 그린 지도 중 울릉,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그린 최초의 지도이다.

역사서에는 <고려사> 우산무릉 본2도-우산(독도) 무릉(울릉도)는 본래 두 섬이라고 하였으며, 조선 성종실록에서는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하여 ‘삼봉도’ 라고 하였고 정조실록에서는 바다사자의 일종인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라 하여 가지도(可支島)라고도 하였으며, 김자주가 가서 보고 삼봉도(독도)가 보인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1481년 <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와 강원도 별도에 우산도와 울릉도를 표기했다.

▲     © 독도박물관

이 후 고종은 경자칙령에서 독도를 돌섬(石島)라 불렀으며, 1900년 10월 25일 고종칙령 제41호에는 1900년 10월 25일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반포된 울릉도 지방관제 법령.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하며,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독도)가 관할구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던 것이 1950년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다 일본은 독도에 다시 상륙했다. 울릉도의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는 전쟁으로 인한 행적, 군사적 공백을 메우고, 1953년부터 일본과 전투를 치루면서 독도를 사수했다.

이런 역사적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10월 25일이다. 바로 ‘독도의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정한 대한제국칙령 제41호가 제정된 1900년 10월 25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독도의 날’은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은 아니다. 2000년부터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달라고 국회에 수 차례 접수하고 천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으나 그때마다 기각당했다. 그러자 2010년 민간단체인 한국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 ‘독도의 날’을 선포하였다.

한국교총은 16개 시ㆍ도 교총, 한국청소년연맹, 우리역사교육연구회, 독도학회와 공동주최로, 경상북도, 울릉군, 한국교육삼락회총연합회, 독도지킴이 서울 퇴직교장회 후원으로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대한제국의 독도 영유권을 칙령으로 제정한 10월 25일을 전국단위 최초로 ‘독도의 날’로 선포하였다.

2004년 울릉군에서는 이미 ‘울릉군민의 날에 관한 조례’로 10월 25일을 ‘군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또한,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을 정한 것에 대응하여, 2005년 6월 경상북도 의회는 ‘독도의 달’ 조례안을 가결했다. 이 법안은 매년 10월을 독도의 달로 정하는 것과 경상북도 소속 공무원과 도가 기본 재산 등으로 2분의 1 이상을 출자, 출연한 법인 및 단체 임직원의 공무상 일본 방문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도지사에게 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고 한다.

▲ 독도박물관 이승진 관장     © 크리스찬리뷰

이 독도의 날을 기념하여 이승진 관장, 김철환 사진작가, 김경도 학예연구사는 시드니에서 한인교포와 현지인을 대상으로 ‘우리 땅 독도 홍보’를 위한 특별전을 개최하기 위해 방문했다. 조국사랑 독도사랑 호주연합회, 한인회 등의 후원으로 공동 개최한 전시회에는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는 고지도ㆍ고문서 30점과 전시 패널 10점, 독도의 사계절과 자연을 담은 사진 30여 점을 전시했다. 그리고 이 모든 독도 관련 자료들을 호주에 기증하고 갔다. 우리 땅 독도를 사랑하기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고, 또 주고 빈손으로 간 그들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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